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Movement
1.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리는 듯했다. 레스는 새하얘진 머리로 ‘존경하는 학장님께’라는 말머리로 시작하는, 거의 그의 키의 절반 길이의 게시판을 가득 채운 성명문을 바라보았다. 요약하자면 국왕 폐하의 영광과 대 란스타인 왕국의 국위를 선양해야 할 뷘터하우젠 왕립 사관학교에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젠트리 출신이 웬 말이냐는 내용이었다. 귀족들 특유의 유려하고 우아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인신공격을 열다섯 살의 신입생은 솔직히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행간에 넘쳐나는 악의만큼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성명서에 이름을 당당히 올린 이들 중에는 역사책에 나올 만한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자제들도 있었고, 지금 군부의 고위직을 꿰차고 있는 장성들의 친척들도 있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만, 아니, 불쾌하다는 표정 하나만으로도 기댈 곳 하나 없는 자신 같은 신입생은 당장 합격이 취소되고 쫓겨날 거다.
그러면? 여기서도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나날이 싸늘해지는 큰형의 눈총을 받으며 먹고살 길을 찾겠답시고 돌아봤던 시전이나 항구, 공장들이 떠올랐다. 아직 채 몸이 여물지 않아 완력이 달리고, 그렇다고 기술이나 믿을 만한 뒷배도 없는 그 또래의 아이들은 쥐꼬리만 한 수당으로 가장 위험하고 가장 불결한 일로 떠밀리곤 했다. 그렇게 팔을 잃고, 다리를 절고, 허리를 다쳐 반신불수가 되어 길가에 나앉는 이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생각만으로도 날카로운 기계가 그의 손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착시에 숨이 턱 막히며 헛구역질이 났다. 내장이 뒤틀리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좁아지며 하얗게 명멸했다.
그 순간이었다.
찌이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야 한편에서 쑥 뻗어 나온 팔이 성명문을 사정없이 찢어 냈다.
“이런 헛소리를 몇 번씩이나 진지하게 읽지 마.”
어, 어, 하는 멍청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신은 감히 손도 댈 생각 못 했던 성명문은 너무도 쉽게 뜯겨 나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저 성명문이 철이라든지 아니면 좀 더 단단하고 영구적인 무언가라서 이 학교가 무너지고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저대로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을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에 붙들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 물어뜯기 좋아하는 이들 농단에 하나하나 휘둘려 줄 필요 없어. 뭘 모르는 것들이 저들 마음대로 지껄여 대는 것뿐이니까. 제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이들이 생길 거다.”
레스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부드러운 어조의 말은 상냥했으나 동시에 쾌감이 들 정도로 단호했다. 공포로 아직 뻣뻣한 목을 돌려 상대의 얼굴을 본 레스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찬란한 태양 같은 붉은 머리칼, 동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귀족적인 표정. 대공의 사망 후 명실상부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가 된 린스베른 레반스타인 왕자.
“왕자님, 저런 출신도 모르는 녀석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히멜 벤 데윈이 자기 성명문이 뜯겨 나간 걸 들으면 생난리를 칠 텐데…….”
감탄과 걱정, 존경과 경애가 섞인 추종자들의 말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왕자는 등을 돌렸다. 뷘터하우젠의 흰 정복 위로 흐트러진 붉은 머리는 역광에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아, 탄성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레스는 후들거리는 무릎에 애써 힘을 주어 주저앉으려는 것을 막았다. 바닥에는 왕자가 거침없이 찢어 버리고 갔던 성명문이 쓰레기처럼 구르고 있었다. 그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된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뛰었다.
태생에 따르는 고귀함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보다. 역시 국왕 폐하의 피를 이어받으신 분은 무언가가 특별한가 보다.
뷘터하우젠의 졸업생이 된다는 것은 언젠가 저런 분들을 위해 싸우고, 그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겠지.
“제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긴장으로 차가워졌던 손끝에 천천히 피가 도는 게 느껴져 레스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언젠가.”
언젠가, 왕자의 앞에 서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순간 바랐다.
그때 전하의 말씀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전하의 덕분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살리셨습니다.
* * *
종합 석차 32위.
17위.
3위.
1위.
고귀한 도모나스의 상패.
용맹한 로젠탈의 성훈.
지혜로운 안드레카의 칭호.
그리고 가장 뛰어난 학생에게만 주어지는 성스러운 일로미냐의 휘장.
어느 순간부터 가파르게 상승한 레스의 성적은 처음에는 경악 섞인 불신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다음에는 질렸다는 듯한 시선과 감탄 섞인 껄끄러움이었고, 곧 더 이상 흥분해 떠들 만한 주제조차 되지 않았다.
“이봐, 키시르. 들었냐?”
그리고 자신의 앞에 붙는 전체 수석의 칭호가 제 이름만큼 익숙해졌을 때, 레스는 이 뷘터하우젠에서 마르고 닳도록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가 자신뿐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자님 이번에야말로 유급할 것 같다던데? 다른 건 몰라도 사격 시험의 점수가 영……. 베른하임 교수가 이를 갈더라.”
린스베른은 군무에 전혀 자질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차기 왕재는 무조건 뷘터하우젠을 거쳐 가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 입학한 것이었다. 그 역시도 그를 사랑해 마지않는 모왕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는 말이 많았다. 이론 쪽은 어찌어찌 성적이 나왔으나 실기 쪽에서의 점수가 특히 바닥이었다. 그랬기에 왕자는 1학년 때부터 성스러운 일로미냐의 휘장을 쟁취하며 전 학년 수석을 5년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왕태녀 레오르나 레반스타인과 비교당하며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다른 사람 물어뜯기 좋아하는 이들 농단에 하나하나 휘둘려 줄 필요 없어. 뭘 모르는 것들이 저들 마음대로 지껄여 대는 것뿐이니까.’
