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6)

4.

해바라기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는 숲 지기의 오두막이 있었다. 공주의 연락을 미리 받았는지 오두막은 비어 있었다. 사슴처럼 달려 현관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넣는 공주를 쫓아 레스는 와락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낭창한 허리가 팔 가득 들어오며 가슴과 등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들이대 몇 번씩이나 입을 맞추자 공주는 간지러운지 몸을 움츠리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잠깐, 응, 키시르 경, 문 좀 열고, 꺄앗!”

자물쇠에 끼워 넣으려던 열쇠가 홈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찌르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레스는 달게도 느껴지는 피부에 잘게 키스를 남기며 이를 세워 물었다. 어느새 풀어져 어깨와 등 위로 길게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 사이에서 공주의 향이 났다. 허리를 감은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고, 다른 손으로 뺨을 쓸다가 엄지로 입술을 어루만지자 입술이 열리며 혀가 손가락을 할짝댔다. 뜨겁고 젖은 감촉에 온몸의 촉각이 칼날처럼 예민하게 곤두섰다. 손가락을 핥으며 입 안으로 끌어들여 더욱 집요하게 적시는 혀의 감촉은 얼마 전 그를 받았던 성기를 연상시켰다. 그에 레스는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단번에 단단히 발기했다.

어떻게 다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만은 이리 부드럽고, 이리 따뜻하고, 이리 달콤한 걸까.

굳은살 가득한 거칠고 단단한 손으로는 만지는 것조차 죄송스러워 그는 최대한 조심스레 그 보드라운 볼을 만지작거리며 엄지로 혀를 긁듯이 자극했다.

“응, 아으응.”

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손으로 가슴을 천천히 그러쥐고 만지자 레티시아가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턱이 뒤로 젖혀지고 엉덩이가 뒤로 빠져 단단히 선 그의 성기 위를 짓눌렀다. 가슴에 이어지는 애무를 명백히 즐기면서 더욱 약을 올리듯 엉덩이로 그의 성기를 자극하는 몸짓에 그는 저도 모르게 허릿짓을 하며 공주의 목덜미와 어깨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 으읏, 공주, 님.”

머리가 열기로 가득 차 어지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살이 맞닿으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워졌다. 공주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떤 걸 꺼렸는지 기억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자꾸 새하얘져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좀 더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살과 살이 완벽하게 맞물려 가장 내밀한 곳까지 닿고 싶었다. 갈증이 나서 이갈이를 하듯 물어뜯어 붉게 자국을 남긴 하얀 살갗을 할짝대며 목을 축이고, 쥐고 둥글게 애무하던 가슴을 놓아 허리띠 버클로 손을 떨어트렸다.

“안 돼.”

그 순간 허리띠에 닿았던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이 밀어 냈다. 그에 쿵, 크게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순간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가 “미안, 미안” 하고 빠르게 사과하며 손을 꼭 잡고 입술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아직 충격으로 얼어붙은 몸이 그런데도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공주를 꼭 끌어안았다. 입술을 벌려 혀를 얽어 오는 움직임에 열정적으로 응하던 공주가 입맞춤 사이에 속삭였다.

“다음은 안에서.”

그 말에 자신이 얼마나 안도했는지를 깨달아 레스는 순간 견딜 수 없이 두려워졌다.

* * *

“아읏, 하아, 응, 아아!”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흰 시트 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흰 몸이 유연하게 꿈틀거렸다. 꽃이 뿌려진 듯 시트 위로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쓸어넘기며 레스는 공주의 발목을 쥐어 톡 튀어나온 복사뼈에 입을 맞췄다. 이를 살짝 세워 긁으니 발가락이 움츠러들며 공주가 자지러졌다.

“아으, 경, 하응, 좀 더, 거기, 더 빠르게, 아읏!”

