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46)

9.

슬슬 추워지는 날씨에 하얀 김을 토해 내며 집 안으로 들어선 세자르 메힌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참상에 기함했다.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뭐라 지껄이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듯한 레스 키시르가 스토브 위에서 환상적인 향을 풍기며 끓고 있는 그의 인생작에 소금을 처넣고 있었다.

“야! 지금 소금을 얼마나 넣는 거야!”

스튜에 곁들이려 사 온 빵과 과일이 와르르 쏟아져 바닥에 굴렀다. 세자르는 사과가 바닥에 굴러다니든, 비싼 딸기가 곤죽이 되든 상관없이 레스의 손에서 소금 통을 빼앗아 들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맛을 보자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짠맛에 욕지거리가 나왔다.

“적당히 넣으라 해서 적당히 넣었잖…….”

머리로 휘둘러지는 국자를 피해 레스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너는, 데캉트 놈들의 참모 총장 머리를 날려 버렸을 때 저어기 참호 속에서 적당-히 누워 있다가, 적당-히 머리 언저리 겨냥해서, 적당-할 때 쐈냐?”

“함포는 다 그렇게 쏘지 않아?”

이번에는 냄비 뚜껑이 날아와 레스는 팔을 들어 방어했다.

“너, 나가.”

“아까는 와서 좀 도우라더니.”

“도움이 될 때의 이야기지.”

“세자르가 차가워졌…….”

기어코 세자르의 손바닥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레스가 동그랗게 바닥에 몸을 말았다. 몇 시간씩이나 공을 들인 스튜를 포기할 수 없어 물을 더 붓고 고기를 더 썰어 넣으며 이를 갈고 있자니 자기 잘못을 모르지는 않는 죄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도왔다.

“너는 딸기나 치워.”

닭이 아니라 자기 손을 썰어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칼질에 결국 세자르는 레스에게서 식칼을 빼앗아 들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과일들을 턱짓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멍하니 풀려 있던 동공에 다시 초점이 잡히며 레스는 고개를 털듯 저었다. 그 꼴에 세자르는 혀를 찼다.

공주의 스캔들이 터지고 집 앞으로 기자들이 쳐들어왔던 그날 이후, 레스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공주와 단둘이 만났다가 새하얗게 질린 채로 들어와 아무것도 아니라며 실실대던 그는 세자르가 차를 타 주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거실의 소파에 쓰러져 잠든 후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어하기에 뭐라도 먹고 기분 전환이라도 하라고 쫓아냈더니 현관 앞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조간을 보았고…… 밖에 못 나가겠으면 집 안에서라도 움직이라고 스튜를 젓게 했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너는 나한테 돈 줘야 해.”

“그러니까 주겠다고 할 때 냉큼 받아 버리지.”

“백수 녀석 퇴직금을 받아먹으면 잘도 소화되겠다.”

“우리 세자르가 이러니 이 형은 걱정이 돼서 눈을 못 떼요.”

“헛소리하지 말고 바닥이나 싹싹 닦아.”

“네, 중위님.”

굴러다니던 사과며 나머지 식료품을 주워 올린 레스는 뭉개져 즙이 흐르는 딸기의 앞에서는 잠시 멈칫했다. 스튜를 휘휘 저으며 세자르는 레스의 손이 아주 잠깐 가늘게 떨리다 꽤나 멀쩡하게 딸기를 주워 담는 것을 바라보았다.

미약한 변화지만, 변화는 변화였다. 레스 키시르는 이제 더 이상 붉게 짓물러진 것을 보고 숨 막혀 하지 않는다. 사흘 전의 일로 전체적인 상태는 더 나빠졌지만, 지금의 상태가 병원에서 그를 데려왔을 때보다 더 나빠졌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답답해지는 듯해 머리를 팍팍 헤집던 세자르는 국자를 탁 내려놓았다.

“너, 가 봐.”

혼란스레 올려다보는 시선에 세자르는 다시 미간을 찡그렸다.

“애인이 아니라 그냥 친구라도, 아니, 그냥 지인이라도 신문 제1면에 그런 사진이 실리면 안부 인사 정도는 가.”

주어와 목적어를 죄다 잘라먹은 말이었으나 그 말에 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소가 잡힌 짐승 같은 반응에 세자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재차 되풀이했다.

“가도 돼.”

신문이란 모든 신문의 조간 1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사진은 가관이었다. 또래 영애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채로 주먹을 휘두르는 공주에게는 귀기가 느껴졌다.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고, 산발한 머리가 사자 갈기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상대의 모습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합의금을 뜯어내겠다고 펄펄 뛰는 걸 보니 어느 정도 과장은 있겠지만 전치 3주가 나왔다면 그냥 찰과상만으로 끝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 레스 키시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않고 그 자리에 뿌리박은 듯 얼어붙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자르.”

