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46)

10.

“키시르 경.”

공주 저의 집사는 아무런 사전 약속도 없이 저녁이 되어 가는 시간에 들이닥친 그를 보고서도 대놓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리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집사님.”

“어서 들어오시지요. 공주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이 저택은 언제나 경께 열려 있습니다. 일단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공주님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예상도 못 했던 환대에 레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어찌 보면 그와의 관계 때문에 공주가 이렇게 홍역을 치르고 있는데 원망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한 호의에 레스는 기분이 복잡해져 셔츠의 목덜미 부분을 괜스레 잡아당겼다. 테이블보 하나까지 완벽하게 각을 맞춘 응접실에 앉아 있으려니 새삼스레 자신의 꼴에 눈이 갔다. 적어도 이전에 공주 저에 올 때면 언제나 깨끗하게 몸을 씻은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들여 치장한 후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 그의 꼴은 봐 줄 만한 게 아니었다. 라디오 방송을 들은 직후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닌 이곳까지 서둘러 오느라 땀에 달라붙은 셔츠와 깨끗이 빨아 단정하지만, 절대 화려하지는 않은 옷차림이 새삼스레 신경 쓰여 입 안이 말라 가는 듯했다. 추레해 봤자 처음 만났던 승전 연회 때보다 더하겠냐 싶긴 했으나 이리 화려함과 부귀의 집대성 같은 응접실에 앉아 있으려니 자신의 누추함이 한층 또렷하게 도드라지는 듯했다.

“키시르 경!”

생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아 가는 상념을 깨부순 것은 공주의 목소리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침대 안에 있었는지 가벼운 나이트가운 차림의 레티시아는 그야말로 구르듯 응접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하얀 나이트가운 아래로 맨발이 보였다.

“경, 와 줬구나!”

“공주, 님.”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얼굴을 본 순간 백지가 되어 사라졌다. 뺨이 발갛게 상기된 공주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와 안기려는 듯했던 그녀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칫하더니 양손을 꼭 모아쥐었다. 레스는 그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환희에 머뭇거렸다가 그 틈을 타 좀 더 제대로 눈에 들어온 공주의 얼굴을 보고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공주님, 어, 얼굴이…….”

“아.”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이마의 시퍼런 멍을 만지작거리던 공주가 순간 시든 꽃처럼 축 늘어졌다.

“경, 나 아파.”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이 애처로이 내리깔리며 파르르 떨렸다. 사흘 만에 살이 확 내려 야윈 얼굴은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초췌해 보였다. 말라 부르튼 입술에는 채 낫지 않은 딱지가 앉아 있었고, 결투 중 상대에게 얻어맞았다던 이마는 푸른색을 지나 보라색과 갈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정말로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기는 한 레티시아는 슬슬 그의 눈치를 보다가 한마디를 조심스레 더했다.

“좀 만져 주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잠시 뵙지 못한 사이에 어리광이 많이 느셨군요.”

허탈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처음 달려들어 왔을 때 그렇게 활기 넘쳐 보이지만 않았어도 믿을 뻔했다. 그런 걸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에 기가 막힘과 동시에 애교스럽게 고개를 살짝 틀어 이마를 들이대는 얼굴이 순간.

……너무도, 예뻐서.

“어디서 이런 나쁜 것만 배워 오셔서.”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멍이 든 피부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그 손길을 즐기듯 레티시아가 눈을 감으며 가만히 고개를 기대 왔다. 느껴지는 온기에 레스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사람을, 이렇게 농락하시고.”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아찔함에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정이, 잊어버렸던 말들이 억류하듯 솟구쳐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레티시아가 가만히 양손으로 감싸 자신의 뺨에 지그시 눌렀다.

“……경이 다시는 나를 안 보려 할 줄 알았어.”

“제가요.”

“안 보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

“미안해. 내가, 가끔은 진짜 생각이 없어.”

어느새 장난기가 싹 사라진 목소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리깐 공주가 자신의 뺨에 닿은 그의 손을 꽉 힘주어 쥐었다.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클럽 멤버들이랑도 다 정리했어.”

“곤란, 하신 거 아닙니까?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을 리가 없는데.”

“이해관계는 다시 쌓으면 돼. 나는 우선순위를 착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그 말에 레스는 머리가 지그시 아파오는 듯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런 말을 할까.

“처음부터 경이 좋아서, 그래서 접근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그 후의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던 건 아냐. 나는 정말…… 정말 당신이 좋아.”

잡혀 있는 손이 아팠다. 공주는 지금 자기가 얼마나 으스러질 듯 그의 손을 쥐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보채는 듯한 저 단순한 말도 그렇고, 공주는 마치 떼를 쓰듯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내가 대체 뭐라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당신이. 당신이 요구한다면 내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저 원하기만 하면 온 세상이 당신을 위해 움직일 텐데.

……왕자를 위해 그리하였듯이.

“아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은 끝없이 많았으나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그런 말이었다. 그 간단하다면 간단한 질문에 레티시아의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더 많이 때렸어.”

“……그 문제입니까.”

“걘 맞을 만한 짓을 했어.”

