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th Movement
1.
길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온 세자르는 책상에 앉아 있는 레스를 발견하고 무심코 시계를 확인했다. 밖은 이제 겨우 해가 뜬 후였고, 레스의 얼굴에는 졸음기 하나 없었다. 머리를 벅벅 긁은 세자르가 턱 레스의 머리 위에 팔을 걸쳤다.
“뭐 하냐, 너?”
밤을 꼬박 새운 게 아니라면 네가 이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서탁 위에는 막 잉크가 마른 편지가 몇 장이나 널려 있었다. 유려하고 단정한 필체로 적힌 주소들은 세자르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유명한 출판사, 기록원, 대학교.
팔뚝 아래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슬슬 성실한 사회 구성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본인이 사회보장제도의 거머리라는 자각은 있었던 거냐?”
“뭘. 앞길 창창했던 청년의 다리 한쪽이랑 맞바꾼 정당한 보상이지.”
여상스레 돌아온 답변에 세자르는 무심코 레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 세자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까지 레스 키시르가 자신의 다리에 대해 자의적으로 말을 꺼낸 적이 있었던가.
“……정당한 보상이라면 왜 이제 와서 따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직업이 연금 수령자인 건 너무 없어 보이니까?”
“공주님이랑 진도를 대체 어디까지 나갔기에 네가 갑자기 그런 걸 신경 쓰는 거냐?”
그 말에 레스가 대꾸 없이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묘하게 행복해하는 듯한 모습이 낯설었다. 어제 등 떠밀어 공주 저로 보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너 이제.”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거냐.
물음은 혀끝까지 차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레스는 기다려도 말이 이어지지 않자 입을 열었다.
“세자르, 여자들은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아.”
전후 사정이 과감히 생략된 뜬금없는 말이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내려다보니 어딘가 꿈꾸는 듯한 얼굴로 레스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작다는 느낌이 아닌데 안아 보면 의외로 작아. 부드럽고 따뜻해서 잘못 힘을 주면 부서질 듯한데 안고 있으면 좋은 향이 나고 몸이 닿은 채로 웃으면 그 웃음소리가 내 몸을 울리는 것 같아서―.”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
“세자르, 세자르는 얼굴도 잘생겼으니 배가 아니라 사람한테 조금만 시간을 쏟으면 금방 애인이 생길―.”
모양 좋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세자르는 품 안을 뒤졌다. 시가가 갑자기 미친 듯이 고팠다. 세자르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꼭 필요할 때만 텅 비어 있는 시가 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세자르.”
“왜.”
“오늘은 눈이 올지도 모른대.”
“아, 그래.”
“날씨가 추워지니까 고구마를 구우면 맛있을 것 같은데. 누나가 결혼한 후로는 한 번도 구워 본 적이 없어서 기억이 나려나.”
소년처럼 웃는 얼굴이 혈색이 돌아 발그레했다. 한쪽 무릎을 끌어당겨 꼭 끌어안는 레스 키시르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떨어져 내렸다. 그 황금빛 광휘가 창백하고 무기질적이었던 그의 얼굴에 온기를 불어넣은 듯했다. 녹아내리는 듯 웃으며 그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 그래도 공주님은 추운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고구마를 벽난로에 구워도 되나? 그냥 코코아나 만들어 마시는 게 나으려나? 공주님은 달콤한 걸 좋아하실 것 같은 얼굴인데 의외로 단것은 그렇게 안 좋아하셔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한 공주의 정말 쓸데없는 정보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이유 없이 들뜨고 말이 두서없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세자르는 레스 키시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그 나이를 먹고서.’
뭘 그렇게 사춘기 애새끼처럼 구는 거냐고 쏘아붙이려다가 세자르는 레스가 올해로 고작 스물다섯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고향에 두고 온 막냇동생 나이가 그쯤 될 거라는 거에 생각이 닿아 세자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벽난로가 모닥불보다 더 위험할 이유가 있냐.”
“실내에서 구워 본 적은 없어서. 연기가 많이 나지 않을까?”
