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6)

6.

현관 앞에 서성이고 있는 인파를 보는 순간, 레스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플래시가 터지고 그를 발견한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키시르 경, 공주님께서 벌이신 내기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사람을 내기의 벌칙으로 쓴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후에도 계속 공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심정이 어떤지 한말씀 해 주시지요!”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질문 세례에 레스는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다.

공주. 내기. 벌칙.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단어를 조합해 그는 겨우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꼴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에게 겨냥된 카메라는 계속 번쩍거리며 사진을 찍어 대었다. 질문을 던지는 이들 중에서는 그와 안면이 있는 이들도, 짧게나마 대화를 나눈 이들도 있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레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세자르 메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카사르 출신 특유의 짙은 피부와 장대한 골격이 유달리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와 어우러져 미간을 찡그린 세자르는 당장이라도 척추를 맨손으로 뽑아 버릴 것처럼 흉악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친 기자들 사이로 헤엄치듯 다가온 그는 레스의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세자르.”

“……나중에. 일단, 안에 들어가서.”

“세자르 메힌.”

다시 한 번 나지막이 힘주어 부르는 목소리에 세자르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서슬이 퍼런 기색에 밀려 물러났던 기자들은 어느새 제정신을 차리고 더욱 바짝 그들을 둘러싼 원을 좁혀 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내며 레스는 기자들을 향했다. 상황을 파악하고 순식간에 조용해진 이들을 향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 하셨다는 내기도, 벌칙도,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을 하셨는지는 공주님만이 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타인의 입을 빌려 때 이른 비난과 비판을 삼가시기를 부디 부탁드립니다.”

말을 하면서도 심장이 아래쪽부터 조각나는 듯했다. 짓눌려 금이 가 바스러지고, 짓눌려 금이 가 바스러지고.

나는, 장난감이 아니야.

떠올리려고 해 봤다. 그를 향해 웃어 주었던 공주의 얼굴. 내밀었던 손. 다정하게 껴안으며 떨어트렸던 입맞춤. 경쾌하고 맑은 웃음소리. 함께 달렸던 황금빛 들판. 그의 상처에 입을 맞췄던 아침. 그에게 나이프와 포크 대신 스푼을 주었던, 그의 몸을 탐하는 대신 마음을 안아 주었던, 붉은색에서 피와 아픔과 치욕과 배신과 죽음 이외의 것을 보게 해 주었던.

나는, 당신의 장난감이 아니었어. 그렇지요……?

눈두덩이 칼로 찔린 듯 아팠다. 그는 스스로가 겪어 왔던 공주를 믿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믿고, 함께 보내 왔던 시간을 믿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믿을 상대를 고르는 판단력은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의 판단력은, 혐오와 경멸을 우정과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와 보내셨던 시간 동안 공주님께서는 언제나 제게 배려와 존중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일간지 헤드라인은커녕 맨 뒷장의 구석에도 실리기 힘들 밋밋하고도 정석적인 말이었다. 차라리 이게 대체 무슨 모함이냐고 이성을 잃고 소리라도 질러 댔다면 더 임팩트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정말로 머리가 텅 비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날도 이와 같았다.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파열되었다 하더라도 걷는 것과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대위의 현재 상태라면 수술은 위험합니다. 영양 상태가 호전되고 열이 내리는 대로 최대한 빨리 수술 일자를 잡아 보겠습니다.’

야전 병원의 의사는 사무적이었으나 그래도 친절했다. 다레즈 포로수용소에서 구출되어 병원으로 옮겨진 후, 그는 거의 보름을 꼬박 열을 내며 앓았다. 의사는 혼수상태를 헤매다가 간간이 정신이 들 때마다 사무적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꽉 손을 잡아 주곤 했다.

‘다만 대위,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뛰거나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행동은 힘들지도 모릅니다. 최선을 다하겠으나…… 현역에서 은퇴해야 하는 것도 각오해 두세요.’

예상은 한 내용이었으나 의사의 입으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모든 것은 현실이 되어 그를 짓눌러 왔다. 처음 눈을 떠 자신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뼈와 거죽만이 남은 얼굴을 바라봤을 때부터 결코 전과는 같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라 자부해 왔다. 그의 동료들, 부하들, 팔십 명의 포로 중 레오르나 왕태녀의 본대가 도착했을 때까지 살아남아 다레즈를 나선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그는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유혹에 지지 않았다. 그 뼈를 빻고 살을 가르며 담뱃불로 지져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적이 원하는 대로 후퇴한 부대의 행적을 토설하지도, 차라리 항복해 귀화하라는 설득도 무시했다.

그렇게 그는 명예를 지켰다. 신의를 지켰다. 모두를 지킬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아군의 일부를, ‘친구’를 살렸다. 그와 팔십 명의 포로들, 그리고 다리를 끊고 끝까지 항전했던 203명의 전사자들은 그 희생을 통해 조국의 반격을,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자신이 각오하고 자신이 선택해 초래한 길이다.

그의 명을 따라 죽음을 맞았던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못했던, 완벽히 자율적인 결정의 결과다.

