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Movement
8.
“너 들었니? 공주님 이야기.”
“당연히 들었지. 뭐야, 대체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세르시 조세의 타운하우스에 모인 클럽하우스 멤버들이 티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꺼내 놓은 주제는 요즘 일간지의 가십난을 뜨겁게 불태우고 있는 레티시아 공주의 스캔들이었다. 반쯤은 흥미로, 반쯤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차를 홀짝이는 그들에게도 공주의 스캔들은 결코 남 일만이 아니었다. 공주가 그들을 대표하여 모든 욕을 다 얻어먹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 논란이 된 벌칙을 고안해 낸 것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갈수록 말이 심해지는 듯한데 좀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이 ‘그 자리에서 제일 추한 남자’라는 말은 어디서 끌고 왔대?”
“우리가 그런 조건을 붙였나?”
“나는 기억 안 나는데, 너 기억나?”
“그게 대체 언제 적 이야긴데. 그리고 공주님한테 그렇게까지 했을까 봐.”
그 조심스러운 대화에 간간이 끼어들어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기도, 흥분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세르시 조세는 대충 장단을 맞췄다. 기묘하게 비틀린 즐거움을 숨기려 그녀는 평소보다 더 말을 삼가며 차만을 홀짝였다.
처음 술에 진탕이 되었다가 깨어났을 때 조간에 실린 내용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가. 드문드문 잘려 나간 기억이었으나 그녀가 떠들어 댔던 것보다 훨씬 더 과장해 쓰인 기사를 보고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공주가 들이닥쳐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을 비난하고 나설 줄 알았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주는 제보자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고, 언제든 공주가 추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온갖 일간지들은 이때다 싶어 공주의 과거 행실까지 죄 끼워 넣어 공주에게 돌을 던져 대는 중이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보고 있자니 솔직히, 짜릿했다.
‘한 번 정도는 욕 좀 먹어도 공주님인데 어떻게 되기나 하겠어?’
어차피 공주는 일간지에서 뭐라고 떠들든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안녕, 세르시.”
그런 그녀의 방심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저택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며 명랑한 목소리가 알은척을 해 왔다.
“어머, 공주님!”
“와, 공주님! 오셨군요! 이번에도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쿵, 심장이 크게 쥐어짜이며 내려앉는 듯했다. 반가워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를 맞이하는 클럽 멤버들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세르시는 긴장으로 딱딱해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웃음 지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공주님.”
“아, 세르시. 미안, 연락도 하지 않고 멋대로 찾아와서.”
유유하게 손을 흔드는 공주의 미소는 평소와 다름없이 천하태평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고생의 흔적에 세르시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고작 며칠 만에 살이 내려 날카롭게 뼈대가 도드라진 얼굴에서 기이한 생기로 번들거리는 눈은 그녀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공주와 너무 달라 보였다. 가늘게 떨려 오는 손끝을 꽉 찻잔을 쥐어 감추며 세르시는 아무리 봐도 자신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는 공주에게 짐짓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어조를 꾸며냈다.
“연락이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공주님. 저희 사이에.”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마음을 나눈 친구 사이요.”
“그래? 나는 내 뒤통수치는 것들이랑은 친구 안 하는데.”
워낙 경쾌하게 내뱉은 말인지라 순간 세르시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무, 무슨…….”
“세르시 조세, 일간 소모르 지의 기자 같지도 않은 놈이랑 머리 맞대고 싸지른 소설, 참 재미있더라?”
“그게 무슨 난데없는 소리세요. 당황스럽네요.”
“세르시, 알잖아. 나 돈 많아. 네가 사흘 전 신체르디 모라스크의 저택에서 벌어진 술판에서 반쯤 정신을 놓고 리안 로세트에게 나불댄 말을 들은 게 한둘이 아닌데 아직도 당황스러워?”
의심쩍어 찔러 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고작 사흘 만에 추궁이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세르시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경악스러운 얼굴로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술김이었어요. 게다가 공주님과의 내기는 딱히 밀실에서 속닥거렸던 비밀 회동도 아니었고…….”
“그래서, 너는 그 말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내가, 키시르 경이 겪을 곤란은 생각도 않았어?”
사박, 경쾌하게 풀밭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공주의 목소리가 달콤하게까지 들렸다.
“술에 너무 취해 계산이 안 되어서 그 벌칙을 정한 게 자신이라는 것도, 그 대상이 꼭 젠트리 출신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도 쏙 빼먹었어?”
“……공주님을 곤란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릴게요. 그날의 일은 제 실수였습니다. 부디 마음을 푸시고…….”