“알 게 뭐야. 공주님은 오히려 그 정도는 실패하는 편이 재미있다고 좋아하실 것 같던데.”
“아, 그러실 수도.”
하하, 낮게 소리를 내 웃던 레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세자르.”
“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가장 좋은 걸 가졌으면 하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자가 있는 건 역시 별로려나.”
독백을 하려면 화장실에서 문 닫고 혼자서 하라고 내뱉어 주려 했을 때였다. 레스의 단정한 필체로 쓰인 편지들 아래에 어제의 석간이 보였다.
[하원 의원 에서먼 씨, 레티시아 공주에게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걸 배워야 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챘는지 레스는 슬쩍 기사를 가렸다. 그 모습에 두통이 이는 듯해 세자르는 이마를 짚었다.
“너…….”
이 새끼의 팔자가 하도 꼬여서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니 이제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세자르는 말을 골랐다.
공주가 지금까지 인생을 막 산 대가를 치르는 걸 가지고 네가 책임을 느끼지 마.
아니, 그냥 이 기회에 다 때려치우고 신분도, 재력도 너랑 비슷한 사람이랑 평화롭게 연애해.
안 그래도 네 인생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공주 옆에 붙어 있어 봤자 네가 좋은 소리 들을 일 없어 보여.
그리고 저 새끼들은 어차피 흥미 본위로 지껄여 대는 거니 무시해.
“그래서, 그만하게?”
하고 싶은 말은 이래저래 많았으나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런 말이었다. 그에 레스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때, 치르르릉, 소리를 내며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겨우 새벽 여섯 시를 지나는 시간에 세자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창문의 커튼을 젖혔다.
“대체 어떤 개념을 상실한 새끼가 이런 꼭두새벽부터…….”
그 말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 채 창밖을 내다본 세자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자르?”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던 레스 역시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좋은 아침이야, 키시르 경.”
검은색 스리피스 슈트 위에 멋스러운 연회색 롱코트를 걸친 레오르나 왕태녀가 고작 경호원 둘만을 데리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 *
“이렇게 일찍부터 찾아와서 깨운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경은 요즘 인기가 많아서 조용히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
이제는 완연히 겨울로 접어든 날씨에 레오르나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새파란 겨울 하늘 아래 미루나무는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냈다. 그 사이로 이어진 한적한 산책로를 걸으며 레스는 친근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말을 걸어 오는 왕태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왕태녀가 뷘터하우젠 출신이었기에 그녀는 가끔 모교에 들러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재학생들에게 상패를 수여하곤 했다.
‘레스 키시르. 군의 사격 실기 시험은 아주 흥미롭게 보았어. 졸업 후 입대할 거면 꼭 내 밑으로 오는 거야. 알겠지?’
처음으로 성스러운 일로미냐의 휘장을 받았을 때 휘장을 달아 주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던 말에, 살짝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던 모습에 가슴이 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생각해 보니 특수병과를 저격병으로 정한 것도 그 한마디 말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왕태녀는 그때 고작 이십 대 초중반의 나이었을 텐데도 그랬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이었다.
……린스베른이 피를 토하며 발버둥 쳐야 겨우 흉내 낼 수 있는 것.
키샤가 은연중에 닮아 있는 것.
새삼스레 왕태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 거기에서 레티시아가 보였다. 저 부드럽게 웨이브 져 흘러내리는 새빨간 머리칼도 그렇고, 우아하게 뻗어 내리는 콧날이며 목선이 그렇고, 풍성하게 늘어져 음영을 드리우는 붉은 속눈썹도 그랬다. 볕에 그을려 색이 짙어진 얼굴과 온화하나 쉬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 위압감이 있는 진녹색 눈동자가 다르다면 달랐다.
“키샤는 좀 어떻지? 그 애, 마지막에 봤을 때는 죽어가고 있었는데.”
“많이 괜찮아지셨습니다.”
“그 난리를 쳤으니 그래야지.”
하하, 웃는 목소리에 뼈가 느껴져 레스는 가만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애가 끼친 민폐에 대해서는 나도 사과하지. 키샤는 예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끌어.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곁에 있는 입장으로서는 힘들 수도 있어. 그 애가 어련히 잘하겠냐만 이리 진심이 된 상대는 경이 처음이니 아직 시행착오가 많을 거야. 좀 염치없지만, 경이 이해해 줬으면 해.”
