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주는 박자를 무시하고, 기본 스텝을 무시하고, 아무튼 규칙이란 규칙은 모조리 무시했다. 4분의 3박자의 경쾌하고 나풀거리는 스텝은 그보다 훨씬 느려졌고, 발이 땅에 닿는 듯 마는 듯해야 하는 턴은 과감히 생략되었다. 결국, 그들은 서로 찰싹 달라붙은 채로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공주님, 이건 왈츠가 아닌데요.”
결국, 조심스레 꺼낸 말에 공주는 눈만을 살짝 접으며 실쭉 웃었다.
“왈츠만 춤은 아니잖아?”
“전통을 중시하는 나이 드신 분들께 또 얼마나 욕을 먹으시려고요.”
“뭘 모르네, 경.”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심해를 유영하듯 발을 미끄러트리던 공주가 휙 몸을 틀었다. 마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지지대 삼아 빙그르르 돌자 새하얀 치맛자락이 꽃이 피어나듯 팔락이더니 다리에 휘감겼다.
“나 정도 되면 일탈도 새로운 유행의 시작이 되는 거야.”
“……공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정도 못 하겠네요.”
“그렇지? 게다가 그 노인네들은 형식에 얽매여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잖아.”
“그게 뭔데요.”
“즐기는 거.”
다시 한 번 빙그르르 공주가 턴을 했다.
“음악을 즐기고.”
붉은색으로 물결치는 머리칼이 새하얀 목덜미를 간질이다 하늘거리며 제자리를 찾는다. 허공에 공주 특유의 달콤하고도 청량한 체향이 여운처럼 남는다.
“자유롭게 몸이 움직이는 감각을 즐기고.”
잠시 떨어졌던 몸이 제자리를 찾듯 그의 품 안으로 내려앉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현악기의 멜로디와 함께 레티시아의 허리가 휙 뒤로 꺾였다.
“……!”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지탱하자 지그시 감겼던 눈꺼풀이 열리며 공주가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췄다.
가볍게 부딪치듯 다가왔던 입술에 버릇처럼 입을 열자 레티시아는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말캉한 혀가 유혹하듯 그의 혀를 감아올리고 입술을 입에 머금으며 숨결을 섞었다. 끊어질 듯하면 다시 쫓아오고, 열이 올라 다급하게 파고들려 하면 한 발짝 놀리듯 물러나는.
숨이 찰 정도로 영원같이 이어졌던 입맞춤이 끝나 밀착했던 입술이 떨어지자 레티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후후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잘생긴 파트너와 공공연하게 붙어 있을 기회를 만끽하는 거.”
“…….”
“그게 제일 중요한 거지. 형식은 그다음 문제이고.”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레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정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더니 손이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렸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공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것도 같네요.”
다리는 놀라울 정도로 버틸 만했다. 다친 지 이제 꽤나 시간이 지났고, 그의 장애는 심리적인 부분도 꽤 큰 면을 차지한다는 것을 제외해도 정말이지 놀랄 정도로 괜찮았다.
“공주님, 춤 잘 추세요.”
“내가 좀 그래.”
칭찬하니 의기양양해하며 도도하게 턱을 쳐든다. 레스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려 할 때마다 레티시아가 온몸으로 그를 받쳤다. 정교한 고유 수용 감각을 필요로 하는 빠른 스텝이나 폭이 좁은 턴은 모조리 생략했다. 안 그런 척하면서 그녀의 온몸이 그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다시는 춤 출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해 보니까 할 만하지?”
“그러네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몸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어차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그대로인 것은 변함이 없는데 그는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어도 멀쩡해진 척은 할 수 있게 된다.
“나랑 사냥회 연회에서 춤도 출 수 있을 것 같지?”
빙글빙글 자랑스럽게 웃으며 꾀는 말에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에 으깨지는 듯했던 승전 연회의 기억이 떠올라 레스는 설핏 웃었다. 사실 그 순간의 기억은 간혹 그의 꿈에, 길을 지나가다가 군인들의 흰색과 금색의 예복을 볼 때, 왈츠의 음악이 들려올 때를 노려 불쑥불쑥 침범하곤 했다.