같은 선택지가 다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는 몇 번이고, 몇십, 몇백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하리라. 그 결과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영영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고통에는, 상실에는 의미가 있었기에.

‘대위 레스 키시르. 왕국 군사 대법정의 아라만 소르다.’

그리고 그날, 군사 법정에서 사람이 왔다.

‘자네에 대한 풍기문란죄, 탈영죄, 반역죄 고발이 접수되었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그날, 레스는 처음으로 충격이 극에 달하면 감정이 무뎌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 무덤덤함이, 수사관에게는 그리도 역겨워 보였던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사실에서 듣지.’

그날로 참전 용사로서 주어졌던 모든 혜택이 거두어졌다. 고통을 잊게 했던 아편이 끊겼고, 정해졌던 수술 날짜가 취소되었으며, 보름간의 내원 진료비가 모조리 빚이 되어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키시르는 절대 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상태가 다시 악화될 수 있습니다. 치료 시기를 놓치면 영영 회복되지 않는 장애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수사관님은 그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담당의는 경악해 말렸다. 레스는 그 차분하고도 냉정해 보였던 남자가 그렇게나 흥분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그런 담당의에게 조사관은 조소 섞어 비아냥거렸다.

‘반역자에게는 그조차도 아깝지.’

철컥, 목에 사슬이 채워졌다. 전시에 반역죄가 적용되었기에 재판 한 번이 없었어도 그는 이미 죄인이었다. 목을 졸리는 익숙한 감각에 숨이 틀어막혔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경련하고 동시에 불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새하얗게 시야를 메우며 플래시가 터졌다.

‘키시르 대위! 술에 취해 암구호를 적에게 누설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대위를 주변 마을의 술집에서 봤다는 증언이 한둘이 아닙니다.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데 어떻게 병영을 나갔던 겁니까?’

‘셀레스트 전선이 무너지며 목숨을 잃은 그 많은 병사의 가족에게 뭐라 할 말이 없습니까?’

내가 아니야.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틀어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자 사슬이 강하게 당겨졌다. 힘을 주지 못해 그는 두세 개쯤 되는 계단을 그대로 굴렀다. 웅크린 몸 위로 시선이 쏟아졌다.

내가 아니야.

머릿속이 새하얬다. 수치심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누구라도 붙잡고 애걸하고 싶었다.

내가 아니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내 책임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에게 남기를 명했던 것은, 적들의 전차를 향해 고작 수류탄을 쥐여 주고 돌격시켰던 것은, 적들의 포탄 세례를 앞에 두고 몸으로 방어막을 쌓으며 다리를 무너트리게 한 것은, 누가 남아 죽을지, 누가 도망가 살지를 결정한 것은, 그래 놓고 혼자서만 살아남았던 것은.

그것은, 분명히,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 자신의 완벽히 자율적인 결정이었을 텐데.

‘키시르 대위, 대위를 추천했던 책임을 지고 왕자님께서는 일일이 유족들을 찾아다니면서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병원에서 편안히 요양이나 하고 있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순간 들려왔던 말에 레스 키시르의 세상이 얼어붙었다.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지긋지긋하게 반복해 왔던 말을 내뱉자니 갑자기 쏟아지는 피로에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목소리, 거의 목덜미에 닿아 오는 숨결, 목을 졸라 오는 듯한 인파의 압박에 둘러싸여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개 같았던 시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조리 독이 되어 그를 공격해 왔던 순간. 입을 다물면 다문 대로 발밑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의 기억.

“……야, 레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답답했던 공기가 맑아졌다. 그를 보호하듯 슬쩍 뒤로 돌린 세자르의 어깨 너머로 레스는 이곳에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윤기 흐르는 검은 털의 전투마에서 내리는 공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공주님, 이쪽을 보세요!”

“일간 소모르 지가 독점으로 보도한 내용이 정말입니까? 이 내기가 정말로 처음이십니까?”

“공주님께 공개 사과를 원하는 젠트리들의 성명문이 벌써 나돌고 있습니다. 사과하실 겁니까?”

일순간에 기자들의 관심은 공주에게로 몰려갔다. 수없이 터지는 플래시와 거의 광기까지 깃든 질문 세례를 죄 무시하며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곧장 걸어왔다.

세자르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손에 잡힐 듯한 짙은 긴장감 속에서 레스는 망연히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헤어진 지 한 시간이 채 안 지났는데 몇 년이 지난 것만 같았다. 굳게 다물린 입매와 웃음기가 한 점도 남지 않고 사라진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다. 그 순간에야 레스는 그녀가 그의 앞에선 단 한 번도 저렇게 차가운 눈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건에 대해선 차후에 정식으로 입장을 표명하겠으니 지금은 자리를 물려 달라고 요청하는 바다.”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은 채, 공주가 말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한순간에 조용해진 기자들이 그럼에도 아직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간을 보자 공주가 드디어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리를 비워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다른 왕족이었다면 살살 찔러 대며 도발하는 것으로 폭력 사태라도 유도해 특종을 잡아냈을 테지만 공주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기에 그들은 하나둘씩 물러났다. 잘못 보였다가 온갖 불이익을 받고 공주가 약속한 공개 기자회견에서 제명이라도 되면 곤란하다는 계산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자르는 그때까지 공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친구를 흘끗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둘만이 남겨지자 레티시아의 표정이 보아 익숙한 것으로 바뀌었다.