“공주님께서는 이미 제게 넘치게 잘해 주십니다. 이해라고 할 것까지요.”
“그래, 걔가 옛날부터 그런 걸 잘하긴 했어.”
레티시아를 닮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애정을 담아 반짝였다. 동생을 떠올리는 듯 굳어진 입매가 순간 느슨하게 풀리는 모습에 레스는 묘한 상실감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세상에는 동생을 떠올리며 저렇게 따뜻한 눈을 할 수 있는 이도 있는데.
“키샤는 예전부터 귀여웠지. 애교 떠는 것도 잘했고, 자기가 잘해 주기로 정한 상대한테는 정말 뼈도 갈아 줄 정도로 잘해서 누구나 걔한테 선택받고 싶어 했어.”
그런 그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레오르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는 어딘가 좀 데면데면했고, 린스베른한테도 어느 순간부터는 묘하게 거리를 뒀는데 모왕께는 정말 잘했거든. 지금도 애가 저렇게 예쁜데 어렸을 때는 정말 사람 같지가 않았어. 천사처럼 사랑스러웠지. 그렇게 예쁜 애가 어머니, 어머니 하고서 쓱 손을 잡아 오는데 어떻게 안 예뻐할 수가 있어.”
“그러셨겠지요.”
레스는 그리 어렵지 않게 어린 레티시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레오르나가 참전 독려 포스터의 단골 모델이었다면 레티시아는 어렸을 때부터 신문이란 모든 신문 가십난의 단골이었다. 무역업에 종사했던 그의 아버지는 매일 신문을 적어도 다섯 종류는 받아 읽었고, 레스는 그 곁에서 짐짓 심각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기며 사진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 흑백의 사진들 속에서도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은 홀로 색을 입힌 듯 빛났다. 그렇게 잘 웃는 아이가 아니었던지 공주의 사진은 심통이 난 얼굴, 무언가에 집중해 미간에 주름을 잡는 얼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얼굴이 대부분이었지만 정확히 그랬기에 그 사랑스러운 고수머리의 아이가 온몸으로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모습이 얼마나 특별했던지.
‘레스.’
그렇게 웃으며 답싹 안겨 오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저도 모르게 레스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지고 유리알처럼 무감했던 눈에 온기가 깃들었다. 겨울의 첫눈으로 만든 인형에 생명이 깃드는 순간을 레오르나는 흥미롭게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키샤가 성인이 되었을 때 모왕께서는 그 애에게 리베르탄을 주셨어. 본래는 왕태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인데 내게 주기는 아깝고, 린스베른에게는 딱히 줄 명분이 없어 곤란하셨는데 그때 키샤가 딱 성인이 된 거지. 딱 자기같이 예쁘고 화려한 걸 좋아해서 지출도 큰 애였으니 그 정도 수입이 있지 않고서야 힘겹겠다는 생각도 하셨겠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셨겠지.”
“…….”
“걔가 그 항구 하나를 그렇게 집요하게 굴려 돈을 그렇게 많이 긁어모을 줄 알았다면, 안 주셨겠지만.”
그저 운이 좋다고 퉁치고 끝내야 할지, 아니면 그 천재적인 재능에 감탄해야 할지, 그것도 재능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레티시아는 리베르탄을 손에 넣자마자 돈을 펑펑 쏟아부었다. 품위 유지비로 지급되던 돈을 붓고, 파티며 공연을 돌아다니며 안면을 튼 이들에게 투자를 받고, 모자라면 빚까지 내 가며 사업을 벌였다. 왕태녀인 그녀조차 순간 아찔하게 만들 금액이 오갔고, 무서울 정도로 공격적인 투자는 몇 번은 처참하게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사랑스러웠고, 사람들은 그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도와주면서 돈도 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리베르탄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고, 레티시아는 거의 짐승 같은 육감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이들을 골라냈다.
