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6)

7.

이 모든 개판의 효시를 올린 일간 소모르의 오늘 자 신문을 쥔 채 테시라 자르덴은 주인 없는 집무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꾸깃꾸깃하게 접힌 신문을 결국 벽난로 안에 던져 버리며 테시라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녀는 막 자신의 오늘 일정과 공주의 며칠간의 일정을 모조리 취소한 참이었다. 그 개좆같은 기사를 낸 일간 소모르의 리안 로세트가 어찌나 열정적인 소설을 써 놨던지 그녀의 전화기에는 불이 붙어 꺼질 틈이 없었다.

아니, 그게 소설이 맞긴 한가?

공주가 오만하고 젠트리들은 사람으로도 보지 않아 그런 내기를 했다는 건 공주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말이다. 어차피 공주 입장에서 자기 아랫사람은 젠트리든 귀족이든 심지어 왕족이든 다 똑같았다. 그런 공주가 레스 키시르가 젠트리 출신이기 때문에 그를 발톱의 때만큼도 보지 않아 내기의 벌칙으로 삼았다고 소설을 쓰는 것은 젠트리들의 굴절된 피해망상이요, 귀족들의 뿌리 깊은 오만함의 투영일 뿐이다.

하지만 머리가 꽃밭인 공주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벌칙에 동참했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있을 수 있는 일이어서 공식 입장을 준비해야 하는 테시라는 위장이 삭아 내리는 듯했다.

“공주…….”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갑게 고개를 돌렸던 테시라는 걸어 들어오는 공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닫아 버렸다. 말 한 번 잘못 걸었다가는 상대를 그대로 씹어 삼켜 버릴 기세의 공주는 책상 앞까지 걸어가더니 뭘 떠올렸는지 이를 앙다물었다. 이빨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기세라 테시라는 아주 조용히, 집무실에 존재하는 가구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뇌가 한 줄기 한 줄기 가닥가닥 찢겨 나가는 느낌에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어찌해야 할지 모를 분노에 온몸을 덜덜 떨었다. 살인죄로 잡혀가 노르텔 광산에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처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충동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 누군가는 이 쓰레기 같은 글을 싸질러 놓은 기자 새끼일 때도 있고, 그 깃털같이 가벼운 입을 놀려 이 개판을 조성한 제보자 새끼일 때도 있고, 그걸 또 좋다고 소비해 대는 이들일 때도 있었다.

‘공주님께서는 정말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모두에게 사랑받으시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는 헛소리였다. 그건 순수한 동경일 때도 있었고, 비뚤어진 열등감일 때도 있었고, 악의에서 비롯된 조롱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생글거리며 웃으며, 그러니까. 내가 좀 사랑스러워서, 따위의 헛소리로 답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얼마나 알량한 환상인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정말로 사랑받는다면 기회가 생기는 순간 그녀의 곤경을 이리 가볍게 소비할 리가 없다. 정말로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단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이리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뜯어먹으려 들 리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불특정 다수의 군중에게 그런 걸 진심으로 기대할 만큼 멍청하지도, 애정에 굶주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고 친한 척하며 들러붙겠지. 그녀는 가진 것이 대단히 많았고, 그런 이들은 고작 이런 추문에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녀의 잘못에 항의하는 것이었다면 존중했겠으나 대부분은 어차피 좀 더 자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관심을 거둬 가기 전까지 씹고 뜯을 것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들일 뿐이다. 진지하게 그녀와 끝까지 맞서 싸워 의미 있는 변혁을 일궈 낼 용기도, 끈기도 없는 것들. 그러니 그자들이 얼마든지 떠들어도 그녀는 상관없다. 정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레스 키시르에게는 그렇지가 않아서.

‘……젠장. 빌어먹을.’

머리를 퍽퍽 헤집으며 그러쥐었던 그녀는 얼굴을 쥐어뜯듯 쓸어내렸다.

‘제대로 된 사과도 못 했어.’