꽉 엉덩이를 그러쥐는 손의 절박함에 답해 레스는 공주가 요구하는 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가 내벽을 긁자 안이 저 자신의 의지를 가진 듯 움직여 성기를 조여 왔다.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쾌락에 신음을 삼킨 채 땀을 뚝뚝 흘리며 그는 레티시아가 반응을 보이는 곳을 쫓듯 집요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앙, 좋, 좋아, 으응, 하, 흐읏!”

엉덩이를 쥐는 손이 손가락을 세우더니 따끔함과 함께 손톱이 파고들어 왔다. 공주의 고개가 홱 뒤로 젖혀지더니 경고 없이 내벽이 꽉 수축했다. 순간 신음이 터져 나올 정도의 아찔함에 레스는 소리를 토해 냈다. 참지 못하고 싸 버릴 것 같은 갈급함에 그는 서둘러 자신의 손등을 깨물어 사정감을 참아 냈다.

절정 후의 여파로 소리 없이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추자 공주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끌어안아 왔다. 다급하게 요구하는 키스에서 공주의 욕망을 느껴 허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공주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무서울 정도로 솔직했다. 감추는 것 하나 없기에 어디를 좋아하는지 파악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아읏, 공, 주님, 거긴, 만지지, 아윽!”

갑작스레 휙 몸을 뒤집어 그의 위에 올라탄 레티시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꿰뚫고 있는 성기를 지나 고환을 굴리더니 회음을 지그시 눌렀다.

“읏, 아윽, 하아.”

어느새 익숙해진 뭉근한 쾌락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저절로 자잘하게 흔들리는 허리에 공주는 승리감이 깃든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시선에 아랫배가 더욱 저릿하게 저려 와 그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키시르 경, 귀여워.”

질척거리는 물소리, 성기에 가해지는 리드미컬하고도 아찔한 압박, 그에 더해 회음 위의 살짝 융기한 선을 지그시 눌렀다가 안의 전립선을 직접 자극하려는 듯 깊게 짓눌렀다. 손가락이 살갗을 뚫고 속을 헤집는 듯한 느낌에 아찔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를 이런 식으로 만지지 않았다. 자신도 이런 식의 쾌락이 있다는 건 몰랐다.

“이런, 식으로, 읏, 저를 또 놀리시고.”

반쯤 신음이 섞여 뭉그러진 말에 레티시아가 홀린 듯 웃으며 손톱을 세워 회음을 긁어내렸다. 날카로운 자극에 순간 눈앞에 새하얗게 플래시가 터졌다. 부풀고 또 부풀어 속이 비쳐 보일 정도로 비대해진 쾌감에 결국 그는 레티시아의 허리를 붙잡고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렸다.

“앙, 아윽, 하, 아앗, 아아아!”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박혀 레티시아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꽉 힘이 들어간 허벅지의 근육이 도드라졌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격한 움직임에 이리저리 출렁였다. 몸을 일으켜 그 허리를 한 팔로 휘감으며 레스는 그 꼿꼿하게 선 유두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앗, 아으윽!”

꽉 내벽이 수축하며 왈칵 애액이 쏟아져 내렸다. 그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성기가 울컥거리며 정액을 토했다. 목을 그러쥐어 수천 피트 상공에서 내팽개치는 절정의 여파에 레스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런 그의 몸을 레티시아가 꽉 끌어안았다. 스스로가 산산이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가장 무방비한 순간, 그녀는 그를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 부드러운 접촉 속에 감싸여 그는 아이같이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빠르게 뛰는 공주의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전신의 근육이 이완하며 따뜻한 물에 잠긴 듯 노곤해졌다. 부드럽고 기분 좋은 피로감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귓가에 킥킥거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가볍게 이마에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 별것도 아닌 행위에 가슴이 떨렸다. 눈두덩이 타들어 가는 듯 아려 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묻고 싶었다.

‘공주님은 다른 남자들에게도 이랬습니까?’

공주의 이전 애인 중 결별 후에도 질척거리며 매달려 창피를 당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왕왕 들려오던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그 남자들이 왜 그리 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공주님은 언젠간 저에게도 질리실 겁니까?’