고작 몇 년 만에 리베르탄의 성장률이 천장을 뚫고 수직으로 상승하고 레티시아를 상단주로 한 루쉔하이츠 상회가 내는 세금이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수준이 되자 그때서야 왕은 귀여운 애완견인 줄만 알았던 막내딸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숨죽이며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레티시아는 자유로워졌고, 동시에 단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왕위 계승권을 던져 버렸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셨을 거야. 자녀 둘이 경쟁하는 것도 싫어하시는데 거기에 아끼던 막내까지 끼어들어 봐. 모왕이 너무 불쌍하지. 거기에 이미 끼어든 이들도 계산을 다시 하려니 많이 복잡해질 거고.”
“…….”
“그러니까 모왕께서는, 그리고 많은 이들은 키샤가 경과 결혼하겠다 하면 겉으로는 반대해도 속으로는 좋아할 거야.”
그 말에 레스 키시르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동시에 기껍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색은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레오르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레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경, 나는 내 동생의 배우자의 이름에 이리 많은 오명이 들러붙은 걸 바라지 않아.”
“…….”
“경에게 빠질 대로 빠져 내장까지 꺼내 줄 내 동생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일이겠지만 언니 된 입장으로서는 상대의 내면이라든가 성격은 물론, 이런 외적인 것에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거든.”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
“빈말로도 제게는 과분하다는 말은 안 하네?”
“과분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과분하신 분입니다.”
가볍게 시선을 내리깔고 하는 말에 레오르나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경, 셀레스트 전선에서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지?”
그에 레스 키시르는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레오르나는 참을성 있게 그 무거운 입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레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공주님께서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계시는 건, 그 누가 보기에도 제가 공주님께 어울리지 않는 이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레오르나는 미간을 가볍게 찡그렸다. 저것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억울한 점이 있다면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짐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린스베른과 왕에 맞서 그의 무죄를 주장해 줄 수 있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이자도 그것을 원하리라 생각했다.
레티시아와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결실을 맺는 방법은 그 방법뿐이었다. 이자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건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레스 키시르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가 애매했다. 한참 후에야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리며 여상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표면적으로나마 비-귀족들의 비난을 잠재우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지금 당장이라도…….”
“하지만 그다음은 제 종군 기록을 걸고넘어지겠고, 배신자를 감싸고 돈다며 공주님까지 공격하겠지요.”
“……없던 일을 지어내고 있는 일을 부풀리는 게 장기인 이들이야. 경의 탓이라고 볼 수는 없지.”
“공주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도 모르게 스며 나온 미소는 그러나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젠가 뵐 기회가 생기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감사?”
“전하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다레즈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제야 맥락을 눈치채 레오르나는 작게 탄식했다.
“……내가 아니었어도 머리가 제대로 박힌 지휘관이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거야.”
“그랬을지도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손을 대면 바스러질 듯 퍼석했다. 레스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목을 어루만졌다. 환상통처럼 손끝에 까칠한 밧줄이 만져진다. 호흡이 얕아지며 목이 졸려 오고 그는 지긋지긋하게 찾아오는 자괴감에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언제나 생각하곤 했다. 요즘은 조금 더 자주.
만약에.
셀레스트 전선에서의 그의 상관이 왕자가 아니었다면. 머리가 제대로 박힌 지휘관이었다면. 뷘터하우젠의 사격 연습장에서 그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 죽이는 방법이나 배우는 대신에 수도원에라도 들어갔다면.
린스베른과 단 한 번의 스침조차 없는 삶을 택할 수 있었더라면.
레티시아의 앞에서 절대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그녀가 언제까지 증거 하나도 없는 그의 결백을 믿어 줄지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는, 그녀가 아끼는 것들처럼 완전하고 하자 하나 없는, 망가지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삶.
가정. 가정. 가정. 정말이지 의미 없고, 허무하고, 울화만 치솟는, 그런.
……키샤를 만나지 못했을, 삶.
생각이 거기에 닿자 속을 갉아먹는 듯한 증오가 무너져 내렸다.
“……시간을.”
그토록 바라던 기회를 앞에 두고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잠시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