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열흘 동안 열리는 사냥회의 전야제의 하늘은 금세라도 눈이 쏟아질 듯한 옅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전야제의 시작은 회장인 상월궁의 은빛 성화대에 불이 붙는 해질녘부터였으나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부터 하객들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연회의 총책임자로서 열흘 전부터 상월궁에서 상주하고 있던 레티시아는 창문 너머로 꾸물꾸물 이어지는 마차들과 사람들의 행렬을 흘끗 내다보곤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시라에게 물었다.
“초대장 확인은?”
“정문에서 한 번, 로비에서 다시 한 번 하고 있습니다.”
“경비는?”
“2인 1조로 해서 저번에 정했던 동선대로 구역을 나눠 돌게 하고 있습니다.”
“말이랑 마차 수용할 곳은?”
“다 지시해 뒀으니까 이제 슬슬 준비하시지요. 본래는 한 번 휙 보고 날인만 하시던 분이.”
“……의욕 없어.”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아 소파와 하나가 되어 버린 공주를 테시라는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회 때 입을 의상이랑 스타일링 준비를 해야 한다고 두 달 전부터 저를 들볶아 대시던 분이 계셨는데요.”
“사라졌어.”
테시라는 와, 사람이 입으로 똥을 싸네, 로 요약될 수 있는 표정을 지었다.
준비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무력감도 커진다는 간단한 이치를 한동안 죽어라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던 레티시아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발단은 한 달 전, 레스가 그녀에게 과거를 털어놓은 밤이었다.
‘저는, 진실을 밝히고 배신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 이름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면…… 공주님께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이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는데 그 얼굴에 대고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도와줄게! 뭐든지 맡겨 줘!’
그리고 전두엽을 거치지 않고 그렇게 내뱉어 버린 그녀의 제안에 레스 키시르는 정말로 그녀에게 일거리를 잔뜩 떠맡겨 버렸다.
도와준다는 게 빈말은 절대 아니었기에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이 비밀주의자가 그어 놓은 선 안에 드디어 발을 들인 것 같아서 뭐라 할 수 없이 뿌듯했다. 너무나 뿌듯해서 그녀는 레오르나와의 만남을 주선했고, 휘하의 경호단을 한 부대 떼어 주었으며, 비밀 모의를 할 장소를 제공했고, 레스의 뒤에 붙어 있던 꼬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떼어 냈다. 그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대가로 그녀는 거의 한 달 동안 그의 얼굴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매일 만나 끌어안고 뒹구는 건 물론이고 가끔 만나서 사교회에 참석하거나 저택에서 식사를 하는 것조차도 멈췄다.
‘……일이 진짜 잘 풀리나 보지.’
레스 키시르는 그녀의 애인인데 정작 그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와 더 자주 만나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차라리 하는 일 없는 백수였다면 그 비밀 모임마다 얼굴을 들이밀었을 텐데 그녀는 영주이자 상단주였고, 꽤 바빴다.
왜 내 애인을 독점하고 있냐고 언니한테 어쭙잖게 항의라도 했다간 와, 저걸 머리라고 달고 다니네, 라는 표정을 한 언니에게 등짝을 후려맞았겠지. 기분 나쁘지만 인정하기에는 너무 유치하고, 그렇다고 항의하자니 이론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어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고 있자면 가끔씩 들르는 레스가 그녀를 등 뒤에서부터 안아 오곤 했다.
‘키샤.’
그 밤의 고백을 기준으로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바뀐 것 같았다. 여전히 목소리는 다정했고 미소는 달콤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물 같던 남자에게서 생기가 느껴졌다.
‘제 사랑하는 공주님.’
가볍게 입술로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무는 레스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흘러넘쳤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끌어안곤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목덜미에 비비며 속삭였다.
‘반겨 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를 다루는 법을 너무나도 빨리 깨우쳐 버린 남자의 요염한 시선과 마주친 순간 레티시아는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 입술에 냉큼 입을 맞췄다. 그러면 그는 그녀를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고 정신없이 혀를 얽어 오곤 했다.
‘경은, 경은 진짜 어쩌자고.’
보면 볼수록 좋아질까.
맨살이 닿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떨어져 나갈 때 피부를 오소소 떨리게 하는 한기가 더욱더 차가웠다. 그러나 아침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한껏 시간을 끄는 주제에 레스는 언제나 끝에는 그녀의 침대를 떠나서 며칠씩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화룡점정은 중요 참고인이 레스와 함께가 아니라면 수도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스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안색을 끊임없이 살폈다.
아무리 서둘러도 사냥회가 다 끝날 때까지 돌아올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렇다고 그 참고인을 제때 데려오지 않으면 이제까지 준비해 왔던 계획이 전부 다 일그러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레스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초대장을 품에 숨긴 채로 레티시아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카데타까지 다녀와야 한다며. 경한테 감시가 붙었다 하더라도 사냥회 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시선이 분산될 테니까 몰래 다녀오기 쉬울 거야. 어차피 나는 주최자니까 계속 바쁠 텐데 그동안 경 혼자서 덩그러니 서 있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기대하셨잖습니까. 적어도 전야제만큼은 함께한 다음 출발하는 게…….’
