6.
“란스타인 왕국 왕녀, 리베르탄의 영주이자 오귀스트 공작령의 통치자이시며 키요른 섬과 한스만 제도의 수호자이신 레티시아 레반스타인 전하.”
웅성대는 소리는 대연회장의 문이 채 완전히 열리기도 전부터 시작되었다. 합당한 예를 갖추기 위해 몸을 숙인 하객들은 시선을 내리깔기 직전 목격한 공주 파트너의 정체에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성 미카텔라 훈장 수여자, 성 엘로바스 훈장 수여자, 영예로운 에반레스타드의 기사이자 고명한 로데안켈 십자가의 집행자인 전 란스타인 왕국군 대위 레스 키시르 경 입장하십니다.”
유유히 회장을 가로지르는 공주는 자체 발광이라도 하는 듯 빛이 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숨 막히게 화려한 차림에 단 한 치도 눌리지 않는 화사한 미모는 오늘은 특히 더 정신을 놓게 할 정도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금화를 뿌려 댈 듯 기분 좋은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공주를 에스코트하는 남자는 왼쪽 다리를 아주 미미하게 절었다.
의례적으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 순간이 지나자마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눈을 멀게 할 기세로 터져 나왔다.
“공주님! 사냥회 전야제에 키시르 경과 동행하셨다니, 아직 정식 약혼도 공표되지 않았는데 무슨 의미십니까!”
“국왕 폐하께서는 아시는 일입니까? 반응은 어떠셨습니까!”
“최근 적대적이 되어 가고 있는 여론을 의식한 보여 주기 식의 약혼은 아닙니까?”
“대체 키시르 경의 어떤 점에 그토록 끌리셨던 겁니까!”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자들의 무리에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연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는 당사자도, 눈을 뒤집으며 질문을 해 대는 기자들도, 그런 난장판에 불쾌해야 할 하객들도 아무도 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공주는 오늘 혼자 들어온다고 했잖아!”
“부, 분명히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방을 나설 때만 해도 혼자였다고 하고…….”
“저자는 그냥 가지고 노는 게 아니었어?”
“정신이 나갔지, 아니 대체 뭐가 부족해서 저런 얼굴만 반반한 다리 병신이랑.”
“설마 젠트리 출신을 우리 머리 위에 올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폐하께서 미치시지 않고서야 저런 결혼을 허락할 리가…….”
“그렇다고 공주가 제대로 된 가문과 결합해서 지금 이상으로 돈 들어올 구멍을 만들어 주려 하겠어? 폐하께서는 이참에 아예 저 결혼을 밀어붙였으면 붙였지…….”
“젠장,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폐하께서는 배신자 새끼한테 훈장을 주지 않나, 그 딸은 그놈을 끼고 살다 못해 결혼까지 하겠다고?”
흥분한 웅성거림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공주는 아주 태연하게 레스 키시르의 손을 잡고 춤을 세 번이나 췄다. 절름발이를 데리고 무슨 춤을 추냐며 비아냥거렸던 이들도 그 모습이 꽤나 그럴듯해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레스 키시르에게 딱 달라붙어 흐드러지게 웃는 공주의 미모는 순간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게 될 정도로 눈부셨다.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꼴에 공주에게 구애하고 있던 이들이 소태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일 아침 조간지의 헤드라인이 어떤 식으로 뽑혀 나올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기적의 신데렐라. 레스 키시르는 누구인가, 뭐 이렇게 써 재끼지 않을까?”
“승전 연회 때 이미 한 번 탈탈 털어 놓고서 새삼스레 말입니까.”
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에 레티시아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느새 주위를 휙 돌아보곤 그녀는 그를 순식간에 연회장의 밖, 고즈넉한 빛을 뿌리는 테라스로 끌어당겼다. 눈까지 쏟아지는 겨울밤의 테라스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문을 밖에서부터 걸어 잠근 레티시아가 덜덜 떨자 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공주님, 기세 좋게 탈출하신 건 좋은데 이러다가는 고드름이 되어 버릴 듯한데요.”
