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46)

5.

“으응.”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레티시아는 잠결에 뒤척였다. 그에 잠시 멈칫했던 손이 떨어져 나가더니 이마 위로 가벼운 키스가 떨어져 내렸다. 간질간질한 감촉에 눈을 뜨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았는데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음…… 경이 만지작거렸으니까?”

“예전에는 제가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꿋꿋이 주무시던데요.”

“어맛, 대체 어디를 얼마나?”

“잠 다 깨셨군요. 일어나서 아침 드세요.”

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며 꺄악 소리를 내던 레티시아를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시하며 레스는 몸을 일으켰다. 무정하다 싶을 만큼 깔끔하게 돌아서는 등을 보며 레티시아가 항의했다.

“치사하다! 야박하다! 매정하다!”

“저도 사랑합니다, 공주님.”

“그런 성의 없는 고백은 줘도 안 받아!”

“공주님의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사랑합니다.”

더 항의를 이어 가기 전에 레스가 이미 방 밖으로 나가 버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레티시아는 다시 뒹굴, 침대 위로 엎어졌다. 뒤늦게 얼굴이 화끈해졌다.

“……깜짝 놀랐네.”

머리를 만지작거리자 아까의 감촉이 다시 떠올라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듯했다. 눈을 떴는데 처음 마주친 게 그런 얼굴이면 정말이지, 심장에 안 좋았다. 그녀는 예전에도 레스 키시르가 그런 식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정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녹아내릴 듯 간질간질해서 그녀는 입을 꽉 틀어막으며 애꿎은 베개만 퍽퍽 내리쳤다.

아니, 그냥 그녀 혼자만 대단히 의미를 부풀려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래부터 신사적이고 두루두루 친절한 남자다. 그냥 하던 짓을 계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그녀뿐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특히 그의 후원자 역할을 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리 굴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레티시아는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조금만 잘해 줘도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말랑해졌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도 그랬을 거라 생각하니 뭐라 설명할 길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래 봤자 서비스 차원의 행동이니까.’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철저히 선을 그었던 남자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리 쉽게 넘어갔을 리가 없다. 이것은 수년간의 시행착오와 날카로운 사람 관찰과 인간 내면의 심도 깊은 고찰을 통해 인간관계의 정수를 깨우친 그녀만의 성취인 것이다.

“……공주님, 제가 뭔가 죄를 지었습니까?”

그 순간 쟁반 가득 브런치를 받쳐 들고 들어온 레스는 대단히 억울하고 원망스럽다는 레티시아의 시선에 움찔했다. 본인에게 따지고 들기도, 그렇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양 잊어버리기도 억울해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던 레티시아는 쟁반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순간 시선을 돌렸다.

“와……!”

탄성이 나올 정도의 절경에 머릿속이 순식간에 백지가 되었다.

커다란 은쟁반 한가운데를 장식하는 것은 미니 버거였다. 꼬챙이를 끼워 고정한 버거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 베리 시럽을 뿌린 핫케이크와 트러플을 뿌린 미니 치즈피자, 오색의 계절 과일이 뒤섞여 있는 샐러드와 요거트,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세심하게 튀긴 달걀이 올려진 에그 베네딕트가 광채를 뿌리며 자리 잡고 있었다. 입에 침이 고이며 잊고 있었던 허기가 단번에 몰려왔다.

“키시르 경, 설마 이걸 다 경이……?”

“그렇다고 대답해 드리고 싶지만, 아닙니다. 어제 출발하시면서 저녁까지 안 돌아오면 오두막으로 아침을 보내라고 하셨다던데, 기억 안 나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플레이팅이며 메뉴가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다.

“로페르의 솜씨였구나.”

소중한 공주님이 황무지 한복판에서 굶주리며 깨어날까 봐 새벽잠을 포기한 채 달려와 아침 준비를 했던 로페르가 봤다면 억장이 무너졌을 얼굴이었다.

“저는 음식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공주님께서 드실 만한 건 만들 줄 모릅니다.”

웃음기를 머금은 채 레스가 그녀의 곁에 걸터앉았다.

“대신 더 잘하는 건 있지요.”

“더 잘하는…….”