알지도 못하는 제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왕자 역시 시달렸던 게 있어서일까.
“설마 그렇다고 정말 학장이 왕자님을 유급시키실까. 국왕 폐하가 매년 내시는 기부금이 얼만데.”
“아니 뭐, 끝내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왕자님한테는 비참한 거 아냐? 뷘터하우젠 역사상 처음으로 부정 졸업자가 될 텐데.”
“에라이, 우리가 신경 쓸 게 뭐냐. 왕자님 걱정은 국왕 폐하가 차고 넘치게 하실 텐데.”
어깨를 으쓱하며 친구들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쫓으려던 레스는 잠시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격 연습장에서는 계속 총격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폐관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여전히.
“왕자님.”
그래서였을 거다.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을 그렇게 갑자기 놓으시면 총구가 흔들려서 정확도가 떨어져요.”
그런 쓸데없는 말을 건넸던 것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순간 눈을 크게 떴던 린스베른의 귓가가 붉어졌다. 순간 정돈되지 않았던 표정은, 그러나 곧 예의 그 다정한 미소가 되었다.
“……고마워.”
왕자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웃어 보였다.
* * *
“우욱.”
꿈에서 밀려 떨어지듯 깨어난 레스는 곧장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커튼의 올이 풀려 생긴 구멍을 통해 희미한 달빛이 들어왔다. 식은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이 거슬렸다. 속을 뒤집는 구역질도, 질척하게 들러붙는 과거의 기억도, 자신이 머저리처럼 지어 보였던 미소도 신경을 손톱으로 긁어 대는 것처럼 끔찍했다.
……악몽이었다.
“레스?”
“아니야. 다시 자.”
잠귀 밝은 룸메이트는 여상스레 내뱉은 말에 다시 곯아떨어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세자르의 나직한 코 고는 소리를 뒤로하고 레스는 아예 옷가지를 챙겨 들어 방을 나섰다.
가을이 깊어져 감에 따라 공용 욕실에는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다. 추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몸을 덜덜 떨며 레스는 샤워를 했다. 밤공기에 머리를 적셨던 물이 그대로 얼음 결정이 되어 매달렸다. 이 좁아터진 리오넬 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옷을 입고, 머리를 정돈해 잠을 설친 기색을 지우고, 자신이 평생을 뼈 부러져라 일해도 갚지 못할 고가의 시계와 커프스로 준비를 마친 레스는 일부러 마차를 부르지 않고 이제야 동이 터 오는 거리를 느릿하게 걸었다. 그대로 그 어두컴컴한 방에 계속 앉아 있으면 도저히 몇 시간 후에 예정된 공주와의 약속에 보일 만한 낯이 아니게 될 게 뻔했다.
‘이런 꿈은 한동안 꾸지 않았었는데.’
차라리 간수에게 발목을 썰리고, 시가로 지져지며 피를 뽑히는 게 낫지, 왕자는.
……왕자는, 그의 속에 있는 온갖 질척한 것들을 모조리 긁어 끄집어 올린다. 무색무취긴 해도 꽤나 견딜 만한 그의 세상을 좍좍 찢어발겨 피 구덩이에 처박은 후 짓밟는다. 그런 날이면 레스는 서랍 안에 잠가 두었던 피스톨을 꺼내 지그시 관자놀이에 대곤 했다. 차가운 금속의 단단함으로 왕자의 기억을 잠그고 애써 그 존재를 서랍 안에 다시 밀어 넣은 후에야 눈앞의 풍경은 익숙한 무색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째서 갑자기 왕자가 생각난 걸까 싶었다가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에 그는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경이 나를 조금이라도 믿고 싶어질 것 같은 때가 오면 다시 한 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어?’
공주가 믿음을 지극히 쉽게 입에 담아 그는 숨이 막혔다.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땐 경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을게.’
그리 가볍게 입에 담는 믿음의 무게가 의문스럽고, 그리 쉽게 약속하는 믿음의 정의부터가 혼란스럽고, 동시에 그리 진실하게 내밀어지는 믿음이 조금, 눈이 부셔서 레스는 그 순간 그녀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건 그 역시도 언젠가는 익숙했던 모습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주 아득하게 옛날 일만 같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어,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키시르 경.”
긴 산책에 다리에 경련이 일게 되었을 때 도착한 공주 저에서 또래의 풋맨이 살갑게 그를 맞이했다.
“공주님은 아직 아침 일정이 덜 끝나셨는데…… 괜찮으시면 좀 구경하실래요?”
“구경이요.”
“마침 잘됐어요! 경이야말로 전문가 중의 전문가시잖아요?”
“……전문가, 요.”
전문가 타령할 때부터 불길했던 예감은 풋맨이 그를 응접실이나 후원이 아닌 연무장으로 이끌며 가시화되었다.
탕, 날카로운 총성이 공기를 찢었다. 그의 심장이 쿵, 크게 뛰며 쥐어짜였다. 구불거리며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높게 묶고 사냥용 산탄총을 들어 올린 공주의 옆모습은 평소의 미소가 사라져 싸늘하게도 보였다.
지난밤의 꿈의 탓일까. 그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공주님.”
나지막이 내뱉은 목소리에 귀 보호대를 하고도 어찌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공주가 몸을 돌렸다. 총구가 아래로 내려지고 그를 발견한 공주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만개했다.
“키시르 경!”
그러나 그 사랑스러운 미소까지도.
어쩌면 이렇게…… 닮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