“다 수가 있어. 나 못 믿어?”
“굳건했던 믿음이 좀 흔들리는 것 같긴 합니다.”
“다 수가 있다니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친 레티시아는 냉큼 유리구두를 벗어 던졌다.
“공주―.”
레스가 미처 뭐라 하기도 전에 레티시아는 다람쥐같이 민첩하게 테라스의 난간을 넘더니 기둥을 부여잡고 슥 몸을 미끄러트렸다.
“거기 누구……!”
밤의 중정을 순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날카롭게 외치려다가 공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쩍 하고 굳어 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 레티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구두를 도로 신곤 레스에게 열심히 손짓했다.
“레스! 내려와! 보는 대로 굉장히 안전해!”
“…….”
아연하게 공주를 내려다보던 레스의 얼굴에 체념이 스쳤다. 경호원들이 멈춰 서서 구경하고 레티시아가 부담스러운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레스는 가볍게 난간을 짚고 훌쩍 몸을 날렸다. 불필요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깔끔한 동작으로 난간을 넘은 몸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바닥에 착지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레티시아가 곧 열렬하게 손뼉을 쳤다.
“와, 경. 순간 진짜 멋있었어!”
어쩐지 모르게 부끄러워지는 기분에 애꿎은 목덜미만 매만진 레스는 그녀의 팔을 슬며시 당겼다. 그에 끝없이 예찬을 이어 가려던 레티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더니 곧 알겠다는 듯 살풋 웃었다. 곧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아끌고 사람이 없는 중정을 가로질렀다.
“키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좋은 데.”
“신발도 불편해 보이는데…….”
“그런 거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좋은 데야. 가 보면 알아.”
팔을 잡아끄는 목소리가 워낙 들떠 있어 레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상월궁의 정원은 손톱만 한 푸른색 전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꽃을 피워 내지 않는 상록수들이 대신 은푸른 빛무리를 가지 가득 달고 길을 밝혔다. 발아래로 눈이 뭉개지며 발자국이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 흔적을 가리듯 계속 떨어져 내린 눈이 발자국 위로 다시금 쌓였다.
“이쪽으로.”
쪽문을 열자 탑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나선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의 다 왔어.”
결코, 편해 보이지 않는 유리구두를 신고도 레티시아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했다. 자신의 비밀 기지를 보여 주려는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한 두세 걸음 앞에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눈앞에서 꿈결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그 위로 흘러내리듯 장식된 다이아몬드와 눈이 녹아 머리칼에 맺힌 물방울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레스는 마치 홀린 듯 레티시아의 뒤를 따랐다.
그 계단을 얼마나 올랐을까.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이 끝나자 눈앞이 갑자기 확 트이며 전면 유리로 된 전망대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많아 봤자 다섯 명 정도가 들어앉을 수 있을 전망대에는 바닥에 두껍게 깔린 러그와 쿠션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등불도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레티시아가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흘렸다.
“상월궁은 본래 천체관측소가 있던 곳이거든. 근데 터가 좋다고 허물고 어머니가 새로 궁을 지어 버렸어. 그때 이 탑도 허물려 하는 걸 내가 반대해서 남겨 놨지.”
레스는 고개를 돌려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면서도 온몸으로 칭찬을 요구하고 있었다.
“경이 내 거라고 저렇게 요란하게 선전했으니까 저 아래에서 할 건 다 했잖아? 사실, 경이랑 연회에 갈 생각 했을 때부터 여기를 좀 꾸몄거든. 저기보다는 여기가 훨씬 더 예쁘니까―.”
“예쁜 건 공주님이시지요.”
그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순간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 레스는 그대로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가녀린 몸이 별 저항도 없이 딸려와 품 안에 파묻혔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을 끌어안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갈증이 일어 그는 심호흡을 했다.
