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46)

2.

테시라 자르덴은 마지막으로 집에 갔던 게 언제인지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했다. 블랙커피에 각성제를 말아 먹고 살던 게 사흘이 넘어가다 보니 이제는 야근한 날의 수를 세는 것만으로도 슬퍼질 지경이었다. 레스 키시르를 빌미로 불거진 공주의 스캔들은 스캔들의 역사를 나날이 갱신해 가며 산불처럼 활활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녀는 말끔한 베이지색 스리피스 슈트 차림이었다. 다크서클을 가리려 스모키한 화장을 하고 화장에 어울리는 큼직한 메탈릭 귀걸이까지 착용하자 그녀의 주변 반경 100m 이내로 접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파도를 가르는 옛 예언자처럼 사냥회 준비로 인파가 넘쳐나는 회랑을 가로지르던 테시라는 이 모든 야근의 근원을 연회 홀의 상층 테라스 위에서 발견하고 발소리 우렁차게 다가갔다.

“공주님.”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연회 홀에서는 연회 때 선보일 음악을 시연 중인 실내교향악단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4분의 3박자의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선율에 난간에 기대어 있는 공주의 손가락이 톡톡 두드려졌다. 나른하고 평화롭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테시라는 꽉 팔짱을 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예쁘장한 뒤통수를 그러쥐고 목이 부러져라 흔들어 댈 것만 같았다. 지난 사흘 간 공주는 테시라가 말을 걸려 하면 도망가고, 도망간 걸 잡았나 싶으면 딴청을 부리는 중이었다. 죽어도 안 듣겠다는 명백한 의지 표명이었다.

“고옹주님.”

“…….”

“공주님! 야!”

“아아, 안 들려요. 안 들…….”

“아, 키시르 경―.”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철심으로 고정되었나 싶을 정도로 앞만 꿋꿋이 바라보던 레티시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레스?”

“……은 아직 안 오셨군요.”

공주의 눈이 배신감과 감히 어떻게 그런 기만을 생각이나 할 수 있냐는 표정을 담아 흔들렸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그 미모에 자신이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처럼 느껴졌겠으나 거의 5년을 쭉 공주의 수석 보좌관으로 시달렸던 테시라는 그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그리고 오시려면 멀었으니까 투자자들이랑 언제 만나실지 말씀해 보세요.”

“아주 못됐어! 장난칠 게 따로 있지!”

“공주님, 남자든 여자든 자기 애인의 전 애인은 신경 쓰이는 법이거든요? 근데 공주님은 전 애인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열도 넘고, 잘하면 서른도 넘어갈 것 같은데―.”

“그건 투자자 모임 건이랑은 상관없잖아!”

“공주님께서 어필해야 하실 건 미모랑 권력이랑 넘쳐흐르는 재력뿐이니까 그 권력과 재력을 유지하실 수 있도록 제가 피나게, 수명을 깎아 가면서 노력하는 중이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 말에 레티시아의 눈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반박하고 싶다는 듯 몇 번이나 뻐금거리던 입술이 결국 꼬리를 내리고 웅얼거렸다.

“……한 번 만나 주면 나머지도 다 우르르 몰려올 거 아니야.”

“자기 돈이 걸려 있는데 당연하지요. 확신을 받고 싶어 하는 건 이상한 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냥 물고 뜯기 좋은 가십거리였다. 그게 어느 순간 스캔들이 되면서 인권 문제로 커졌다. 공주의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잠시 수그러드는가 했으나 이제는 금전적 타격을 입히는 방향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대형 거래처들이 등을 돌리지 않는 한 개개인의 불매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이 상황이 길어지면 뒤집힐 수도 있다. 하원 의원들은 실제로는 어떻든 명목상으로는 시민들의 대표였다. 그리고 루쉔하이츠 상회의 투자자 중 반절 정도는 일정 금액 이상의 손해를 감당할 수 없는 소규모 주주들이었다. 그들은 금화 하나, 둘이 오가는 것에도 민감하게 털을 세우곤 했다.

……집값이 폭락하든, 땅이 헐값으로 날아가든, 한 분기의 사업이 완전히 망해 버리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젊은 공주님과는 달리.

레티시아는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다시 시선을 관현악단이 악기를 연주하는 연회 홀로 돌렸다.