그는 아마 아주 오랫동안 춤은커녕 레티시아가 아닌 이와는 연회에 참석조차 하지 못할 테지만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레티시아의 표정이 확 변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 뚜렷하게 드러나는 걱정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기사들을, 길을 걸을 때마다 무성의하게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공주의 보좌관이 듣게 했던 공주의 현황을 떠올리고 그의 오래된 악몽을 떠올렸다.
‘키시르.’
매캐한 시가의 연기. 굳이 떠올리려 할 필요도 없이 레스는 간수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자는 그저 고개만 한 번 돌리는 것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네가 여기서 나가 봤자 뭘 어쩌려고.’
말은 저주가 된다. 되풀이되고 되새김질 되는 순간이 쌓이고 쌓여 그것은 진실이 되고, 족쇄가 된다. 그 지하실에서 벗어났어도 결코 벗어난 것이 아니어서 그는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다시 그곳으로 끌려 들어갔다.
올렌 맥퍼슨 소장.
그의 간수는, 그런 이름이었다. 데캉트 왕국군 보병 장교. 다레즈에서 그의 간수였던 남자는 수용소가 포위되자 입에 권총을 처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왕태녀의 본대가 그 더럽고 어두컴컴한 감방에 들이닥쳐 사슬에서 내려진 후, 레스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그자를 찾았다. 매일 밤 그자에게 발목이 썰려 나가며 레스는 자신이 그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을 수만 있었다면 진정한 의미로 그 지하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올렌 맥퍼슨은 자기 혼자서 죽었고, 그는 매일 밤 잠이 들 때마다 다시 그 지하실에 처박혔다.
매일 밤 목이 졸린 듯 악몽에서 튕겨 나가며 그는 생각했다. 올렌 맥퍼슨은 죽이지 못했으나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을 죽여 버린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공주님, 스캔들 때문에 사실 많이 곤란하시지 않습니까?”
“테시라가 한 말을 들은 거라면 걘 본래 과장이 많아.”
“정세를 읽는 훈련을 받지 않은 제 눈으로도 보입니다.”
“그걸 경의 탓이라고 할 건 설마 아니지?”
“온전히 저 때문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가 공주님께 떨어지는 걸 바라서 한 일이기도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죽은 듯 살라 했던 말을 어겼거든요.”
……순진했던 시절의 일이다.
하지도 않은 짓 때문에 군사 법정 조사실 독방에 처넣어졌을 때,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머리 위로 누렇게 흔들리는 불빛, 사방에서 조여 들어오는 창 하나 없는 시커먼 돌벽. 있지도 않은 시가의 연기가 나는 것 같아 그는 돌계단을 두드리며 텅, 텅, 울리는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며 목을 긁어 대었다.
‘레스 키시르, 네 혐의를 인정하는가?’
침을 흘리며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돌바닥을 긁어 대고 있으면 조사관이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 절박함이 공포가 되어서, 그게 견딜 수 없어서, 저따위 개소리를 조사랍시고 지껄여 대고 있는 게 증오스러워서 조사관에게 달려들었다.
지금에야 그러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린스베른 왕자한테 물어보십시오! 주둔지를 이탈하고 술을 마시다 패싸움을 벌인 건 그쪽이니 술김에 무슨 소리를 누구한테 지껄였는지는 그쪽한테 캐물어야지요!’
……차라리 혐의를 인정한다고 했다면 자비를 베풀어 간편하고 평화롭게 교수형을 선고해 줬을 텐데.
그는 멍청해서 눈치가 없었고, 그래서 꾸역꾸역 살아남아 군 병원에 갇혔다. 주제를 몰라서 닥치는 법을 몰랐고, 그래서 집중 치료 대상자가 되었다.
‘다 죽어가다가 겨우 살아났으니 아까워서라도 계속 살아야지.’