“읏, 레스―.”
“죄송합니다, 열심히 준비해 주셨는데 지금 좀 눈에 안 들어와요.”
끌어안은 팔에 너무 힘을 주었는지 레티시아의 미간이 찡그려지자 그는 바짝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축이며 팔의 힘을 느슨하게 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였는데도 파렴치하게 아래가 뜨거워졌다.
당신도 나를 계속 생각해 주고 있었어.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으니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있었을 때처럼 그녀의 곁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르나와의 만남이 잦아지고, 밤에만 잠깐씩 만나는 관계가 되어 버리면서 할 수 있는 건 살을 섞는 일 정도뿐이었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어 가면서 평소보다 훨씬 더 심혈을 기울여 레티시아의 온몸을 만지고 정신을 놓을 때까지 절정으로 밀어붙이면서도 오히려 초조함은 심해졌다.
당신은, 사실 그냥 내 몸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닐까.
처음부터 그런 쪽의 관계를 원했고, 지금까지의 애인들과도 전부 그런 관계였고, ……사냥회 전야제의 파트너를 그가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별달리 실망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건 그냥 몸정이 쌓여서 그런 것이 아닌지, 그런데 상냥한 사람이니 그냥 그에게 맞춰 준 게 아닌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머리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수면 시간을 깎아 가며 카데타에서 돌아오면서도 돌아와서 처음 보는 모습이 전야제에서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을 레티시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져 주세요, 공주님.”
충동적으로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레스는 응석 부리듯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아니, 왜 갑자기―.”
“공주님을 뵙지 못해서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레스는 레티시아의 손을 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손이 닿기도 전에 이미 반쯤 서 있었던 성기는 손이 닿는 순간 순식간에 발기해 움찔댔다. 그 적나라한 변화에 그는 도망치듯 고개를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입술 안쪽의 연약한 살을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자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살짝살짝 레티시아의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고개를 비볐다.
“오늘은 정말 끝까지 착실한 파트너 역할을 하려고 했는데 공주님은 제 손 붙들고 이런 으슥한 곳으로나 오시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그녀를 봤다면, 그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 생각에 숨이 턱 막히고, 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입 안이 말랐다. 순간적으로 든 원망스러운 심정에 빗장뼈 위를 가볍게 이를 세워 깨물자 뒷머리가 꽉 쥐여 고개가 억지로 떨어져 나갔다.
“내 탓인 거야?”
눈앞에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아찔함과 아릿한 아랫배의 조임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느새 멍하게 열기에 눅진해진 황금빛 눈동자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며 레티시아는 이제 완전히 단단해져 젖어 들어가는 성기를 꽉 쥐었다.
“경, 뭘 기대하고 이렇게 세운 거야.”
“아!”
“너무 쉽잖아,”
흥분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애써 움직여 달콤한 목소리를 내며 레티시아는 남자의 어깨를 그대로 밀어 넘어트렸다. 밀려나는 대로 속절없이 넘어지는 남자의 금갈색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검푸르게 보이는 쿠션 위로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어떻게 된 거야. 경, 본래도 이렇게 잘 세워? 어쩌자고 이렇게 음란한 거야, 응?”
“그래서, 실망하셨어요?”
그 말에 레티시아는 숨을 멈췄다.
툭, 레스 키시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이미 두 개 풀려 있던 목덜미의 옷자락에 걸렸다. 그저 갈고리처럼 목깃에 걸어 놓는 것만으로 생겨난 틈 위로 음영이 내려앉았다.
목덜미의 연약한 살갗이 손가락의 그림자에 가려 검게 드러났다.
“당신…….”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는 가늘게 눈을 접어 보였다.
눈꼬리를 발갛게 물들인 채 올려다보는 레스 키시르는 정말,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 줄 것 같았다.