유효기간을 훌쩍 넘긴 관계였다.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잊을 만하면 생각나곤 했다.

‘공주님은 왜 내게 관심을 보였던 겁니까?’

그 추레하고 병색이 완연했던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공주는 그에게 이리 잘해 주는 걸까. 그는 더 이상 뷘터하우젠의 전도유망한 수석도, 왕국군의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장교도 아니었다.

그에게 무엇이 남아 있다는 걸까.

“공주님, 당신은.”

눈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밀려왔다. 모든 것을 잃고 진창에 처박힌 이후로는 느끼지 못하게 된 감정이었다. 공주는 그에게 빼앗아 갈 가치가 있는 것을 주었고, 배신당할 수 있을 약점을 새겼으며, 이 이상의 진창으로 처박힐 가능성을 남겼다.

그래서 레스 키시르는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빌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부디.

* * *

그날 밤, 꿈을 꿨다.

‘요하임.’

교회 벽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총을 쏘다가 터진 수류탄에 벽과 함께 찢긴 몸이 날아가고.

‘마누엘.’

먹통이 된 무전기를 필사적으로 두들겨 대며 구조 신호를 보내려다가 급습해 온 총알에 몸이 구멍투성이가 되고.

‘미로프.’

피와 땀으로 질척거리는 손이 그의 머리를 처박아 숙이게 한 순간, 목덜미를 꿰뚫고 솟아난 칼날을 따라 피가, 그 붉고 뜨겁고 미끄러웠던 피가.

언제나와 같은 꿈이었다.

그를 감싸고 절명한 부하의 아직 식지 않은 시체 아래에서 질질 끌려 나온 그의 몸을 사방에서 날아온 발이 걷어찼다. 데캉트 왕국어로 쏟아지는 욕지거리가 고막이 터져 웅웅 울리는 귀에 뭉개져서 들렸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죽이지 마. 죽여 버리는 놈은 머리가 날아갈 줄 알아. 알았어? 절대 죽이지 마.’

원한 대로 살아남아서 목줄이 채워지고 거기에 밧줄이 매여 군용 장갑차에 묶였다. 최대 시속 80km까지 달릴 수 있는 신형 차를 고작 시속 10km로 달리게 하는 수고까지 자청하며 적병들은 목에 압력이 가해지는 압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밧줄에 매달린 채로 포대 자루처럼 질질 끌려가는 그에게 먹다 남은 빵과 건량 조각 따위를 던졌다.

장갑차 뒤에 연결되었던 밧줄은 다레즈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자 천장의 도르래에 매달렸다. 목이 조이지 않도록 종아리가 덜덜 떨리도록 발돋움을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지쳐 잠이 들려 하면 다리에 힘이 풀려 목이 졸렸다. 숨이 틀어막히는 끔찍함에 그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나곤 했다. 그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목이 아니라 손을 매달아 달라 애원했다.

‘키시르.’

훅, 얼굴로 덮쳐 오는 시가의 탁한 연기. 어두컴컴한 감방 속에서 시간의 개념이 완전히 망가져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수면을 강탈당했다. 그런데도 몸에 새겨진 고통과 공포에 그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다.

‘셀레스트 전선이 무너졌을 때 네놈 하나한테 잃은 내 부하들이 몇 명인지 넌 기억 하나?’

어쩔 수 없었어. 정말, 정말로…… 지켜야 할 명예가, 책임이, 임무가, 동료가, ‘친구’가, 있어서.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떻게 해야 네놈 하나에게서 그 모든 핏값을 쥐어짜 낼 수 있을까.’

쓱, 쓱, 칼이 갈리고, 들어 올려지고, 커다란 손이 그의 왼발을 잡아, 첫 번째 관절 틈 사이로 칼이 찔려 들어갔다.

비명을 질렀다.