“왜.”

“나는, 뭘 하는 걸까.”

“무슨 소리야.”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처음에는 복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명예를 씻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 허망하게 죽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이겨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존재했다는 것조차 의심스러워질 만한 감정이 다시 솟구쳐서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새삼 깨달았던 때가 있었다. 그만큼 힘들었으니 조금쯤은 편해져도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을 끝낸 그 이후의 일을 조금쯤은 생각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그가 모든 자신감이란 자신감은 다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상실감이 몰려오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가, 피로함만이 남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는 아직도 매일 밤 악몽을 종류별로 돌아가면서 꾸지만 처음 수사관에게 끌려 야전 병원을 나섰을 때만큼 강렬한 원망과 증오는 어느새 간데없었다. 멋대로 몸집을 부풀리던 희망과 낙관이 거품처럼 사라진 자리에는 짙은 허무함만이 남아 늪처럼 그를 끌어내렸다.

죽은 이들은 이미 죽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이리 발버둥을 쳐 봐야 무엇이 변할까.

공주는 모래성같이 허술한 그의 삶에 밀려들어 와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흔적마저 찾기 어려운 깨끗한 백사장만을 남기고 빠져나가 버렸다. 그는 고작 한 사람의 존재에 이리도 휘청거리는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고…….

“지금까진 딱히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다행이라고, 공주에게는 자신보다는 좀 더 온전한 이가 어울린다 자위하면서도 동시에.

“공주님이 미안하다고 하면 죽고 싶을 것 같아.”

……원망스럽다.

그는 공주가 사과하는 것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죽겠다는, 아마 다분히 진심일 표정으로 그 모든 소문과 억측이 사실임을 증명하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멈칫거리기라도 하면, 그 순간 그들이 쌓아 온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 버릴 듯해서.

그래서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등을 돌릴 수도 없어서 정체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이 그 어떤 육체의 아픔보다도 더욱 예리하게 그가 겪어야 했던 상실을 인지시켰다.

그는,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너한테 룸메이트 하자고 찾아왔을 때 기억나냐?”

세자르가 내뱉은 느닷없는 말에 레스는 눈을 깜박였다.

“……말로는 부탁한다면서 얼굴로는 협박했던 그때?”

지금 당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평생 고개를 끄덕일 일 없게끔 머리를 뽑아 주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직 무서운 것도 많고 협박에도 술술 넘어갈 정도로 순진했던 때라 그런 세자르 메힌의 얼굴은 그야말로 폭력이었다.

“그때, 너는 내가 불쌍해서 동의했던 거냐?”

“네가 불쌍할 게 어디 있어. 폐쇄적이기 짝이 없는 알카사르 출신으로 극적으로 유학생 자리를 얻어 내서 본래는 유학생은 받지 않는 뷘터하우젠에 억지로 입학까지 하고 기계공학과 수석이 되었는데.”

“친구 없었잖아. 검둥이랑 같은 방 쓸 일 없다고 줄줄이 거부당하고.”

“그래서 우리가 잘 맞았나 보다. 거지랑 검둥이.”

그 말에 아주 드물게 세자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가 한 열 번째였나? 개소리 지껄여 대는 것들을 아홉 명까지 쥐어패다가 한 번만 더 해서 딱 열 명 채워 기회를 줘 보자, 그 열 번째 놈도 글러 먹었으면 항공모함이고 뭐고 그냥 알카사르로 돌아가자 싶었는데.”

“…….”

“기회를 줘 보니 꽤 괜찮은 일들도 생기더라.”

난데없이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스의 얼굴이 순간 미미하게 굳었다.

‘공주님이 미안하다고 하면 죽고 싶을 것 같아.’

그것이 자신이 별 의미 없이 토로했던 심정에 대한 세자르 메힌의 답변이었다.

“……그건.”

“끔찍할 것 같다는 건 네 뇌 내 망상일 뿐이잖아. 실제로는 최악의 상황 따위는 안 벌어질지도 모르는 거고.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를 일이지.”

“그렇, 지.”

“적어도 나는 네게 기회를 줘서 후회한 적은 없는데, 공주님은?”

“…….”

“너는, 공주님한테 기회를 주면 후회할 것 같아?”

가슴이 아리도록 아파 레스는 얼굴을 가려 버렸다.

“뭘 어떻게 하든 결과는 네가 감당해야 하는 거니까 내가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정 힘들다 싶으면 포기했을 때 뭘 놓아야 할지를 생각해. 잘 생각해 보고 그게 그래도 된다 싶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뭐, 그게 아니라면.”

“…….”

“한 번 정도는 모험을 해 보는 것도, 가끔은 나쁘진 않잖아.”