이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듯해 시선을 애써 돌려 버리면 갈급한 눈길이 매달리듯 따라붙었다.
“더 정숙하게 굴까요? 마음에 없는 거절이라도 할까요?”
“……레스.”
“어떤 취향이라도 맞춰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양손이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그녀의 고개를 돌려 저를 보게 했다.
“저 좀 써 주세…….”
요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의 끝이 가늘게 떨렸을 때, 그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듯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목이 졸리는 듯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레스가 기다렸다는 듯 매달렸다. 집요하게 잡아먹으려 드는 혀를 맞아들여 긁고 입술을 빨아들인다.
“하아.”
젖은 소리가 나고 소리 죽인 신음과 함께 목을 뒤로 꺾으며 그는 입을 더욱 벌려 그녀의 움직임을 편하게 했다. 그 무방비하게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에 레티시아는 입 안을 잘근거리며 깨물었다.
“당신 진짜 사람 미치게 한다.”
“아윽!”
단정하게 여민 희고 붉은 예복 상의의 단추를 잡아 뜯듯 풀며 무릎으로 남자의 성기를 짓누르듯 자극하자 그의 허리가 홱 휘어지며 파르르 떨렸다.
“오랜만이니까 우아하고, 고상하게 같이 즐기려고 했는데, 당신은 혼자서 발정 나서 덤벼들기나 하고.”
“그래서.”
꾹꾹 성기를 자극하며 하는 말에 완전히 쾌락에 젖어 붉어져 있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싫으셨어요?”
그 말에 레티시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용서해 줄게, 그러니까.”
포장지 벗기듯 상의를 벗겨 내며 드러난 맨가슴 위를 레티시아의 손가락이 위협하듯, 부추기듯 톡톡 두드렸다. 가장 예민한 돌기를 아주 살짝 지나친, 주변의 살과 살짝 색이 다른 유륜 위.
지그시 누르자 손 아래의 몸이 긴장으로 단단히 굳어지며 유두가 단단하게 섰다.
“빌어 봐.”
“공주님.”
기다렸다는 듯 애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만져 주세요.”
조르듯 가슴이 내밀어지며 허리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의 위에 지워지듯 앉은 레티시아의 비부 위로 단단히 발기한 성기가 비벼졌다.
“넣게 해 주세요.”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린 레스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지분거렸다.
“키샤, 제발―.”
달콤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소리 없는 교성으로 사그라졌다.
“레스, 참지 마.”
한 손으로는 성기를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곤두선 유두를 긁어 내며 레티시아는 다급하게 키스를 이어 갔다.
“소리 내.”
“아……!”
재촉하듯 혀끝을 가볍게 물자 남자의 입술에서 울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히 허리띠를 풀고 하의를 속옷과 함께 끌어 내리자 이미 흥건하게 젖은 성기가 튕기듯 모습을 드러냈다.
“하, 으응, 아, 아아!”
엄지로 귀두를 자극하며 손바닥으로 기둥을 감싸듯 쥐어 흔들자 레스가 어쩔 줄 모르며 몸부림쳤다. 자기 멋대로 흔들리는 허리를 그녀가 체중 전체를 이용해 짓누르자 무릎이 굽히며 허벅지가 활짝 열렸다.
“기, 기분 좋아요, 공주, 흐, 아윽, 아아, 공주, 공주님, 아, 좋아.”
“당신을 보면.”
어느새 온몸을 땀이 적셨다. 회음의 돌출부 위를 꽉꽉 누르고 고환을 굴리며 레티시아는 몇 번이나 바싹 말라 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당신을 보면, 진짜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분명히 당신이 웃는 게 좋은데 왜 이렇게, 우는 게 예쁜지.”
“아으, 하아, 공주님, 공주, 아!”
이미 총기가 사라진 황금빛 눈을 보며 레티시아는 그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에 입을 맞췄다. 소금기가 나야 할 액체가 이상하게 달았다.
“당신은.”