흰 가운을 입고 있던 남자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항정신병제를 한 세 개인가 네 개인가 섞어서 투여했더니 속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할 정도로 뒤집혀서 시야가 두세 개로 쪼개지는데 그 와중에도 그 측은해하는 듯한 얼굴은 똑똑히 보였다.
‘그러게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어.’
이쯤 되니 꿈에서만이 아니라 깨어 있는 와중에도 환각이 보였다. 포탄에 몸이 찢어지고, 병이 골수까지 찌들어 살이 썩어 들어가는 이들이 그의 목을 졸랐다. 총알에 머리가 박살이 난 간수가 시가로 그의 다리를 지졌다. 약을 투여하려는 간호사에게 달려들었다가 사지가 침대에 묶였다. 그렇게 이번에는 시커먼 천장이 아니라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침대에 박제된 채 그는 뼈가 마디마디 빠개지고 힘줄이 썰려 나가는 고통을 밤낮으로 다시 겪었다.
이가 갈렸다.
‘나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오기였다.
‘나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혼란이 왔다.
‘나는, 배신하지, 않았…….’
내 눈에 보이는 올렌 맥퍼슨이 진짜가 아니라면 내가 봤다고 생각했던 만취한 린스베른 역시 가짜가 아니었을까?
‘나는, 배신하, 지…….’
다른 이들은 다 그가 배신자라고 했다.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만 보이는 게 환각이고, 치료해야 할 병이라면 다른 모든 이들이 부정하는 사실을 오로지 자신만이 진실이라 우긴다면, 그건 대체 무엇이 되는가.
‘나는…….’
결국, 그는 전기 경련 요법과 다섯 번째의 항정신병제와 퇴원이라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퇴원을 골랐다.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읽을 수도 없는 자그만 글자로 빼곡히 채워진 서류가 들이대어졌다. 손이 떨려 자꾸만 사인이 대각선으로 삐뚤어졌다. 다시 만난 조사관은 그의 손을 억지로 쥐어 공란에 서명시켰다.
‘죽은 듯이 살아.’
며칠인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겨우 보게 된 흰색 외의 하늘에 넋이 나가 있자 조사관이 등을 툭툭 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쯤 되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시절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으며 레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완전히 망가트려 버리려 했던 왕과 무언가 수상함을 느껴 사건의 경위를 캐던 왕태녀 사이의 신경전이 낳은 타협이었다. 그가 했던 동의는 정말 그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왕이 좀 더 우세했다면 그는 그 병원에서 진짜로 미치광이가 되었을 것이며, 왕태녀가 좀 더 우세했다면 그는 증거불충분이라는 명목하에 퇴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또 멍청하고 눈치 없어서 그만 모르고 계약 조건을 충실히 지켰다.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주님과 이렇게 깊은 관계가 된 건 절대로 죽은 듯이 사는 게 아니지요.”
“누가 그런 말을 한 건데.”
바로 매서워지는 레티시아의 눈매에 레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설사 그가 올렌 맥퍼슨의 입에 총구를 처넣고 방아쇠를 당겼어도,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의 목에 똑같이 사슬을 걸어 천장에 매달아 버렸어도 그는 자유로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군을 지키겠답시고 죽여 버린 부하들을 올렌 맥퍼슨이 잊을 수 없었듯, 그 역시도 그 지하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죽으면 안 돼, 키시르 경!’
레스는 떨리는 눈꺼풀을 꾹 감았다. 몇 번 깜박거렸다 뜨자 눈앞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있었다.
“레스.”
레티시아가 어느새 차갑게 얼어붙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양손으로 모아쥐고 그 끝에 입을 맞췄다. 얼어붙어 있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손끝이 레티시아의 온기에 녹아내렸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한 음 한 음에 힘을 주어 되풀이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어.”
“……공주님.”