“내가 무슨 확신을 줄 수 있다고. 내가 비-귀족들이 언제 불매를 그만둘지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들의 반응을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하실 수는 있지요.”

“혹은 가만히 놔둬 장작이 다 타들어 가기를 기다릴 수도 있지.”

“저는 누가 계속 장작을 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말에 레티시아는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 역시 테시라가 받아 본 보고를 받아 봤기 때문에 저 장작을 열심히 때고 있는 장본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냥 깔끔하게 애들 싸움은 애들끼리 하라고 내버려 두고 발을 빼시든지, 아니면 아예 당신이 끼어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을 좀 더 제대로 처리하셨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모왕이랑 린시랑 전쟁을 하자고?”

“공주님.”

미묘하게 달라진 테시라의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테시라 자르덴이 언제 이런 목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방어는 그 누구도 범법이라고 안 합니다.”

“반역일 때만 제외하고는 말이지.”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이러다간 도덕적 결여를 핑계 삼아 폐하께서는 리베르탄을 빼앗아 왕자님께 주실 겁니다. 그러면 공주님께서는요?”

“리베르탄을 넘겨주고 자유로워지겠지.”

그 말에 테시라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무시하고 레티시아는 여상스레 말을 이었다.

“모왕께서 그렇게 하실 거라고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봐서 내가 적당히 먼저 물러나면 모왕께서도 만족하실 거야. 돈이 좀 아깝지만 한 번 번 거 두 번도 못 벌겠어? 차라리 이참에 말로만 듣던 바다 건너 서대륙에도 한 번 가 보고…….”

“왕태녀 전하가 성화 봉헌자의 자리를 빼앗겼을 때는 그렇게 욕을 하시더니.”

“그거랑 이거랑 같아? 언니는 그렇게 개고생을 한 대가를 생으로 빼앗긴 거고, 난 그냥 쓸데없이 마찰이 생기는 게 귀찮은 거야.”

“공주님, 외면하신다 해도 이 문제는 사라지지 않아요.”

“테시라.”

레티시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잘 벼린 칼날같이 싸늘해져 칼집으로 삼을 제물을 찾는 듯한 안광에 테시라는 덩달아 건들거리던 태도를 싹 바꿔 곧게 섰다.

“폐하께서는 공주님이 반항 한 번 안 하고 리베르탄을 넘겨주시면 오히려 더 수상하게 여기실 겁니다. 공주님의 진심을 믿으실 생각이었다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셨을 때 그랬겠지요.”

“…….”

“저는 공주님의 보좌관이자 조언자입니다. 그 역할을 하기 위해 그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이고요. 지금 상황에서 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제가 돈을 받을 이유가 없는 듯합니다.”

“……테시라.”

“더 늦기 전에 선수 쳐서 폐하와 결별하시고 왕태녀 전하와 손잡은 다음 왕자님을 묻어 버리세요. 이 많은 두통거리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누군지만 확실해져도 알아서 해결될 일입니다. 이제 제 최선의 조언이고 그게 정말로 마음에 안 드신다면…….”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커프스로 장식한 옷깃 너머의 속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사직서가 끄집어져 나왔다.

“언제든지 수리하실 수 있게 사표는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테시라, 너.”

그때, 똑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한 의의도 없이 이미 반쯤 열려 있던 문 너머로 집사의 안내를 받은 레스 키시르가 서 있었다. 밖이 쌀쌀했는지 금갈색 머리카락에 미미하게 남아 있던 물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작은 얼음 알갱이가 맺혀 있었다. 추위에 파르라니 얼어 있던 얼굴로 그는 레티시아와 테시라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곤란한 듯한 미소를 띠었다.

“제가 방해를 했습니까?”

“그럴 리가요. 지금 막 나가려는 길이었습니다. 두 분 이야기 나누시지요.”

기다렸다는 듯 물러나는 테시라의 모습을 레티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테시라 자르덴이 기밀 이야기를 하러 오면서 문을 닫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다. 레스가 찾아올 만한 시간을 골라 찾아와 일부러 들으라고 한 게 틀림없었다.

‘……저게 진짜.’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을 짓씹고 있으려니 테시라는 어느새 꽁지 빠질 듯 내뺀 후였다.

“경, 왔어? 밖에 춥지?”

테시라가 사랑했던 여성 핸드백 신상이 나오자마자 싹쓸이해서 매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해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레티시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활짝 미소를 지었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미소에도 자연스레 미소를 돌려주며 레스는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아 올려 그 끝에 입을 맞췄다.