……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입 안으로 요거트 한 스푼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받아먹고 삼킨 후에야 레티시아는 상황을 파악하고 냉큼 레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 일어나 몸을 씻고 왔는지 어제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젖었던 남자에게서는 청량한 향이 풍겼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단단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몸에 기대어 있자니 그녀의 입맛을 칼같이 맞춰 낸 초호화 브런치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입 안으로 들어왔다.

식기를 들지 않은 왼손이 간간이 머리를 쓸어 넘기는 감촉을 즐기며 레티시아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잘하네.”

“잘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책?”

“연애소설이요.”

“경이 그런 것도 읽어?”

“예전에요.”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자 옅은 미소를 띤 레스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머니가 이런 거 좋아하셨습니다. 꽃꽂이하느라 손이 모자라니 제게 소리 내서 읽게 시키셨지요.”

“어머니가 아들을 잘 교육하셨네.”

“누나가 보던 책은 좀 더 수위가 높은 것이었지요. 어머니께서는 책이 상하지 않도록 커버를 씌워 두곤 했는데 누나가 가끔씩 몰래 내용물을 바꿔 두곤 했어요. 그걸 전 이해도 못 한 채 소리 내서 읽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지요.”

“아하하, 뭐야, 그거.”

“덕분에 누나는 사흘을 방에 갇혀 굶었지요. 그리고 전 읽다 만 책의 다음 권을 빵 한 조각과 바꿔 빌려 읽었고요.”

그 말에 레티시아는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눈물까지 맺힌 것을 닦아 내고 숨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한 입 크기로 자른 미니 버거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버거의 반대쪽을 집어 내밀자 레스가 고개를 숙여 순순히 받아먹었다. 그렇게 먹이고 먹여 주는 걸 번갈아 가며 쟁반 위의 음식을 깨끗이 비우자 노곤해진 몸을 늘어트리며 그녀가 팔걸이 대신으로 쓰고 있던 레스의 다리를 의미 없이 매만졌다.

“경의 누나는 지금 보르도의 자작가로 시집가 있지?”

“그렇지요.”

“보고 싶지는 않고?”

“안 봐야 미화된 기억으로 남아 서로 행복할 수 있는 법이지요.”

장난기 어린 말에 따라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도 레티시아는 그 말에 묻어난 완곡한 거부를 읽었다.

……만약 그녀의 인생이 개판이 되어 버렸다면 그녀 역시 레오르나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겠지.

레스의 손위 누이가 시집간 보르도의 에서스 자작가는 몰상식한 투자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철도도 안 깔리고, 근처에 항구도 없는 데다가 당연히 전선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골이니 소식을 전하기도 번거로울 거다. 소식을 전해 봤자 누나가 자기 가족을 내팽개치고 수도로 올라오기도 힘들 테고.

하지만 누나 외에도 형이 둘 있었을 텐데. 자금난에 허덕이다 동생들을 쫓아내고도 여전히 허덕이고 있는 장남과 시립대학을 졸업해 비서가 된 차남.

그녀는 가만히 레스의 손에 머리칼을 맡기며 그녀가 나서서 그의 가족들을 구제해 주는 선택지에 대해 궁리를 해 보았다. 하지만 두메산골에 갇혀서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를 누나는 제외하더라도 형 둘은 동생의 이름이 주간지를 도배했는데도 먼저 연락 한 번 안 했다는 게 거슬렸다.

“경은, 여러모로 대단한 것 같아.”

“제가요.”

“나는 못 할 것 같거든.”

허벅지 바깥쪽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무릎을 쓸다가 발목에 손을 대었다. 건드리자 기대고 있던 몸을 통해 레스가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상처가 나은 발등과 발목에는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려지는 그 일그러진 피부의 자국은 고작 한 군데가 아니었다. 큰 것만 해도 발등에 다섯, 그리고 발목에 하나. 새 살이 돋아났다고는 하나 단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았던 때와는 같아질 수는 없다.

‘부러진 뼈 중에서는 제대로 붙지 않아 수술이 필요했던 것도 있었고, 아킬레스건은 재봉합 시기를 놓쳤다고 했지.’

포로수용소에서 고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조사를 했던 테시라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걷는 데 문제는 없지만 쉽게 지치고, 장기적으로도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터이며, 특히 피로가 쌓일 때면 다리를 절지 않고는 걷기 힘들 것이라는 말도 했다.