아래를 자극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는 속옷을 벗었다. 이미 넘치도록 젖어 든 아래가 속을 긁어 낼 쐐기를 찾아 움찔거렸다. 그녀는 이제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달아오른 성기를 그러쥐고 아래를 맞췄다.
“당신은, 내 거야.”
쪽, 부드럽게 어깨 위로 입맞춤이 떨어진 후, 그녀는 단번에 성기를 집어삼켰다.
소리 없는 교성과 함께 레스 키시르가 허리를 홱 휘었다.
속을 꽉 채우는 이물감에 레티시아는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위아래로 허릿짓을 시작하자 아래에 깔린 몸에서 달콤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쿠션 위에 마구 비비던 그가 매달리듯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가슴에 필사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민감한 곳을 간질이는 숨결에 확 성감이 치솟았다. 더욱 속도를 내어 허리를 짓쳐 올리며 레티시아는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의 머리칼을 꽉 그러쥐었다.
한 번 내부가 긁힐 때마다 쾌감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사고가 흐려지고 시야가 확 좁아졌다. 입술이 닿는 곳에 모조리 입을 맞추고 손바닥에 차지게 달라붙는 몸을 그러쥐고, 긁고, 살살 자극하며 그녀는 반쯤 열기에 취해 정신없이 속삭였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비틀린 취향이 있든 내가 다 받아 줄게. 나 잘하거든. 나만큼 잘하는 사람 찾기 힘들 거야.”
아아.
이 남자를 먹어 버리고 싶다.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내 몸 안으로 잡아먹어 다시는 놓지 않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나만이 가질 수 있도록.
그래도 그런 말을 대놓고 지껄일 정도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그녀는 대신 이갈이를 하듯 잘근잘근 어깨를 물어 대었다.
“나한테만 세우고, 나한테만 음란해져.”
응? 알았지? 조르듯 그리 이로 긁어 대는 여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레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목소리는 완전히 흐트러지고 쉬어 갈라져 있었다. 가슴 위로 손을 올리자 터질 듯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 고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표시해 주세요.”
그 새하얀 살갗 위로 그는 레티시아의 손을 이끌었다.
“여기에. 당신의 것이라고.”
그 말에 여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짙게 빛나는 녹안이 잡아먹을 듯 흉포해 그는 순간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아찔함을 느꼈다.
아무런 말 없이 레티시아가 움직임을 재개했다. 거침없이 속도를 올리는 허릿짓에 잠시 가라앉았던 쾌감이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고조되었다.
통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희미한 겨울이 달빛이 맨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치부를 모조리 드러내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레티시아는 여전히 눈부신 성장 차림이었다. 그 차이가 주는 수치심과 기묘한 쾌감에 레스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때, 사락, 머리칼이 맨살을 스치는 감각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바로 아래 심장이 위치한, 급소.
할짝, 어르듯 살을 한 번 핥은 레티시아는 다음 순간 인정사정없이 그 살을 힘껏 깨물었다.
“아, 아아아……!”
숨이 넘어가는 듯한 교성과 함께 레스는 홱 고개를 젖혔다. 가슴팍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리며 절정은 벼락같이 떨어져 내렸다.
“하읏.”
반사적으로 찔러 올린 성기에 한계까지 억누른 쾌감을 토해 내며 레티시아가 달했다. 성기를 감싸 안은 내벽이 꽉 조여 왔다. 그에 속절없이 울컥 체액을 토해 내며 레스는 잔인하고도 황홀한 쾌감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레티시아가 주는 것들은 죽음과 닿아 있었다. 빈사의 지경에서 맛보는 환락처럼 강렬하고,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그를 으깨고, 조각내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 달콤하고도 편안하고 현실감이 없어 쉽게 벗어날 수도 없고, 마약처럼 끝없는 갈증에 허덕이게 한다.