그 악의 어린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우두커니 서서는 덫에 걸린 듯 도망치지도 못했다. 몰려들었던 기자들의 벽 너머로 눈을 마주친 순간까지도 그는 그녀를 믿었다. 그녀는 정말, 그 모든 진심을 다해 자신이 그의 불안에 종지부를 찍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세상이 꺾어 놓고 짓밟았던 남자를 일으켜 세워 그 어깨를 짓누르는 사슬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레스 키시르가 그녀에게만은 아무런 근심과 불안 없이 마음껏 진심을 털어놓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를, 그가 믿고 사랑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언젠간 그가 의무적인 봉사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에 취해 그녀를 만지기를, 입으로만 내뱉는 사랑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심을 속삭이기를, 그녀가 그리도 사랑하는 웃음을 죄책감이나 불안 한 조각 없이 지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곁에서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그의 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건 진심이었다. 정말,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공주님, 제가 내기의 벌칙이었습니까?’

고작 그 질문을 부정해 주지 못했다.

심장이 무너지는 좌절감에 레티시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는, 잊고 있었다. 그게 레스 키시르를 만나게 된 계기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녀에게는 정말로 사소하고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클럽하우스 멤버들과 시간 때우기를 위해 벌였던 정말 소소한 여흥의 일부였을 뿐이다. 타인에게 결코 해를 가하지 않을, 악의 없는 작은 장난.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어야 할.

‘괜찮습니다, 공주님.’

아아, 내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얼굴을 하게 해 버렸다. 겨우 웃게 되었는데. 조금씩 믿어 주고 있었는데. 내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게 했어.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런 같잖은 벌칙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당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으리라고. 그날의 벌칙이 없었더라도 우리는 만나 결국은 사랑하게 되었으리라고.

나는, 다른 이들과는 같지 않다고.

……그러나 그녀는 감히 그렇게 장담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도, 그녀를 비난할 자격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는 세상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비난해 대는데 정작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단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어떤 비난도, 분노도 감당할 각오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혼자서 죄다 틀어막은 채 무너지는 게 보여서 그녀는 감히 사과받기를 강요할 수조차 없었다.

“테시라.”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을 떨어트리자 시야가 온통 시뻘겠다. 평소 같은 깐죽거림도, 또 그러실 줄 알았다는 비아냥도 없이 테시라는 담백하게 답했다.

“예, 공주님.”

“그 새끼…… 누군지 알아내.”

“이미 알아보고 있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식 기자회견도 잡아 줄래? 오겠다는 사람 막지 말고, 특히 이번 일로 재미 좀 본 이들은 다 오라고 해.”

“……예. 날은 한 사흘 정도 후로 잡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테시라. 이번 리오메리트 사에서 여성 라인을 새로 열었는데 거기 첫 라인업이 장난이 아니야.”

“레디언트 컷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지요.”

“그거 줄게.”

“……예?”

“그거 줄 테니까 일간 소모르 지의 리안 로세트.”

얼마 전의 가든파티에서 스쳐 지나가듯 봤던 일그러진 얼굴의 젊은 기자. 어느새 몸을 느긋하게 돌려세운 레티시아는 엉덩이를 걸치듯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그딴 걸 기사라고 싸지른 걸 후회하게 해 줘.”

“……예, 공주님.”

미처 완전히 지워 내지 못한 긴장감에 테시라의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비서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레티시아는 느릿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레스에게 닿았던 손끝이 견딜 수 없이 허전했다.

닿았다가 놓쳐 버린 것은 손인데 가슴 한편이 도려내진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레스 키시르를 놓쳐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 * *

‘내가 뭐랬니.’

……언젠가 저 원수 같은 동생에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레오르나는 저번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진 동생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냄새만 맡아도 속이 쓰려 오는 블랙커피와 악으로 버티고 있는 듯한 레티시아는 이틀 만에 퀭해진 눈가와 핏줄이 벌겋게 선 눈 때문에 귀기까지 흘렀다.