“키시르 경, 설명하게 해 줘.”

초조한 듯 축 처진 눈꼬리에, 그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목소리에는 불안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게 보기 불편해 레스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공주님.”

공주가 이리 구니까 그는 착각하게 되는 거다. 무언가 의미가 있었노라고. 공주마저 그를 농락한 것은 아니었다고.

“제가 내기의 벌칙이었습니까?”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이기도, 그러지 않았던 것이기도 해 그는 그저 웃어 버렸다.

자신이 저들끼리의 내기의 패배자로서 받아들였어야 했던 벌칙이었다는 게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그럴싸하게 잘 어울렸다. 그 승전 연회에 참가한 제 꼴이 그리도 추레했으니 공주 같은 이가 관심을 표할 이유가 없었는데 이러면 완벽히 말이 된다. 그녀의 판단대로 그는 그 연회장의 그 누구보다 추레했다.

그건, 그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괜찮습니다, 공주님.”

하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아닌 이 사람에게 긍정된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아주 조금 더, 비참해지는 일이라서.

“이미 짐작하고 계시잖습니까. 저도 공주님께 원하는 게 있어서 접근했습니다. 그런 제게 공주님께서는 정말이지 자비로우셨지요. 오히려 제가 사과를 한다면 해야 하는 입장인데요.”

“……키시르 경, 지금 그게 무슨…….”

당황한 듯한 공주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지금 이 순간이 목에 줄이 매여 짐승처럼 사람들 앞에 던져졌던 순간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경!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공주님께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리 편히 제 주제에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을 누렸으니까요. 이런 게 벌칙이 되는 거라면 저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당신이!”

갑자기 홱 팔목을 그러쥐는 손길에 숨이 턱 막혔다. 바로 코앞에서 괴로움에 일그러진 풀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당신이, 나를 오로지 수단으로만 여겼다면 나도 마음이 편했을 거야!”

……아니야. 수단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에 의해 비위를 맞추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함께 어울렸으며, 호감을 사기 위해 몸을 팔았다. 공주 역시 처음부터 그에게 가볍게 즐기는 관계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냐는 기색으로 말을 했다. 그는 그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잘못한 거잖아……! 비난받게 해 줘. 그게 내가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야. 그렇게 욕먹고, 후회하고, 당신에게 사과할 수 있게 해 줘!”

“……죄송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계약이었다. 그가 공주에게 원하는 대로 적당히 봉사하는 대가로 공주가 그에게 돈과 인맥을 제공하는 것.

“제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그는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접근했다. 그래서 관계를 이어 갔다. 그녀는 수단이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는 것, 입술 한 번을 움직여 소리를 내는 것,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앞을 보는 것, 그 모든 것에 갑자기 지쳐 그는 양손을 들어 올려 조금 거세게 얼굴을 쓸었다.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이자 공주가 오히려 입술을 사리무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공주의 사방으로 뻗친 붉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머리가 온통 산발이었다. 오두막을 출발할 때 걸쳐 주었던 망토는 어디다 잃어버리고 왔을까. 오래 달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몸에 붙는 승마복은 얇았다. 그에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선명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공주님? 날이 꽤 추운데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지요.”

그는 공주가 필요했다. 왜냐면.

왜냐면…….

숨이 조금 막히는 듯해 그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머리가 또다시 새하얗게 변했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 입을 열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 면.

“괜찮아, 키시르 경.”

텅 비어 공회전만을 반복하는 머리로 레스는 멍하니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어쩐지 괴롭게 바라본 레티시아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음을 지었다.

“차는 고마워. ……나중에 다시 올게.”

그 말을 남기고 공주는 순순히 돌아갔다. 기자들이 사라진 빈 거리에 랑기누스의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곧 천천히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레스는 적막만이 남은 현관 앞에 스르륵 주저앉아 오래되어 칠이 벗겨진 난간에 이마를 기대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둔해져 있던 몸의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 차가움을 통해 온몸의 기력이 빨려 나가는 듯했다. 눈꺼풀을 뜨고 있을 힘조차 없어 눈을 감아 버리자 잊고 있던 피로가 단번에 몰려들었다. 썰려 나갔던 발목의 아픔이 몰려와 그는 불로 지져지는 듯한 발목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아프다.

한동안 그리 심하지 않았던 아픔에 그는 손등을 잘근잘근 깨물며 속으로 셈을 셌다. 그 시가 연기 가득한 감방에서, 그 사방이 새하얬던 군사 재판소 조사실에서, 그 웃음소리 가득한 승전 연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파. 너무 아파.

백이 넘고 이백에 가까워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아픔에 레스는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그러쥐었다. 애먼 살을 피멍이 들 때까지 깨물어 대다가 순간 견딜 수 없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오늘 공주에게 말하려 했다. 말하고 조금이나마 편해지고, 위로받고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편이 생긴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말했다면 얼마나 우스웠을까.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러면 그대로 사라질 수 있다는 듯이.

그냥 차라리.

……그때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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