으득, 어금니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가 뼈를 정으로 내리치는 아픔에 다시 눈을 떴다. 깨어나니 사방이 피로 흥건했다. 살과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조각난 격통에 눈앞이 핑글 돌았다. 아픔으로 헐떡이는 그의 발등을 피 묻은 정이 툭툭 건드렸다.

‘내일은 여기야.’

그에 그는 그대로 발작하듯 몸부림을 쳤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물려 놓은 입마개 사이로 침이 질질 흘렀다.

피. 피. 아픔. 피. 내일도. 피. 피가. 아픔. 싫어. 피. 피.

‘살려 줘.’

아아, 제발 누가.

빛 한 조각마저 남기지 않은 새까만 어둠 속에서 어째서인지 바닥에 흥건한 피의 붉음만이 날카롭게 눈을 찔러 들었다.

‘제발 나를 살려 줘.’

그는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다섯 개의 뼈가 부러지고 다섯 개의 발톱이 뽑혀 나가고, 힘줄 하나가 잘려 나가기 전에는 구원받지 못한다.

발등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덮고 점점 차올라 목까지 찰랑였다.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저 피는 곧 그의 머리끝까지 차올라 폐를 채우고 심장을 옥죄며 뇌를 갉아먹을 것이다. 그렇게 교살당하는 고통에 밤새 시달리다가 열두 번의 밤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치가 떨렸다. 감아 버린 눈꺼풀 너머로도 핏물의 붉은빛이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붉은색. 붉은색. 피. 피. 피. 데캉트 왕국군의 붉은 군복. 피. 피. 그를 이곳으로 보냈던 붉은 머리의 왕. 전선이 무너지던 날 그를 바라보던 린스베른의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와 닮은.

‘……공주님.’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한순간에 변했다. 어두컴컴하고 이끼와 벌레가 바닥을 장식하는 감방에서 벗어나 그는 새파란 하늘과 흐드러지게 해바라기가 피어난 노란 들판에 있었다.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흰 조각구름들은 평온했고, 시야를 채우는 꽃들의 황금빛은 눈부셨다. 쏴아아, 바람이 풀잎을 흔들어 노래하고, 머리 위로 내려앉는 햇볕은 따스했다.

그리고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거기에 있었다.

‘키시르 경.’

녹빛 눈동자가 태양같이 반짝이며 웃음이 부서져 내렸다. 어느새 아픔이 가신 두 다리로 곧게 서서, 그는 마치 홀린 듯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시야가 강렬한 붉음으로 가득했다.

저렇게 붉은데도, 이리도 아름다웠다.

더 이상 악몽이 아니게 되어 버린 꿈속에서, 속절없이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 * *

끈적하고도 경쾌한 재즈의 선율이 연회장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술에 절어 뭉그러진 취객들의 헛소리가 들려왔다. 중앙의 댄스 플로어를 빙 둘러싸며 자리한 테이블이며 스탠딩 바에는 이미 술이 떡이 되어 쓰러진 참가자들이 즐비했다. 동원할 수 있는 알코올의 양이라면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조차 두 손 들 정도라는 양조업 거부 신체르디 모라스크의 고명딸을 위한 생일 파티는 그야말로 술이 강처럼 흐르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세르시 조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와 벤치에 엎어지듯 주저앉았다. 럼 두 병을 비운 후부터 세기를 포기한 음주량은 이미 그녀의 한계를 한참 넘겨 있었다. 술에 절어 버린 몸에는 추워야 할 늦가을의 밤공기가 딱 기분 좋을 만큼 선선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술을 너무 많이 드셨나 봅니다.”

그 뒤를 따라온 남자는 흐느적거리며 석조 벤치를 껴안고 볼을 비벼 대는 세르시 조세를 손쉽게 끌어 올려 테라스 난간에 기대게 했다.

“아아니이, 이 정도 가지고오, 히끅.”