그 순간 방치되고 있던 스튜가 끓어오르며 흘러넘쳤다. 세자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스토브의 불을 줄이고 넘친 것들을 닦아 내는 소리 속에서 레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라디오가 지지직거리더니 어조를 진지하게 한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오늘 정오, 요 며칠 브륀셀을 뜨겁게 달궜던 스캔들의 당사자, 레티시아 공주 전하께서 자택의 콘퍼런스 홀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지금 공개합니다.]

다시 한 번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렷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내려앉았다.

[안녕하십니까.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입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지난 며칠간 있었던, 저를 둘러싼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공주의 목소리는 묘하게 낯설었다. 경쾌하고 생명력 넘쳤던 목소리는 한 톤 낮아져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거침없고 직설적이었던 말투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들렸다. 의례적인 국민에 대한 감사 인사가 이어지고, 간략하게 정제된 현황에 대한 언급이 있고 난 뒤, 공주는 일부러 한 번 뜸을 들였다. 숨죽인 침묵 후, 본론이 이어졌다.

[저는 그날 청월 옥좌를 걸고 내기를 했습니다. 술김에 저지른, 미숙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그 내기의 벌칙으로 승전 연회 때 미남이 아닌 남자와도 한 번 춤을 추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만 그 지령의 그 어디에도 그 상대가 그 자리에서 가장 추레한 남자여야 한다는 말은 언급된 적 없으며 그 대상의 범주를 귀족이 아닌 이로 한정한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느새 주방에서 덜그럭대던 소리가 멎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침묵 속에서 라디오 너머로 공주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제가 그날 하필이면 레스 키시르 경에게 접근했던 것은 그가 그 자리에서 제일 못나서도 아니고, 그가 젠트리 출신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많은 구설에 올랐으면서도 성 미카텔라 훈장의 영예로운 수여자가 되었으며, 오빠를 둔 여동생으로서 린스베른의 횡포를 끝까지 견뎌 낸 부관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더한 농담에 좌중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맞춰 살짝 웃음기를 머금었던 목소리는 곧 다시 진지해졌다.

[그것이 이런 방식으로 그를 상처 입히는 결과가 되었으니 정말 뭐라 사과를 해도 부족하겠지요. 저의 생각 없는 행동으로 이런 구설에 오르내리게 해서, 그를 저희끼리의 장난감처럼 취급하여 정말, 정말 미안할 뿐입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 일로 크게 상처 입으셨을 다른 분들께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저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피해를 본 키시르 경과 젠트리 출신뿐만 아닌 모든 비-귀족 출신들이 제 행동으로 더 이상 힘들어하는 일이 없기만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는 루쉔하이츠 상회 산하에 비-귀족 출신을 위한 사업 소개소를 마련해 직접 총괄하려 하며, 연 5천만 데캇을 관련 기관에 투자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순간 회견장의 공기가 바뀐 게 느껴졌다.

“……와.”

세자르 메힌은 어조 하나 바꾸지 않고 웬만한 소도시의 한 분기치 예산을 한 번에 투자하겠다는 선언을 한 공주에게 혀를 내둘렀다.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가 어느 순간부터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플래시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 너머로도 청중의 흥분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공주님! 그 지원금에 대한 상세 사항은 어디까지 정해진 겁니까?]

[대상이 되는 ‘관련 기관’에 대한 범주며 요건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시지요!]

[사업 소개소 출신에 대한 혜택은 정해진 게 있습니까?]

질의응답 시간까지 참지 못한 누군가가 소리치자 둑이 터지듯 질문들이 쏟아졌다. 더 이상 유의미한 목소리가 아니게 된 소음은, 그러나 어느 순간 죽은 듯 가라앉았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자문 기관을 꾸려 조언을 받고자 하니 많은 분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충분한 검토와 자문을 거쳐 상세 사항을 정한 후 다시 발표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주신 기자분들, 이 인터뷰를 읽으실 모든 분께서는 부디.]

부드럽게, 어쩌면 간곡하게까지도 들리던 어조가 순간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더 이상 이 일과 관련해 레스 키시르 경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제게 향해지는 비판은 마땅히 제가 받아야 할 것이나 제 호감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이 일련의 사건에 휘말려 합당하지 않은 피해를 받는 키시르 경에게 이 이상의 과도한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요.]

호소의 뉘앙스를 띠고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협박이었다.

[제가 키시르 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사과의 최소한은 더 이상 그가 불합리하게 피해를 보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가 직접 요구하지 않는 한 그를 찾아가 귀찮게 하지 마세요. 그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이들은 제가 레반스타인의 이름과 란스타인의 청월 옥좌를 걸고 반드시.]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좌중에게, 최후통첩에 가까운 경고가 떨어졌다.

[그 값을 치르게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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