몸이 그렇게 힘든 와중에 주위에는 그의 편이라고 할 만한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공주, 님.”

손으로도 만져질 정도로 선명한 발목의 흉터를 만지작거리자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건드리면 아픈가 싶어 올려다보자 불편하고도 어색한 듯한 얼굴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치우려 하는 것을 피한 레티시아는 아예 고개를 숙여 그 엉망으로 찢긴 피부에 입을 맞췄다.

“……공주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몸을 달래듯 만지며 그녀는 몇 번이고 그의 흉터에 키스를 했다. 이렇게 며칠을 정성스레 핥다 보면 이 자국이 조금이라도 옅어질까 싶었다.

어느 순간 몸이 홱 뒤로 젖혀졌다.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당겨 안은 레스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에 톡, 기대어졌다.

“……공주님, 저는.”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해 레티시아는 그냥 말없이 그 팔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저는, 그때.”

무언가에 잔뜩 짓눌린 듯한 목소리가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턱턱 목구멍에 걸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던 레스는 결국 입을 다물고 꽉 그녀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파.’

끌어안는 힘이 어찌나 센지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숨 막혀.’

호흡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 가슴이 답답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은 건지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그렇게 내뱉었다. 사실 무엇이 문제이든 상관없었다. 문제가 무엇이든 그녀가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결단코 생각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다시 한 번 그렇게 힘주어 되풀이하자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조금 빠졌다. 응석을 부리듯 그녀의 목덜미에 비벼 오는 머리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며 레티시아는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정말, 괜찮아.”

그녀가 괜찮게 할 것이다.

* * *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오두막은 모든 방을 다 합쳐도 그녀의 화장실 하나보다 작았으나 덕분에 레티시아는 한껏 퇴폐의 극치를 달리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옷도 채 입지 않은 채 일어나 침대로 배달된 아침을 입만 벌려 받아먹은 후 그녀는 어느새 단정하게 갖춰 입었던 레스의 옷을 죄다 벗겨 버린 채 밀어 넘어트렸다. 놀리듯, 장난치듯 입술을 마주 대다가 어느새 잡아먹듯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침대에서 단 한 발짝을 벗어나지 않은 채 한참을 뒹굴다가 해가 중천에 뜰 때야 겨우 말에 다시 올라 오두막에서 떠나자 눈앞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늦가을의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레스 키시르는 무섭게도 배움이 빨랐다. 랑기누스를 무슨 괴물 바라보듯 했던 게 언제의 일인지 이제는 갤럽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도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생길 정도였다. 뷘터하우젠의 까다로운 학장들이 만장일치로 전액 장학생에 전체 수석으로 뽑은 것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언니랑 잘 맞을 수도 있겠다.’

동문인 데다가 그를 포로수용소에서 구출했던 인연도 있고, 레오르나는 기본적으로 노력하는 실력자를 좋아했다.

‘언제쯤 정식으로 소개하는 게 나으려나.’

적어도 석 달은 채워야 하지 않을까. 누구를 만나 봤자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고 시간이 날 때마다 트집을 잡았던 걸 생각하면 그 정도 뜸은 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생글거리며 웃어 보였다. 어딘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 순순히 고개를 꺾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옆얼굴이 어제의 이맘때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편안해 보여 그녀는 그저 기뻤다.

레스가 머무는 개미굴 같은 리오넬 가 앞에 도착하여 가벼운 키스를 끝으로 헤어질 때만 해도 그녀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브륀셀의 대광장을 가로지르고 공주 저의 대문을 지나며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어도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공주님.”

기분이 좋다는 티를 질질 흘리며 춤추듯 집무실로 걸어 들어온 레티시아의 모습에 테시라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더 굳었다. 그 표정을 보고, 그리고 그녀의 유능한 수석 비서가 그 어떤 다른 서류도 들지 않은 채 달랑 하나 들고 온 신문을 보고 레티시아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사설: 젠트리들은 왕실의 장난감일 뿐인가?]

가십난 맨 앞쪽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사진은 무려 한 달 반 전 승전 연회 때의 레스 키시르와 그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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