호박죽은 맛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찌르는 듯이 아파오던 다리의 통증이 사라졌다. 공주와 끌어안고 잠이 들면 그날 밤만큼은 꿈을 꾸지 않았다. 눈앞에 난데없이 나타나서 너는 평생 이 독방에서 썩어 갈 거라고 지껄이는 머리가 날아간 시체도 없었고, 너는 망상에 시달리는 더러운 배신자라며 이죽거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왜 너 혼자만 살아남았냐고 다리에 매달려 오는 썩어 가는 시체들도 없었다.
그는, 사실 춤을 잘 췄다.
다시는 누군가와 그렇게 춤출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망가져 버린 그를 잠시나마 온전한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이는 언제나 레티시아뿐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복수보다, 정의보다, 그가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니 그는 그녀가 잠시라도 망설인다면 지금까지 계획하고 있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릴 수도 있었다. 어차피 승전 연회 때 한 번 포기하려 했던 것들이었다.
린스베른이 레티시아를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 그는 린스베른이 그렇게 원했던 대로 진실을 끝까지 홀로 끌어안고 죽었을 것이다.
레오르나가 얼마나 구미에 당기는 제안을 했다 하더라도 레티시아가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이 현실을 뒤흔들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안 후의 레티시아가 아주 한순간이라도 망설인다면, 그는.
“저번에,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믿으실 거라 했지요.”
느닷없이 내뱉은 말의 의미가 순간 이해되지 않아 눈만 깜박였던 레티시아는 한 호흡 정도 후에 저 말의 맥락을 이해해 홱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냥, 다 관두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쳤던 린스베른이 교묘하게 악의적인 말을 쏟아 놓고 간 후, 그는 진실을 캐묻는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절대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루하루 후회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 거짓말임이 틀림없는 말을 하던 그에게 그녀는 뭐라고 했던가.
‘경이 나를 조금이라도 믿고 싶어질 것 같은 때가 오면 다시 한 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어? 그때는 경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을게.”
냉큼 대답한 말에 순간 놀란 듯 커졌던 눈동자가 가만히 아래로 내리깔렸다. 그 모습에 그녀는 속이 묘하게 쥐어짜이는 듯했다.
그땐 별 반응이 없어서 몰랐는데 기억하고 있었다. ……귀담아도 안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다 듣고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지금…… 들어 보시렵니까?”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듯 여상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레스는 기억을 더듬는 듯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을 만난 것은 제가 아직 뷘터하우젠 신입생이었을 때였습니다.”
* * *
이야기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서론도 뚝 잘라먹고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정적인 호소 하나 없는 메마르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본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무슨 교양 서적에 삽입된 일화를 낭독하는 듯했다. 흔들림 없이, 주저하거나 기억을 더듬으려 멈추는 것도 없이, 마치 몇 번이나 예행연습을 한 연설을 하는 것처럼 레스는 예의 그 부드럽고 평온한 목소리로 그녀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시간의 이야기를 했다.
하도 담담해서, 하마터면 그 내용이 얼마나 경악할 만한 것인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어느새 실내악단의 연습이 끝나고 연회장을 정돈한 하인들도 모습을 감췄다. 환하게 밝히던 샹들리에의 빛이 잦아들어 띄엄띄엄 벽을 밝히는 횃불만이 소리 없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흐릿한 불빛이 드리운 검고 붉은 음영이 벽에 몸을 기대고 선 남자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공주님.”
약간 웃음기까지 어린 목소리로 레스 키시르는 충격과 경악으로 얼어붙어 숨소리도 내지 못하는 레티시아에게 물었다.
“제가 한 말을 믿습니까?”
그녀는 레스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린 것같이 보기 좋은 미소가 지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금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려 오는 그녀가 이상한 것만 같았다.
‘……손이.’
하지만 그는 지금 자기가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고 있는지 알까. 마디마디 새하얗게 변해 가늘게 떨리는 걸 인지나 하는 걸까. 평소에는 키샤, 하고 달콤하게 애정을 섞어 잘만 부르다가도 겁을 먹으면 다시 공주님, 하고 발을 빼는 것도 알까.
