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46)

4.

‘공주님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식사에 참석하지 못하시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고작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동생과의 아침 식사 약속을 위해 준비를 막 마쳤을 때 찾아온 동생의 수석 보좌관의 말이었다. 그에 레오르나는 두말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동생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텅 빈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스 키시르를 보자마자 그녀는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키샤가 웬일로 귀엽게 감기에 걸렸나 싶었더니, 경이구나?”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워낙 시선을 끄시는 분인지라 부득이하게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그럼 그렇지. 걔가 감기 같은 것에 걸릴 리가 없지.”

그녀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침실 안에는 본래라면 있을 리가 없는 티 테이블과 다과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의자를 빼 주는 레스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 레오르나는 그 의자에 냉큼 앉아 다리를 꼬았다. 턱짓으로 남자에게 자리를 권하며 그녀는 아직 따뜻한 찻주전자를 들어 가득 차를 따랐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향차 너머로 가만히 시선을 내리깐 레스 키시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오르나는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결정을 내렸나 보구나.”

“전하의 인내심에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는. 자세한 건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감사해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

밖에서 만났다가 이야기가 새거나 이상한 소문이 돌면 곤란하니 이런 장소를 골랐겠지만 고작 그것뿐일까.

“감사요.”

“주인도 없는 침실에서 손님을 맞을 수 있는 것은 그 반려뿐이지.”

레스 키시르는 가만히 시선을 떨어트린 채로 입을 다물었다. 부정하지 않는 침묵은 그것만으로도 긍정이었다.

“그 애가 자기 남편으로 삼은 이를 실패할 일에 들이밀리는 없을 것이고.”

“…….”

“그럼 최선을 다해 원조해 주겠지. 나라 제일의 부호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얼마나 든든한데.”

“공주님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으신 줄 알았습니다.”

“왜 내가 레티시아를 마다할 거로 생각하지? 그 애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

“공주님을 골육상잔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레오르나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녀와 거의 십 년을 함께해 온 참모들조차 가끔씩은 레티시아를 포섭하는 것에 미적지근한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녀를 고작해야 두 번째로 만나는 생판 남이 그녀를 이리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지금까지는 그 아이가 내키지 않아 했으니 놔둔 거지 나도 가능하면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지. 천지가 개벽해서 걔가 린스베른의 편이라도 들어 봐. 그랬다면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은 채 레오르나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걔가 알아서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으니 내가 마다할 이유야 없지. 그러니까 경에게는 대단히 감사하고 있어.”

그 말에 이제까지 예의 바른 무표정을 고집하고 있던 레스 키시르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뭘?”

“공주님께서 좋은 자매를 두셔서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스 키시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딘가 존재감이 없고 속을 읽을 수 없던 무채색 눈동자가 확 감정을 담아 색을 바꿨다.

“공주님께 나머지 가족을 빼앗아 가는 죄책감을 덜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서 순간적으로 확 피비린내가 풍겨 오는 듯해 레오르나는 자세를 바르게 해 앉았다.

“그대는 많은 준비를 해 왔지.”

레스 키시르가 셀레스트 전선의 유족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기자들과 두루 안면을 트는 것도, 누군가에게 꽤나 많은 돈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악명 높은 군사 재판장의 수사실에 갇혀서도 자신의 혐의를 단 한 순간도 인정한 적이 없었다.

“뭘 준비하고 있지?”

“지금은 물러났지만, 저 역시 란스타인의 장교 출신으로서 청월의 맹세를 한 몸입니다.”

사관학교를 통해서든, 혹은 전선에서 공을 세워서든 어떤 형식으로든 란스타인의 장교가 된 이들은 군을 지휘하기 전에 다섯 개의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하나, 충성과 경애를 다해 명을 따를 것.

하나, 나라와 국민을 신의로 섬길 것.

하나, 전우를 두고 등을 보이지 말 것.

하나, 부패를 용서하지 않고 자신에게 엄격할 것.

하나. 맹세는 목숨과 명예로 지킬 것.

“……맹세는 죽음이 입을 맞춰서 거둬 가는 것.”

“예.”

“모두가 감시자이고 모두가 처벌자일 것.”

“예.”

란스타인은 북방의 용병들이 엔하임 산맥을 넘어 남부에 정착하면서 세운 나라이다. 창칼을 내려놓고 외교와 협정으로 주변 국가를 아우르며 북부의 맹주가 된 후에도 그들은 나라의 근간을 이룬 전사의 계율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그 누구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 유명무실한 계율이었으나 저 다섯 가지 계율이야말로 현 란스타인 왕국군의 모든 군법의 모태였다.

그리고 그 네 번째 계율에 따라 란스타인의 모든 장교에게는 원칙적으로 저 계율을 깬 다른 장교를 군 원수에게 직접 고발할 수 있는 청원권이 있다.

고발을 접수한 원수는 의무적으로 그 고발 대상자를 강제 소환해 독립적으로 조사할 의무를 지닌다. 대단히 강제적이고, 따라서 대단히 모욕적일 수 있기에 고발 대상자에게 원한을 살 수밖에 없는 법이다. 고발하는 당사자도, 판결을 내려야 하는 군 원수도 정치적 뒷감당이 껄끄러워지므로 평화가 길어지면서 자주 쓰지 않게 된 권한이다.

“대위. 청월의 수호자로서 경의 고발을 듣겠다.”

하지만 지금의 란스타인 군의 총 원수는 왕 다음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태녀였다.

여유며 웃음기가 싹 사라진 엄격한 목소리에 레스 키시르는 바로 레오르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푸르른 초승달의 문장으로 봉해진 봉투를 품에서 꺼내 들며 그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징벌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나무나 팔던 무역상의 내다 버린 삼남일 뿐이고, 그런 제가 청월 옥좌의 주인의 적격성을 왈가불가할 수 있는 입장은 결코 아니지만.”

“…….”

“그래도 자기를 도망시키기 위해 남겨졌다가 포로가 된 이들을 저버리는 이가 한 나라의 옥좌를 지탱할 재목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맹세는 죽음이 입을 맞춰서 거둬 가는 것.

강제로 은퇴당했어도 레스 키시르는 한 번 맹세를 했고, 아무리 왕자라 하더라도 린스베른은 평생 맹세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전(前) 란스타인 왕국군 제1특수부대 작전 참모 레스 키시르 대위, 영광스러운 왕국군 원수이신 레오르나 펠리아 이센 레반스타인 왕태녀 전하께 국가 반역의 죄를 고발하려 합니다.”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철퇴에 레오르나는 소리 없이 전율했다.

‘드디어, 너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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