“세르시, 술에 취해서 네가 그 개소리를 지껄인 게 사흘 전이야. 기사가 난 것은 이틀 전이고. 너는 기사가 조간에 실리기 전 반 하루, 기사가 난 후 내가 찾아오기 전까지 적어도 이틀의 시간이 있었어.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자기가 싸지른 쓰레기를 치울 생각은 안 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스러우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거침없는 비난에 세르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고작 이깟 일로…….’
지금까지 다 잘 넘겨 왔다. 이런 스캔들 한두 개 정도는 공주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꼭 지금 와서, 그것도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렇게, 일말의 배려도 없이.
세르시는 이를 갈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약하게 남아 있던 죄책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그녀는 공주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공주님, 정말로 일을 이렇게까지 만드셔야겠어요?”
“못 만들 일이 뭐가 있는데?”
“한낱 쫓겨난 군인이에요. 배신자에, 행실도 지저분하고…….”
퍽, 그 순간 기습적으로 얼굴을 치고 떨어져 내린 무언가에 세르시 조세는 숨을 삼켰다. 솜털로도 맞아 본 적 없던 그녀는 순간적인 충격에 말문을 잃었다. 주위의 웅성거리는 소리들과 자신에게 꽂혀 드는 시선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새하얘졌다. 고개를 들어 바닥을 내려다보자 공주의 승마 장갑이 떨어져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거기까지만 하고, 검을 뽑아.”
즐겁다는 듯 웃는 공주의 눈이 흉흉했다. 아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듯 옷차림마저도 움직이기에 편한 승마복이었다. 기가 차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기본 소양으로 결투하는 법은 배웠을 거 아냐.”
“……하.”
헛웃음을 내뱉으며 세르시 조세는 몸을 일으켰다.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거군요.”
* * *
결투 준비는 그 요청자인 공주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타난 데다가 장소가 그 상대인 세르시 조세의 타운하우스였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완료되었다. 결투용 예검 두 자루가 준비되었고, 티 파티를 위해 준비되었던 가든 테이블과 의자가 치워진 곳에는 결투를 위한 둥그런 원이 그려졌다.
결투 당사자인 공주를 빼놓고 그 자리에서 제일 신분이 높은 죄로 참관인을 맡게 된 리세 에버튼이 공주와 세르시 조세의 예검과 복장을 점검했다.
“란스타인 왕국 왕녀, 리베르탄의 영주이자 오귀스트 공작령의 통치자이시며 키요른 섬과 한스만 제도의 수호자이신 레티시아 레반스타인 전하. 신의 광명 앞에 명예롭고 공정한 결투에 임하며 승자는 자비로, 패자는 겸허함으로 결과를 받아들여 상대를 대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한다.”
“란스타인 왕국 티린게일 자작가의 장녀, 맨퍼튼의 영주이자 오세유스와 로컨 제도의 상속자인 세르시 조세 영애, 신의 광명 앞에 명예롭고 공정한 결투에 임하며 승자는 자비로, 패자로서는 겸허함으로 결과를 받아들여 상대를 대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의례적인 맹세가 읊어지고 리세 에버튼이 뒤로 물러나 공포탄이 든 피스톨을 들어 올렸다.
탕! 경쾌한 총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세르시 조세는 검을 들어 달려들었다. 공주의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겨 감히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군수업을 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전에는 사관학교에 지원할지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하아앗!”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완벽한 상단 내려치기를 선보인 세르시 조세의 예검이 허공을 가르며 레티시아의 머리 위로 후려쳐졌다.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한 검격은 눈이 멀쩡히 달려 있다면 당연히 상대가 피할 것을 전제로 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검이 코앞까지 달려드는데도 레티시아의 머리통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심코 당황한 세르시 조세의 손에서 조금 힘이 빠지며 검이 멈칫했다.
빠아악!
마지막 순간의 망설임에도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예검이 그대로 머리를 가격했다. 좌중이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저도 모르게 기절해 버리는 이들, 으어어어, 끄어어어, 따위의 괴상한 소리를 내는 이들 사이에서 공주의 머리통을 정면으로 가격한 세르시 조세가 머리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레티시아보다 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쭉 뻗어 나온 레티시아의 손이 세르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자, 잠, 고, 공주―.”
“할 말 다 끝났지?”
그리고 레티시아는 쥐고 있던 예검을 집어 던진 채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후로 이어진 것은 집요하고도 지저분한 개싸움이었다.