그는 절정의 여운으로 무너져 내리는 레티시아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밀려드는 충족감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제야 시야가 넓어지며 이제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참에는 간간이 보이던 등불이 최상층인 전망대에는 없었다. 그에 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닫자 전망대는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듯 보였다. 발아래로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 첫눈과 별처럼 반짝이는 상월궁의 불빛이 보였다.
이 세상과 단절된 듯한 좁고 닫힌 공간에, 정사의 여운으로 발갛게 물든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레티시아가 있었다.
“……아름답네요.”
레스는 열이 식어 가면서 소름이 돋은 레티시아의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끌어안으며 솔직하게 말하자 레티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았다.
“……그래서 같이 우아하게 즐기려고 했더니만.”
“제가 너무 발정이 나서.”
“짐승.”
“그렇게 좋아해 주시더니 이제는 볼 장 다 보셨다고 이렇게 차가우시고.”
짐짓 상처 입은 듯 시선을 내리까는 레스의 모습에 그녀는 아, 하고 혀를 내둘렀다. 애교를 부리듯 그녀의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이로 긁듯 살짝살짝 깨물던 레스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스르륵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들어 오며 깍지를 꼈다.
“저는 공주님을 보려고 밤잠 줄여 가면서 달려왔는데요. 선물도 사 오라고 하셔서 선물도 사 왔고.”
고개를 돌리자 눈꼬리를 늘어트린 남자가 세상 처연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깍지를 끼고 있던 손에 꽉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약한 건 또 귀신같이 알고.”
몸을 반쯤 돌려 긴장해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레스의 어깨에 입을 몇 번 맞추자 스르르 굳어 있던 근육이 이완되며 맞닿았던 손에 온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꽉 잡혀서 도저히 빼낼 수 없는 손은 포기한 채 다른 손으로 그녀는 레스의 코를 톡 쳤다.
“선물 때문에 봐주는 거야, 경. 선물 때문에.”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사르르 표정이 풀리며 레스가 미소 지었다. 깍지 껴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 입을 가볍게 맞춘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조그마한 상자를 열자 반짝이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랗고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금빛 반지는 마치 넝쿨 같은 모양이었다. 꽃잎 모양으로 세공된 부분에 둘러싸인 가운데에는 옐로 토파즈가 박혀 있었다. 촘촘한 컷을 넣은 토파즈는 희미한 광원에도 별처럼 화려하게 반짝였다.
홱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레스가 어딘가 어색한 얼굴로 옅게 웃었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므네시바 침투 작전 때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거든요.”
“벙커 안에 숨어 있던 적군 참모 총장을 사살한 거?”
“예에. 그때 받은 훈장에 마침 토파즈가 박혀 있어서.”
그 참모 총장이 숨어 있던 벙커는 적의 연대 세 개가 지키고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 한복판에 있었다. 아군도 꽤나 많은 정예병을 동원했으나 성공 확률은 둘째 치고 생존 확률도 거의 바닥으로 점쳐졌던 작전이었다. 그 작전에 성공했기에 데캉트 군은 리모리사의 수원지를 포기하고 후퇴했고, 강경 친전파였던 참모 총장의 사살 이후 재편된 데캉트 군은 온건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크게 보자면 지난여름 휴전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랬기에 레스 키시르는 고작 임관 2년 만에 중위가 되었다. 그리고 성 엘로바스 훈장이라는, 신예 장교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치하를 받게 된 것이었다.
“설마, ……설마!”
“그걸 빼서 가공시켰다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일까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훈장에 박혀 있던 토파즈가 저 반지에 박혀 있다면 그 훈장에는 더 이상 토파즈가 없다는 말이고……. 아니, 물론 한 번 준 훈장을 어떻게 하던 자기 마음이고, 문제 삼는다고 해도 괘씸죄 이외에는 물을 수 없겠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훈장인데! 성 미카텔라 훈장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5년에 고작 한두 개 주곤 하는 건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찔해져 와 레티시아는 이마를 꽉 눌렀다.