별생각 없이 산 대가를 하필이면 처음으로 진지해진 상대와 파탄 나는 것으로 치르고 있는 동생이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간지를 화려하게 뒤덮으며 가십 면을 평정함에 이어 정치면까지 넘보는 동생의 원대한 삽질은 들으면 들을수록 울화가 치솟았다.

“아, 이 등신아!”

결국, 레오르나는 견디지 못하고 레티시아의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짝,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세상의 모든 울화와 시름을 짊어진 얼굴의 레티시아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악! 아파!”

“너는 좀 맞아도 싸! 내가, 응? 생각이라는 걸, 어? 좀 하고 살랬지?”

“아야! 아니, 하려면 말로 해! 악, 왜 사람을 패! 언니는 입 없어? 어?”

“그래서 말로 하고 있잖아, 너는 지금 내가 말로 하지 않고 있는 거로 보여?”

“말로‘만’ 하라고! 아니, 언니는 어떻게 된 게 동생이 힘겨워 끙끙거리고 있는데 다정하게 위로는 해 주지 못할망정…….”

“내가 다정하게 위로하고 충고했을 때 네가 들어먹었어? 내가 뭐랬어! 너 마음 내키는 대로 앞뒤 생각 안 하고 들이받다가는 언젠가 꼭 한 번 크게 덴다고 그랬지? 이게 지금 어디서 남 탓이야?”

“아, 진짜! 그래서 언니가 아직 연애 한 번 못…… 악!”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레티시아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진심이 담긴 후려치기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픔과 함께 반쯤 나가 있던 이성이 돌아왔다. 동시에 뼛속 깊이 새겨진 언니에 대한 공포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긴 왜 왔어…… 요.”

“빨리도 물어본다.”

책상 위에 길게 늘어진 레티시아의 곁에 기댄 레오르나는 레티시아의 커피포트에 우유를 쏟아부었다. 지옥의 구렁텅이처럼 시꺼멨던 커피가 천천히 부드러운 다갈색으로 물들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진심인 것은 처음 보는 듯해서 들렀지.”

그리고 이렇게까지 장대하게 삽질을 하고 빌빌거리는 것도 처음이고.

사랑이라는 거, 인간관계라는 게 별거 있냐며, 그냥 그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는 거 아니냐던 동생의 옛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이제까지는 어찌어찌 잘 정도를 지켜 온 것 같았건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세상에 치정 범죄는 왜 있으며, 실연 때문에 비탄의 다리에서 투신하는 이들의 숫자는 왜 줄어들지 않아 그녀의 골머리를 썩게 할까. 사람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고, 그 어떤 자유로운 감정이라도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뒷일 생각 없이 자신만만하니 언젠가는 한 번 이리될 줄 알았다.

“예전에 배웠어야 할 걸 지금에야 배우고 있으니 더 크게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해서.”

아무리 돈을 잘 굴리고, 타인의 환심을 능숙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아주 결정적인 면에서 아직 미성숙한 점이 보여 레오르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닌데.

그녀의 손가락이 그녀와 똑같이 닮은 레티시아의 새빨간 곱슬머리를 쓸어내렸다. 책상 위에 축 늘어져 버린 동생은 그 손길 아래에서 우울하게 웅얼거렸다.

“……내가 진심인 게 보였어?”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너 그건 잘하잖아. 한 번 마음에 들면 끝도 없이 퍼 주는 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모르겠어.”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찡그렸던 레티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딱 집어서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래?”

“처음에는 그냥, 신기했거든. 저 사람은 진짜 뭘 믿고 저렇게 뻣뻣한 걸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산하고 나랑 줄다리기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밀어붙이면 넘어갈까. 넘어가고 나면 어떤 얼굴을 할까. ……지금도 이렇게 즐거운데 그 후에도 즐거울까.”

“…….”

“여러 가지 의외인 점이 많아서 계속 만나게 됐는데 언젠가부터…… 예뻐 보였어.”

“동의해 주고 싶은데 알다시피 내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에 레티시아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거무죽죽했던 얼굴빛이 조금 생기를 띠더니 그녀가 레오르나를 올려다보았다.