* * *
또각, 또각,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놀리는 테시라 자르덴의 굽 소리가 공주 저 복도의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술과 커피와 수면 부족과 거른 끼니와 공주 때문에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테시라는 간호사들이 줄줄이 더운물과 피투성이가 된 붕대 등을 들고나오는 공주의 침실 앞에 멈춰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 순간이었다. 월급을 받아먹어 가며 사는 고용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그러나 정작 실행할 용기는 내지 못해 망상으로 그리기만 할 뿐인 그 결전의 날. 똑똑,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화장대에 앉아 있던 레티시아의 얼굴을 시녀가 조심스레 닦아 내고 있었다.
‘……어후.’
보기만 해도 자신의 얼굴까지 아파지는 것 같아서 테시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손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진 공주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오색으로 변해 가는 커다란 멍이 있었다.
“아, 테시라다. 좋은 아침.”
티린게일 자작 영애의 코뼈를 부러트리고 어깨를 탈골시켜 병원에 입원시킨 공주가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에 뭔가 속에서 울컥하는 게 올라와 테시라는 이를 악물며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봉투를 휙 끄집어냈다.
그걸 받아 들고 한 번 흘끗 시선을 준 공주는 봉인을 뜯어 보지도 않고 물었다.
“이게 뭐야?”
“보시는 대로, 사직서요.”
머리가 꽃밭인 공주가 상상을 초월한 상대와 스캔들을 터트려 전화통에 불이 날 때마다, 그런 주제에 일 벌이는 건 잘해 자고 일어나면 상회가 하나 더 생겨 있을 때마다, 그렇게 긁어모은 돈과 권력으로 이미지 관리는 신경도 쓰지 않아 주가가 고공 하락을 할 때마다 이를 갈며 별러 왔던 순간이었다. 그간의 괴로움과 울화가 터져 눈가가 먹먹해지려는데 공주가 툭 내뱉었다.
“테시라, 아직 리오메리트 사의 신상, 못 샀잖아.”
“그딴 목걸이……가 중요하긴 해도 더 이상은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못 해 먹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겨우 공주님 욕먹는 걸 자제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폭력 사건이라니요!”
“그냥 욕먹게 놔 두라니깐.”
“못해요! 아악, 그렇게는 못 해! 그야 공주님도 잘한 건 별로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감히 공주님한테만 다 덮어씌우고 자기들끼리는 정의로운 고발자처럼 굴 수가 있어요!”
“그래그래,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짓은 꿈도 못 꾸게 이 기회에 확실히 밟아 줘야지. 억울하잖아.”
“당연하지요! 완전히 쪽을 줘서 공주님의 악명을 온 천하에 떨쳐야지요!”
“그래. 덕분에 확실히 신문 앞면에 실렸잖아.”
“……잠깐만요, 진짜로 그것 때문에 티린게일 영애와 몸싸움을 하셨다고요? 그냥 얌전히 결투나 했으면―.”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년을 어떻게 이겨.”
“평화적으로, 대화로 푸는 법도 있었는데요.”
“그럼 내가 그년을 합법적으로 못 패잖아.”
그, 그런가? 그런 건가?
테시라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자 레티시아는 유유자적하게 웃으며 받았던 사직서를 그대로 돌려 테시라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테시라. 이 기회에 미친개 소리 듣는 것도 나쁘진 않은 듯해. 사람들은 미친개는 잘 건드리지 않잖아.”
“…….”
“걱정하지 마. 테시라를 괴롭히는 못된 인간들이 있으면 걔네들도 확 물어뜯어 줄 테니까.”
생글거리며 웃어 보인 공주가 마지막으로 ‘리오메리트 사의 신상’이라는 말을 입 모양으로 만들어 보였다.
“공주님, 이제 기자회견장으로 가실 시간이에요.”
“응, 알았어.”
마지막으로 마른 천으로 멍이 든 이마를 조심스레 닦은 시녀의 말에 레티시아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데다가 어느새 웃음이 싹 사라진 새하얀 얼굴은 푸르게 변하는 멍이 도드라져 전체적으로 위험하고, 무정하고, 성질 더러워 보였다.
“훗, 멍이 드니 무법자스러운 미모가 살아나는군.”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공주가 기자회견을 위해 팔랑거리며 나가 버리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테시라는 손에 쥐고 있던, 어느새 돌려받아 버린 사직서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리오메리트 사의 신상.”
참 예뻤던 그 블루 다이아몬드를 생각하며 테시라는 다시 사직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하긴, 여기서 어떻게 더 개판이 되겠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더 불안해지는 저주 같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