“……와, 경. 나도 언제나 상식적인 사람은 아닌데 경도 보통이 아닌데? 아깝지 않아? 목숨 건 작전에서 거둔 전공의 대가인데.”
“제 목숨값을 공주님께 드리는 것만큼 어울리는 일은 없는 듯한데요.”
레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약지에 반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당신께 드릴 첫 선물입니다. 빌린 돈으로 살 수는 없잖습니까.”
반지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가 제자리인 듯 완벽하게 크기가 맞아떨어졌다. 손가락을 감싸 안듯 반짝이는 모습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해바라기네.”
손가락을 감싸 안으며 태양을 닮은 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 레스의 온기로 따뜻한 반지는 그리 멀지 않은 가을날, 꽃이 가득했던 황금빛 들판에서 흐드러지게 웃었던 남자의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레티시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정말 꽃을 가져왔어.”
그 말에 소리 없이 미소로 답했던 레스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어느새 창밖에는 소리 없이 쏟아지던 눈이 그치고 구름 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은푸른 달빛이 부드러운 음영을 드리운 밤의 장막을 뒤로하고 레스 키시르가 가만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공주님. 저, 지금은 이렇지만, 예전에는 잘나갔습니다.”
“…….”
“앞으로도 훨씬 더 잘나갈 자신 있고요.”
두근, 크게 심장이 뛰어 레티시아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가슴께의 옷자락을 그러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 내어 양손으로 소중히 쥔 그가 그 손끝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당신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겁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저를 택한 게 실수였다고 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입술이 닿은 피부가 타오르는 듯이 뜨거웠다. 언제 어느 때든 망설임 없이 나불대곤 하던 혀가 입천장에 딱 달라붙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잡혔던 손이고 몇 번이고 닿았던 입술이었다. 이렇게 레스 키시르가 그녀 앞에 무릎 꿇은 것도, 이렇게 시선 안에 오롯이 그녀만을 담아 본 것도 결코 처음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눈치채서 머리가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의 홍수에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키샤,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그리고 레스 키시르가 그런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쥐어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지근거리에서 내려다본 황금빛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얽혀 왔다.
“그러니 부디 저를 택해요.”
“……그거 알아?”
불안으로 잘게 떨리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레티시아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마주 붙잡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
그 말에 탄성같이 숨을 토해 내며 레스가 홱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가늘게 떨리는 몸이 이완되어 축 늘어져 레티시아는 그의 무게에 밀려 쿠션 위로 쓰러졌다. 그게 어쩐지 귀여워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리자 그녀의 배에 고개를 묻은 남자가 속삭였다.
“당신께서는 제 인생의 가장 큰 기적이십니다.”
그녀를 끌어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순간 오싹한 적의마저도 느껴지는 날 선 말에 레티시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내려다본 그의 얼굴은 그녀의 품에 안겨 보이지 않았으나 훤히 맨살이 드러난 등과 어깨의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해 있었다. 손을 대기만 해도 피를 볼 것 같은 공격적인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굳어 버리는 몸을 애써 이완시키려 노력하며 그녀는 그 등 근육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죽지 않아, 레스.”
손이 닿는 순간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을 느꼈다. 피비린내가 묻어나는 듯한 남자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그녀는 그 머리 위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당신에게 내 목숨까지 지게 하진 않아.”
지그시 힘주어 한 말에 아플 정도로 그녀에게 매달려 있던 팔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 몸을 마주 끌어안으며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칼날처럼 곤두섰던 공기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며 레스가 그녀의 눈꺼풀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이마에, 콧잔등에, 볼에, 입술에 몇 번씩이나 떨어져 내렸다.
“고마워요.”
“…….”
“사랑해요.”
그 말에 레티시아는 레스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만화경처럼 오색의 감정이 유영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그저 씩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키스가 유성우처럼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