‘그렇게 강행군할 필요 없어. 사냥제는 매년 열리는 것이고, 경과 파트너가 될 기회는 앞으로도 많이 있을 거잖아?’
그녀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남자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카데타는 남쪽이라 아직 꽃이 핀다던데.’
‘선물로 꽃이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해바라기가 좋더라.’
‘만들어서라도 가져와야겠네요.’
그 말에 그녀는 킥킥 소리를 죽여 웃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건네주지 못한 초대장은 찢어서 태워 버렸다.
혼자서만 잔뜩 계획했던 걸 하나하나 취소하고 있자니 가슴이 뭐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허했다. 생경하기 짝이 없는 감각에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 안을 빙빙 돌다가 방 청소를 하는 하녀들에게 쫓겨나고, 정원에서 소나무 가지를 하나하나 부러트리다가 펄펄 뛰는 정원사에게서 도망친 후, 응접실로 향하는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테시라에게 숨 쉴 시간이 있으면 일을 하라고 혼이 났다.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아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자니 무언가가 울컥했다.
‘……그 사람은 자기 할 일 알아서 잘하기만 하던데.’
그건 이제까지의 그녀의 특기였다. 연애 상대가 어디서 뭘 하든 즐기고 싶은 건 다 즐기는 것. 상대와 만나고 싶으면 만났고, 자고 싶으면 잤다. 연락이 끊기면 그런가 싶었고, 반대로 집요하게 달라붙으면 도망갔다. 헤어질 때마다 위자료는 충분히 안겨 줬으니 상대는 좋아했다.
편했다. 재미있었다.
남자를 잔뜩 사귀었던 건 그래서였다.
남자를 사귀면서 이렇게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빨리 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늪같이 질척거리고 안개같이 애매하던 감정이 뚜렷하게 형태를 잡아 갔다.
“아.”
다시 떠올리려니 왠지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가라앉고,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게 도려 나간 듯해서 레티시아는 툭 내뱉었다.
“……보고 싶다.”
“공주님?”
느닷없이 중얼거린 말에 테시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대충 저어 보이며 레티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테시라 때문에 많이 지체됐어. 빨리 준비해야지.”
“지체요. 저 때문에요!”
“응, 미안한 거 알아. 내가 너그럽게 용서할게.”
“와! 공주님, 또 이렇게 사기 치는 건 또 어디서 배우셔서!”
‘보고 싶다.’
콧김으로 벽도 무너트릴 기세인 테시라에게 실실 웃어 보이며 레티시아는 방을 나섰다.
‘돌아오면 못 도망가게 주머니에 넣어 버려야지.’
레스 키시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요, 라고 하면서 그냥 예쁘게 웃어 버릴 듯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침실로 돌아가자 옷걸이와 화장대를 둘러싼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의전 시녀들이 반색하며 몰려들었다. 호들갑을 떠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레티시아는 길게 하품을 했다. 도착이 늦었다며 세상이 무너질 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태평하게 늘어진 그녀의 준비가 끝난 것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떨어져 주위가 어둑해졌을 때였다.
“준비 다 되셨습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의전 시녀의 말에 반쯤 졸고 있던 레티시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시녀가 들고 있는 전신 거울이 있었다. 세련된 드레스와 장식에 어울리지 않게 거울에 비친 여자가 하도 따분하고 지루해 보여서 레티시아는 좀 웃었다.
“성과금 달라고 해도 뭐라 못할 정도인데?”
속내와는 상관없이 내뱉은 그 말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갑자기 사랑을 고백해 대는 시녀들에게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어 준 레티시아의 발에 수정처럼 투명한 재질의 구두가 신겨졌다. 부드러운 은여우의 털로 소매와 목덜미를 장식하는 은푸른 드레스는 눈이 녹아 흘러내려 얼음으로 굳어 반짝이는 듯 보였다. 겨울처럼 온통 새하얀 가운데 얼음 결정 같은 다이아몬드가 꽃 모양을 이루며 장식한 새빨간 머리카락만이 부드럽게 굽이쳐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종유석처럼 장식해 놓은 색색의 등불이 밝히는 회랑을 따라 대연회장으로 향하자니 창밖으로 구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커다란 이중문으로 차단되었음에도 흘러나오곤 하는 대연회장의 소음조차 인위적으로 잘라 낸 듯 주위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아.”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낮게 탄성을 내뱉곤 발걸음을 멈췄다. 창문을 활짝 열고 쭉 팔을 내밀자 손끝에 차가운 냉기가 머물렀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 온다.”
하늘하늘 꽃잎이 흩날리듯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꽤나 큰 눈송이인 걸 보니 쌓일 게 분명했다. 그녀는 한참을 넋 놓고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군고구마 먹으면 맛있겠다.”
“공주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조용히 뒤를 따르던 경호원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보였다.
“아냐. 가자.”
도로 창문을 닫아 버리며 레티시아는 몸을 돌렸다.
‘키샤, 군고구마 좋아해요?’
한 달 전, 이불에 돌돌 말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침대에서 미적거리던 그녀에게 살짝살짝 입을 맞추며 레스는 그녀의 이불을 살살 풀었다.
