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46)

2.

‘또 제대로 못 잤나 보네.’

안 그래도 안색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남자가 한층 까칠해져 나타나자 레티시아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래 놓곤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꼴이라니.

“공주님께서는 지금 같은 시간에도 일어나 계시는군요.”

“나도 가끔은 사람 노릇 하거든? 경을 먹여 살리는 게 쉬운 줄 알아?”

“더 예쁘게 굴어서 보답해야겠군요.”

산뜻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태도에 레티시아는 하하, 마른 웃음을 흘렸다. 저리 기를 쓰며 괜찮은 척을 하니 몰아세워 봤자 역효과가 날 게 뻔했다.

‘아직 믿음이 안 가는 거겠지.’

그녀 자신이 보기에도 자신은 썩 의지할 만한 상대로 보이진 않았다. 팔랑팔랑 가볍디가볍게 굴어 온 평소의 행실의 대가였다.

빤히 바라보자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덩달아 웃는 남자에게 레티시아는 생긋, 마주 웃으며 명랑하게 대화를 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 특수병과가 저격병이었다고 했지?”

“예.”

“그럼, 산탄총도 다룰 줄 알아?”

“보병의 주무장은 소총으로 바뀌었으니 교양 정도로만 배웠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비슷하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나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그건 그녀가 예전에도 몇 번이나 써먹어 왔던 뻔한 연애 레퍼토리일 뿐이었다. 교습을 핑계로 남자한테 잘난 체할 기회 좀 주고, 자세 교정을 한답시고 자연스럽게 몸도 좀 닿고, 그러다가 뜨거운 밤으로 이어지는, 그런 레퍼토리.

그런데 아주 한참이나 레스 키시르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어……, 키시르 경?”

“……공주님께서.”

어딘가 억눌린 듯한 표정으로 그가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사격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솔직히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일단은 내가 공주잖아? 그래서 사냥회 준비를 맡게 되었는데 거긴 주최자가 처음으로 총을 쏴야 해.”

“아…….”

거기까지 말하자 레스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례행사인 추수 후 사냥회의 개최자는 언제나 왕족이었다. 레오르나가 직접 주최할 시간은 없고 린스베른에게 맡길 생각도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레티시아뿐이었다. 그리고 작년 개회식 때 총을 쐈다가 반동에 뒤로 넘어지는 꼴불견으로 거의 사흘 내내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이후로 온 란스타인이 그녀의 최악을 자랑하는 사격 실력을 알았다.

“뭐, 그냥 안 하겠다고 벅벅 우기면 강요할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전통이고 의무니까 가능한 만큼은 하려고 노력하려는 거라고나 할까. 나 혼자만 욕먹는 거면 모르겠는데 나한테 주최를 맡긴 언니까지도 같이 욕을 먹게 되면 미안하잖아.”

정말 미안했다면 작년의 참사 후 바로 피나는 연습에 들어갔어야 했겠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생략했다. 솔직히 그렇게 폭삭 망했던 개회식을 떠올리고 레오르나가 방계의 누군가를 주최자로 찾아보기를 바랐으나 허망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계속 연습은 하고 있는데 잘 안 맞아. 왜 안 맞는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총알한테 물어볼 수는 없잖아. 간단한 조언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했지.”

“……전문 강사를 고용하실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응.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꺼리는 게 명백한 모습이라 레티시아는 자연스레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아, 그보다 키시르 경, 버섯 좋아해? 로페르가 송이버섯을 구했는데―.”

몸을 돌리려던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레스가 잡았다. 돌아보자 입술을 꾹 다문 얼굴이 보였다. 창백해진 얼굴에서 내리깔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저는, 가르치는 데는 재주가 없습니다. 전문 교육을 받아 본 적도 없고요.”

“아니,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괜찮다고 하시면, 자세를 봐 드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으, 으응…….”

“그럼, 한 번 쏴 보세요.”

큰 결심을 하고 한 듯한 말에 레티시아는 결국 머뭇거리면서도 다시 내려놓았던 총을 쥐었다.

“풀!”

신호와 함께 일부러 잘 보이도록 빨갛게 칠을 한 클레이 피전이 날아올랐다. 레티시아는 지난 한 시간 동안 지겹게도 보아 왔던 목표물을 총구로 좇은 후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호쾌한 총격과 함께 반동으로 레티시아의 몸이 휘청했다. 퍽, 소리와 함께 직각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진 총구에서 쏘아진 탄에 명중한 애먼 나뭇가지가 꺾여 나갔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클레이 피전이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와! 봐봐, 키시르 경! 명중이야! 명중은 명중…….”

다른 의미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레스 키시르의 얼굴에 그녀는 숙연해져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공주님께서 즐거우시면 된 거지요.”

“……있지, 지금 나는 위로가 질책보다 더 비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거든?”

“공주님은 일반인이시잖습니까. 이걸 업으로 삼는 저희나,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사냥을 해 왔던 이들과는 다르지요.”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다면 그렇게 말을 해.”