고집스러운 빛을 띠는 얼굴에는 중병에 걸려 시들어 가는 청순가련한 미소녀의 흔적은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 실소를 흘리면서도 레스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얼굴을 보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닿은 여자의 피부는 혀가 녹아내릴 듯 달았다. 목을 틀어막았던 감정이 혀끝까지 치고 올라와 어쩐지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지금은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자르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공주에게 다음 기회를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이고, 좀 더 두려운.

“얼굴이 이렇게 엉망이 된 걸 보면 내 속이 무너지고.”

“…….”

“화나고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는데도 당신 이러는 걸 보고 있자니 그런 건 다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부터 들고.”

“…….”

“당신이 웃으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나 혼자서 당신을 또 보니 마니 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웃기기 짝이 없고…….”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내리던 손이 공주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고작 사흘 안 봤다고 원망스러울 정도로 엉망이 된 얼굴이 어째서 이렇게나 예뻐 보일까. 대체 무슨 심보로 이리 사람을 뿌리부터 쥐고 뒤흔드나. 안 그래도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정말로 힘겨운데 어쩌자고 나를 이리 괴롭게 하여서.

그러나 공주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그 풀빛 눈동자에 그가 가득 담기는 그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오면 그는 그저 속절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제 와서 당신을 안 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사실은 라디오 너머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보고 싶었다.

“당신의, 당신의 탓입니다.”

고작 사흘 보지 않았는데 그리웠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기억나게 했어. 다 잊고 있었는데…… 없어도 괜찮다고, 겨우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를 죽도록 두렵게 했고.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중에 질렸다고 하면…… 미안해서 좀 어울려 줬던 것이라고 해 버리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왜 지금이라도 그만두자는 말을 안 합니까.”

그녀가 한 말이 그를 미치도록 들뜨게 했다. ……결국은 그래서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그런, 유치하고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유인 거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말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당신이 자꾸 이렇게 여지를 주면…… 나중에 당신이 그만하자고 할 때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만하자고 안 해. 내가 왜 그런 아까운 짓을 해.”

꽉 허리가 힘주어 끌어안겼다. 온몸으로 레티시아가 안겨 왔다.

“나, 이번 일 때문에 주가 완전히 폭락했어. 본래부터도 별로 안 들어오던 혼담이었는데 싹 다 끊겨 버렸잖아.”

“…….”

“그러니까 경이 나 책임져 줘야 해.”

떨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레스는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여 공주의 정수리에 묻자 비강 가득 달콤한 향이 퍼졌다. 몸이 안쪽에서부터 녹아내리는 절대적인 무력감에 그는 팔을 뻗어 공주에게 매달렸다.

“……레스.”

의문을 담은 시선이 느껴져 그는 조금 웃었다.

“이제 슬슬 이름으로 불러 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레스.”

평생,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기세로 냉큼 대답이 돌아와 그는 다시 웃었다.

“예.”

“레스.”

“예.”

헤헷, 만족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레티시아가 꽉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에 심장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워져 그는 공주를 꽉 끌어안고 그 정수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이 점점 열기를 띠었다. 머리에 떨어졌던 입술이 이마에, 콧등에, 귓불에, 뺨에 정신없이 떨어졌다가 입술에 닿았다.

“으응, 아……!”

달콤한 한숨과 함께 레티시아가 그의 목에 매달리며 입술을 열었다. 까칠하게 갈라진 입술을 조르듯 핥던 혀가 냉큼 안으로 밀려들어 와 숨어 있던 혀와 엉켰다.

기교고 여유고 다 집어던진, 몸이 달아 견딜 수 없는 사춘기 애들 같은 키스였다. 잡아먹듯 달려들어 더욱 깊이 파고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순식간에 젖은 소리가 울리고 습하게 달아오른 공기 중으로 낮게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아으, 레, 레스, 하으……!”

키스가 깊어지면서 레티시아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무게 중심이 홱 뒤로 쏠리며 다급하게 목에 매달리는 몸을 양팔로 으스러질 듯 끌어안으며 레스는 시야를 흐리는 열기에 숨을 헐떡였다.

턱, 소리와 함께 레티시아의 등이 응접실 소파 위에 짓눌렸다. 그 위로 지워지듯 몸을 숙인 레스가 흐트러진 숨을 토해 내며 이갈이를 하는 어린 짐승처럼 그녀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물었다. 쉬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쓸고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을 때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상처의 흔적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몸 상하게 하지 마세요. 제가 공주님 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말에 레티시아는 킥킥거리며 웃더니 그를 슬쩍 밀어 냈다.

“당신이 이름 불러 주면 생각해 볼게.”

“이름, 이요.”

“왜, 당신은 되고 나는 안 된다고 하려고?”

“아니요. 그냥…… 이러고 있으니까.”

표정을 숨기려는 듯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순간 느슨해졌던 허리를 끌어안는 팔의 힘이 다시 꾹, 강해졌다.

“정말 키샤랑 애인이 된 것 같아서요.”

조그맣게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순간 탄성을 흘렸다.

“……와, 곧장 애칭으로 간다 이거지?”

“왜, 싫어요?”

고개를 슬쩍 들어 눈치를 보는 남자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축이며 레티시아는 지극히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니, 완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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