‘제가 고구마 잘 굽거든요.’
레스는 아직 잠에서 덜 깨서 멍해 있는 그녀를 다시 숄로 꼼꼼히 감싸고 벽난로 앞으로 데려와 안락의자에 앉힌 후 쿠션을 몇 개나 등에 받쳤다. 푹신하고 따뜻해서 다시 꾸벅거리며 조는 그녀의 발치에 주저앉아 그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도 모를 고구마를 하나하나 포일로 싸더니 벽난로 안에 묻었다.
눈앞에서 살짝 곱슬곱슬한 금갈색 머리칼이 유혹하듯 흔들려 레티시아는 손을 뻗어 그걸 만지작거렸다. 레스에게서는 갓 내린 눈과 겨울의 소나무와 가을의 단풍시럽의 향이 났다.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의 장작, 레스 키시르가 불을 뒤적거리는 소리, 거기에 섞여 드는, 어딘가 음이 반음씩 맞지 않는 흥얼거림.
킥킥거리며 동그랗게 몸을 만 레티시아는 레스의 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경, 노래 못하지.’
‘아, 티 납니까?’
‘아니, 목소리가 좋아서 한참 생각해야 했어.’
‘키샤가 저한테 반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닿아 있는 몸을 통해 나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레스는 여전히 그 음이 조금씩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곧 그 나른한 공기에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키샤, 입 벌려 보세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입을 여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입 안으로 군고구마가 들어왔다. 따뜻하나 입이 델 정도로 뜨겁진 않은, 씹지 않고 입 안에서 뭉개질 것같이 부드럽고, 불에 구운 음식 특유의 향이 달콤한 맛과 섞여 식욕을 돋웠다. 크게 베어 문 것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고구마가 물렸다. 주면 주는 대로 덥석덥석 잘 먹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구마를 물고 있는 볼을 살살 어루만지더니 코도 건드려 보고, 고집스럽게 감은 채인 눈두덩 위도 가만히 쓸어내린 레스는 다시 웃었다.
‘눈 오면 좋겠네요.’
‘눈이 왜?’
‘눈이 많이 오면 밖에 못 나가잖습니까.’
그 말에 레티시아는 결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무릎 위에 턱을 괸 채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레스는 시선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을 휘며 웃음을 지었다. 창틀 너머로 흘러들어온 겨울 아침의 햇빛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 반짝였다. 그 순간의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해 그녀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마치 홀리듯,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녀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와 거추장스러운 코트가 필요 없는 초봄의 따스함이 좋았으나 그 순간, 딱히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던 눈이 오지 않아서 조금, 아쉬워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고 좋아했을 사람이 떠올라 그녀는 조금 더 아쉬워졌다.
‘눈이 이번만 오고 안 올 것도 아닌데.’
어차피 매년 찾아오는 눈이었다. 첫눈이라고 해서 다른 눈보다 딱히 더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기다리게 되었을 뿐이다.
머리를 가볍게 털어 상념을 지워 내며 레티시아는 대연회장의 거대한 이중문 앞에 섰다. 문 앞에서 초대객의 명단을 확인하던 시종이 그녀를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 오셨습니까.”
“내가 거의 마지막이겠네?”
“예, 거의 다 도착하셨습니다.”
“그럼 나도 들어가야지.”
“같이 입장하시는 분은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같이 입장해야 하는 분의 초대장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생글거리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자 눈치 빠른 시종은 더 많은 것을 묻지 않고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연회장의 불빛을 보며 레티시아는 손을 들어 하품을 가렸다.
‘대충 시간만 좀 때우다가 들어가서 자야지. 악단 고르는 데는 신경 썼으니까 연주하는 거 들으면서 음식 좀 집어 먹고…… 기자들 몰려오면 또 시끄러울 텐데. 아…… 그냥 집에 가면 안 되나.’
그때였다.
“그 파트너요.”
문을 열려 했던 시종의 눈이 당혹으로 커졌다. 등 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홱 몸을 돌렸다.
급히 달려왔는지 살짝 곱슬기가 있는 머리칼에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승전 연회 때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헐렁했던 흰색과 금색의 란스타인 장교 예복이 몸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겨울밤의 바람에 차갑게 얼어붙은 숨을 몰아쉬던 레스 키시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긴장한 채로 물었다.
“그거, 제가 하면 안 됩니까?”
그를 알아본 시종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티시아는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초대장을 받아 펼쳐보았다.
레티시아 레반스타인 공주 수석 보좌관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에 레티시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테시라한테 그렇게 좋아하는 이오니아 사를 그냥 통째로 사 줄까.”
꽉 그 손을 잡자 싸늘한 냉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그리고 딱 그만큼 가슴 한편에 뻥 뚫려 있던 구멍이 차올랐다. 한 번 눈을 깜박이자 커다란 창문 너머로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려는 듯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자 오늘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만찬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꽉 거머쥐었던 손을 당기자 레스 키시르가 그녀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다.
“키샤, 보고 싶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말로 가슴이 터지는 듯했으나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한 마디뿐이었다.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