“공주님은 따뜻하시네요.”

“경은 차갑고.”

그 말과 함께 레티시아는 냉큼 몸을 던져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기습적으로 와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살의 감촉에 그가 무심코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를 쫓듯 몸을 더욱 가까이 붙이며 시선만을 위로 들어 올린 레티시아가 히죽 웃었다.

“내가 따뜻하게 해 줘야겠는데?”

그 말에 동그랗게 뜨였던 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이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눈치껏 물러난 집사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레티시아는 좀 더 힘을 주어 레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톡, 넓은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자 서늘한 냉기가 어지럽던 머릿속을 시원하게 식히는 듯했다. 어느새 있는지도 몰랐던 두통이 가라앉는 느낌에 작게 한숨을 내쉬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지그시 머리 위로 기대 오는 머리의 무게에 레티시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들었을까.’

인기척이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예 엿들을 생각이 없어 바로 인기척을 낸 것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공주님께서 어필해야 하실 건 미모랑 권력이랑 넘쳐흐르는 재력뿐이니까 그 권력과 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가 피나게, 수명을 깎아 가면서 노력하는 중이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레티시아의 눈동자가 조심스레 굴러갔다. 레스 키시르가 그녀의 권력이나 돈 때문에 달라붙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있던 게 갑자기 없어지면 기분이 또 다르지 않겠는가.

‘공주님은 호구세요?’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던 테시라의 표정을 떠올리자 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실내관현악단이군요.”

그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레스의 시선은 테라스 아래의 연회 홀에 박혀 있었다. 멋들어진 연미복을 갖춰 입은 스무 명 남짓한 연주자들이 막 연주를 끝마친 뒤 악보를 넘기고 있었다.

“연회 때 소리가 어떻게 울리는지를 좀 봐야 해서 몇 곡 연주해 보라고 했어. 이 홀은 사냥회 연회가 이루어질 홀과 구조가 비슷하거든.”

“사냥회 연회라니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요.”

“그래. 그리고 그 연회에 경은 나랑 같이 들어가는 거야. 알지?”

그 말에 레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몇 번이나 달싹였던 입술이 겨우 목소리를 흘려내었다.

“설마…… 지금, 파트너 요청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레티시아는 여전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레스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더니 데굴 눈을 굴렸다.

“음…… 너무 성의 없어 보였어?”

문제가 그게 아니지 않나.

레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공주는 겸연쩍은 듯 샐샐 웃으며 머리카락 끝을 돌돌 말고 있었다. 하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순간 무슨 뜻인지 인지가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지금까지 수없이 공주의 파트너로 별별 사교회에 참석해 왔으나 사냥회 연회의 파트너는 좀 성질이 달랐다. 이 무도회는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왕족이 주관하는 공식 행사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란스타인 제일의 행사. 그런 행사는 배우자나 가족, 약혼자와 참여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사냥회 연회에 애인이나 정부를 동행해 가진 않는다.

공주는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쓱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 우아하게 한 손을 등 뒤로 돌린 후 다른 손을 내밀었다.

“레스 키시르 경, 사냥회의 연회 때 경의 손을 잡는 영예를 허락하시겠습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공주님, 저는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다리가 온전치 못합니다.”

“경―.”

“저를 데려가 봤자 공주님께 폐가 될 겁니다.”

그 말에 레티시아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레스, 정말로 춤 전혀 못 춰?”

“그야…….”

“시도해 봤어?”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럼 해 보자. 마침 음악도 준비되었잖아?”

“아…….”

엇, 하는 순간에 손이 잡히고 레스는 순식간에 테라스의 한복판으로 끌려 나왔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왼쪽 다리 때문에 비틀거리려는 순간, 레티시아가 재빨리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온몸으로 그를 부축했다. 확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지려는데 레티시아가 그의 손을 꽉 힘주어 쥐었다.

“레스.”

이름이 불리고, 시선을 들어 바라보자 보석 같은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공주의 등 뒤, 통유리로 만들어진 돔 형의 천장 너머로 겨울밤의 어둠이 광활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공주의 웃음이 별빛처럼 쏟아졌다.

“나 믿지?”

장난스러운 물음과 함께 연회 홀의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힘차게 들어 올린 손이 크게 휘둘리는 것과 동시에 음악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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