“믿어.”
“제가 공주님 이용하려고 거짓말하는 거면 어떻게 하려고요.”
“거짓말 아닌 것 같아.”
“제가 망상증에 시달려서 애먼 사람 잡는 거면요.”
“들어 보니 딱 린스베른이 할 짓인데 뭘.”
“제가, 제가…….”
고개를 숙인 몸이 숨을 헐떡였다. 얕고 가닥가닥 갈라지는 호흡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동안 레티시아는 가만히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감싸 안은 주먹의 떨림이 점차 커지고 그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꺾였다.
“제가, 아닙니다.”
둥글게 말린 어깨가 꽉 움츠러들더니 엉망진창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끌려 나왔다.
“저는, 배신하지 않았, 어요.”
성대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 피가 맺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암구호를 흘린 것도, 근무지를 이탈한 것도, 붉은 머리 여자들만 골라 강간한 것도, 다.”
“……응.”
“셀레스트 전선이, 무너진 것도, 저밖에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것도…….”
“믿어.”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 정말 원해서 죽게 놔둔 게 아닙니다. 다 도망시킬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제가, 죽인 게…….”
주체할 수 없이 온몸을 떨며 남자가 양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어깨로 손을 내밀자 마지 늪으로 가라앉는 익사자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다. 끌어안는 팔의 힘이 그야말로 으스러질 듯 세서 레티시아는 눈을 꽉 감으며 신음을 삼켰다.
‘……아파.’
“기, 기습을 당해서, 완전히, 완전히 뒤통수를 맞아서, 소령님도 돌아가셨고, 응전하면 다, 다 같이 죽는 거밖에는, 기, 길이, 없어, 보여서……. 무전도, 아, 안 되었고, 가능한 한 많이 살려 도망치게 하는 게, 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하는 게, 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
“한둘씩 죽어가는 꼴을 보면서, 내가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좀 더 대비가 철저했더라면 무언가 달랐을까, 적어도, 다, 다른 이를 골랐다면…… 저 녀석은 집에 기다리는 딸이 있는데, 싶다가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녀석이 뭐 나 같은 걸 제외하면 누가 있다고…….”
“……레스.”
“제가 살아서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폐하께서는 구조를 보내셨을까요. 제가, 제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포로 교환이 성사되었을까요. 제가, ……보지 않았다면.”
“……그게 왜 당신 탓이야.”
꽉 몸을 끌어안으며 말하자 남자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자책할 때는 유창하게도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어찌할 줄 모르고 아이처럼 매달리기만 하는 레스의 머리에 고개를 기대며 레티시아는 이를 갈았다.
“그게, 어떻게 당신 탓이야.”
“키샤.”
레스 키시르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다듬어진 여유는 간데없이 모래성 같은 위태로운 시선이 집요하게,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엉겨 붙었다. 금세라도 물기를 떨어트릴 듯 붉어진 눈이 잘게 떨리면서도 쉴 새 없이 그녀의 표정을 훑으며 무언가를 찾아내려 했다. 한순간이라도 불신이나 조소의 기색이 보이는 순간 바로 자신을 조각내 버릴 준비를 하면서.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저는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알아.”
“망상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
“정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알아.”
“정말, 저는…….”
“믿어.”
그 말에 결국 왈칵 남자가 울음을 토해 냈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짓씹고, 담아 내려다 넘쳐나고, 삭히려다 터져 버려 스스로가 녹아 내려갈 듯이 레스 키시르가 울었다.
“믿어, 레스.”
숨이 넘어갈 듯 오열하는 남자를 끌어안고 그 머리를 쓸고 입을 맞추며 레티시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입 안이 터지고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입 안을 물어뜯으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난 당신의 말을 믿어.”
그 모든 돈이며 권력이며 지위를 가지고도 이 순간 아이처럼 무너져 내리는 레스 키시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처음으로 극도로 무력하게 했다.
‘용서하지 않아.’
그것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극도로 증오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