딸꾹질과 함께 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남자는 욱욱거리며 헛구역질을 해 대는 세르시의 등을 참을성 있게 두드리며 냉수를 건넸다. 그 물을 받아먹으며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리안 로세트라 이름을 밝힌 젊은 기자는 신체르디 모라스크가 딸의 생일을 축하하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불러들인 이들 중 하나였다. 기자라서 그런지 말솜씨가 좋고 별별 가십을 다 알고 있는 게 신기해 평소보다 이야기를 좀 더 길게 나누었다.

“뜻밖이긴 합니다. 티린게일 영애께서는 주량이 적어도 럼 네 병이 아니셨습니까? 벌써 나가떨어지실 줄이야.”

“무스은! 마시다가, 끅, 안 마셔서 그래애. 이게, 히끅, 대체 얼마만의, 파티인데에.”

“그러고 보니 영애만큼 브륀셀 사교계가 사랑하는 손님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레티시아 공주님이 잠정 은둔하신 지금은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세르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어머니가 티린게일 자작과 결혼을 했기에 그녀의 정식 신분은 고작 티린게일 자작 영애였으나 그녀의 외가는 브란차일드 공작가였다. 왕가의 고귀함이 땅에 떨어진 이 시대라고는 해도 아직 왕가와 통혼하는 가문들은 브란차일드 공작가를 포함한 극소수였다. 그 지위에, 외조부 브란차일드 공작에게 상속받을 대평야와 철도까지 생각하면 그녀는 사교계에서 여왕처럼 군림해야 했을 몸이었다.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없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왜 공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사교회마다 그 모습을 뵐 수 있었는데 요즘은 확 그 수가 줄었더군요.”

“줄었기인. 잊어버릴, 히끅, 만하면 나타나시는 데에.”

“새로운 애인과 같이, 말이지요.”

그에 다시 한 번 세르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녀는 승전 연회에서의 그 추레하고 볼품없었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온갖 치졸하고 악의적인 소문은 다 달고 다니는, 성 미카텔라 훈장의 영예에도 불구하고 제정신이 박힌 이라면 그 누구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을 배신자. 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끔찍한 불명예여야 했을 터다. 공주가 그 남자를 택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그 내기는, 그 벌칙은 그런 의미였을 터였다.

그런데.

세르시는 얼마 전의 가든파티에서 스치듯 마주쳤던 레스 키시르를 떠올렸다. 옷깃에 금실로 자수가 새겨진 검은 연미복을 입은 남자는 승전 연회의 그 추레한 남자와 동일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였다. 과하지 않은 근육이 잡힌 장신의 남자는 평생 그리 살아온 것처럼 우아하게 잔을 들어 올리며 대화를 이끌고 요염하게 눈웃음치며 시선을 끌어모았다. 황금빛 눈동자를 눈부시게 휘며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모습에 세르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좌절감에 허우적거렸다.

어째서 공주님은 이런 순간에도 최고만을 가지게 되는 걸까. 어째서 단 한 순간도 실패란 걸 하지 않고, 어째서 단 한 순간도 좌절이라는 걸 하지 않고, 어째서, 언제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공주님이 새 애인에게 꽤나 지극정성이시라는 건 들었습니다. 공주님의 가장 친한 친구이신 티린게일 영애라면 아시겠지요? 이거, 란스타인이 처음으로 젠트리 출신의 부마를 맞게 되는 겁니까?”

“부마는, 히끅, 무슨.”

순간적인 망설임은 있었다. 대충 나이와 신분이 맞아 어울리게 된 것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레티시아와 막역하다면 막역한 사이였고, 공주의 루쉔하이츠 상회는 그녀의 영지 맨퍼튼의 가장 규모 있는 파트너였다.

“그자는, 어디까지나 내기의 벌칙이었어.”

“예?”

어차피 레티시아는 내 친구니까.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그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금방 질릴 남자 따위 보다, 훨씬.

게다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밀실에서 은밀하게 속닥거렸던 말을 퍼트리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을 말을 하는 것뿐이니.

술에 절어 둔화된 사고가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그 자리에서 제일 못생긴 남자랑 춤추는 벌칙 때문에 접근했을 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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