“언니도 만나 보면 좋아할 거야. 다정하고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서 만날 실실대느라 다른 사람들은 차이를 잘 못 느끼는데, 정말 본인이 행복해서 웃을 때는 말이야, 눈이 살짝 접히며 반짝거려.”

“…….”

“그게 정말, 정말 예뻤어.”

그 남자를 떠올리는지 레티시아의 눈이 열기를 띠며 반짝였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도 아직 그렇게 선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조금만 비틀리면 인생이 그나마 좀 편해질 텐데 끝까지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게 멋져서, 또 그렇게 가진 게 없는데 내가 힘들 때면, 위험해질 때면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나를, ……다치지 않게 할 것 같아서.”

“…….”

“그래서, 세상이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빼앗아 가기만 하려 한다면 내가 대신 모조리 다 줘 버리자고, 그렇게 생각했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열기를 띠며 조금 빠르고 높아졌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근데, 아하하. 내가, 다른 건 다 줬는데 가장 중요한 건 주질 못했어.”

쿵, 소리가 나며 레티시아가 이마를 책상에 받았다. 통각이 마비되었는지 몇 번씩이나 머리를 박아 대는 동생이 마음껏 자해하도록 내버려 둔 레오르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모든 사랑이 다 열매를 맺는 법은 아니야.”

손가락 사이로 쓸어내린 동생의 머리칼이 살랑이며 흘러내렸다. 언니로서 동생이 처음으로 사랑을 한다면 이보다는 좀 더 쉬운 상대를 골랐으면 했다. 신분 차나 가족의 반대, 레스 키시르에게 붙어 있는 별별 경악스러운 추문과 그로 인한 다른 이들의 손가락질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걱정할 만한 것들이 레티시아의 머리에는 들어 있기나 할까 싶었다. 언제나 원하는 것은 손에 넣어 왔던 동생이 평범한 사람의 좌절이나 불안을 얼마나 이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레스 키시르는 레티시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그 남자는 포기했는데 레티시아가 혼자만 놓지 못해 더한 상처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서로 다른 길을 감으로써 서로를 더욱 성숙하게 하는 인연도 있는 거고.”

“나는……!”

“너는 계속 시도하고, 노력하고, 고쳐 가려 하면서 배워 가는 게 많겠지. 너는 그렇게 실패할 여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레스 키시르도 견딜 수 있을까?”

총체적 난국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시궁창에 빠진 남자였다. 그런 이에게 레티시아의 진지한 교제 상대가 되는 일에 부차적으로 딸려 올 그 모든 두통거리를 감당하라고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폭력이 아닌가.

“그자의 상황에 대해서 의문이 많았던 건 나도 마찬가지야. 언젠가 다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원하면 내게 맡기고 너는 물러서도 괜찮아.”

“……그게, 싫으면.”

이를 악문 동생이 잇새로 느릿하게 내뱉었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이 되는 거야?”

쓱, 고개를 들어 올린 동생의 눈이 짐승 같은 고요한 흉포함을 담아 번들거리는 걸 보고 레오르나는 나직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나쁜 놈이 되는 건 아냐.”

조용히 이빨을 드러내는 어린 맹수의 머리를 레오르나는 가만히 쓸었다.

해 주고 싶은 충고는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일은 폭력이라는 거라든지, 네가 아주 당연히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거라든지, 네 위치 때문에라도 네 모든 부탁은 그 자체로 강요가 될 수 있다든지. 말을 몇 번의 고심 끝에 아주 천천히 고르며 그녀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아주, 대단히 많이 노력해야 할 뿐이지.”

“그렇게 하면, 언니.”

그러나 일말의 간절함을 담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의 시선에 레오르나는 충고랍시고 준비하고 있던 그 모든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 사람이 나를 용서해 줄까……?”

대신 그녀는 고개를 숙여 동생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거야말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네.”

그리고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테시라 자르덴이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공주님, 말씀하신 개새끼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동생의 얼굴을 스치고 간 표정에 레오르나는 지금까지의 안도감이 와장창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미치도록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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