“아니요, 그 정도까지야.”

그녀의 무자비한 실패가 무슨 안도라도 주었는지 아까보다는 한층 편안해진 얼굴로 레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총을 쥘 때는 몸을 옆으로 틀어서 서지만 산탄총은 반동이 심하므로 좀 더 정면을 보면서 서셔야 해요. 반동을 어깨로 받아 낸다는 느낌으로, 이렇게.”

그녀보다 반 도 정도 낮은 체온의 손이 총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총신을 쥔 왼손을 아래에서 받쳐 들어 보조한 후 반대쪽 손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지그시 앞으로 밀어 몸이 정면을 보게 했다. 등 뒤에서 단단한 가슴의 흉곽이 느껴졌다.

‘키가, 생각보다…….’

대략 짐작은 했던 사실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몸을 밀착하니 신장의 차가 바로 느껴졌다. 레스의 어깨가 거의 그녀의 뒤통수에 닿았다. 왜소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어깨는 직접 대 보니 그녀의 어깨를 다 감싸고도 남았다.

“어차피 탄이 터지면서 흩뿌려지는 방식이니까 조준점을 정확히 맞춰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표물이 날아가는 궤적을 머릿속에 그리며, 한발 앞서 대기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조준을 한 후에.”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레스 키시르가 가르치는 데 재주가 없다는 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방금 그가 뭐라 했는지 다시 읊어 보라 하면 단 한 마디도 기억해 내지 못할 자신이 있었다.

제자가 자신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레스가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쿡 찔렀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감아 방아쇠에 가져다 댔다.

“피아노, 잘 치시지요?”

“어? 으, 응.”

“피아노 건반을 내리친다는 느낌으로, 이렇게 확.”

타앙, 타건을 하듯 날카롭게 눌린 방아쇠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이 발사되었다. 반동으로 크게 튕겨나려는 몸을 탄탄한 어깨가 막았고, 위로 튕겨 올라가려는 총구를 총신을 보조하는 손이 막았다. 총알이 발사된 후에도 그녀는 우아하게 두 다리로 서 있었고, 날아올랐던 클레이 피전은 산산이 조각난 채로 풀 위에 떨어져 내렸다.

“마, 맞았어…….”

순간 머리를 어지럽히던 그 모든 간지럽고 보송보송한 상념이 싹 사라졌다. 믿기지 않아 반사적으로 레스를 홱 돌아보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성공의 충격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맞았다! 으아아아, 맞았어! 키시르 경, 봤지? 봤지! 새 대가리 맞고 떨어진 거! 울타리 말고, 나무 말고, 저 새 대가리가 맞았……! 음, 경의 훌륭한 조언에 힘입은 비약할 만한 성과에 감사를 표하지.”

새삼스레 목을 가다듬고 한 말에 머리 위에서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 다음에는 혼자서도 맞추실 수 있도록 같은 동작을 반복 연습하시면 됩니다.”

어느새 완전히 풀어진 얼굴은 언젠가부터 보아 익숙해진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완전히 믿지도, 진심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이렇게도 애매하게 방비가 허술하고 마음을 쉽게 연다.

그 묘한 무방비함에 그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말랑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공주님, 키시르 경이 좀 이상한 건 알고 계시지요?’

그녀의 유능한 수석 비서가 언젠가 흘리듯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성 미카텔라 훈장 수여자가 그 좁은 곳에서 그렇게 검소하게 산다는 게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소비 내역을 좀 살펴봤는데요, 퇴직금에 연금 나온 걸 하숙비와 생활비 조금을 제외하곤 전부 다른 곳에 보내더군요. 처음에는 가족한테 보내는가 싶었는데…….’

‘여자한테 보내던데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섯이나. 그리고 공주님.’

‘그 여자들이 전부 다, 붉은 머리던데요.’

붉은 머리가 취향인가 보지, 라는 논조의 말을 했더니 테시라는 그녀를 무슨 구제할 수 없는 천치 보듯 봤다. 테시라가 레스 키시르에게서 소름 끼치는 취향의 바람둥이를 보았다면 레티시아는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레스 키시르는 그녀의 선물을 이제는 거절하지 않았으나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도 없었다. 군부 출신의 귀족들 몇을 만나고 기자들과도 잠깐 어울리는 듯하더니 요새는 그마저도 없었다. 일거리를 구하려고도, 그렇다고 돈을 모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준 선물들을 팔기만 해도 평생 먹고사는 데 부족함은 없겠지만 그렇게 남에게 기생해서 편히 살려는 사람치고는 그의 일과는 그녀를 만나는 걸 제외하고는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신전에 들어가 몇 시간을 나오지 않는다.

레스 키시르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세상이 그 후로는 이어지지 않을 듯.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

“키시르 경. ……선생님.”

역시, 그녀는 레스 키시르가 웃는 게 좋았다.

“내가 답례로 좋은 걸 보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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