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46)

9.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홱 몸을 숨겼다. 시뻘게진 얼굴로 남자가 도망치듯 정원을 나서고 주위에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조심스레 회랑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키시르 경―.”

짐짓 평소처럼 명랑하게 말을 걸었던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아, 공주님.”

칼에 베일 듯 날카로웠던 남자의 분위기가 그녀를 발견하자 한결 누그러졌다.

“언제부터 듣고 계셨던 겁니까?”

“음…… 서로 자기소개 할 때부터?”

“말을 하시지요.”

“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흘끔 레스의 눈치를 보며 다가간 레티시아가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본래부터 체온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던 손이 지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지그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레스 키시르의 손이 그녀의 온도로 물들고 단단하게 다물렸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나직한 한숨을 끝으로 그가 조심스레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죄송합니다. 공주님의 연설은 들어 드렸어야 하는데.”

“됐네요. 진심이 부족하잖아,”

툭툭 발을 차며 시비를 걸자 레스가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예의 바르고 조금은 조형된 미소. 그에 비로소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발견해 도와주려 다가갔다. 대화 내용이 좀 심상찮게 진행되고 있어서 나갈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레스가 리안 로세트를 뒤에 달고 정원으로 나간 후로는 정말 나갈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그녀는 몰랐고, 단 한 번도 협박받는 위치에 있어 보지 않았기에 어떤 것이 적절한 반응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몰래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아는 척을 하지 말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신의를 지켰다. 그녀 때문에 적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적이 많은 사람이, 웬만한 협박이라면 코웃음을 치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그녀를 위해서.

“기자들은 뒤끝이 긴데 그렇게 막 적을 만들어도 돼? 기자들에게 뭔가 부탁해야 했던 게 아니야?”

“제가 정보원 노릇을 하지 않아서 실망하셨습니까?”

“아니. 나야 새삼스레 경한테 반해 버렸지.”

그녀가 레스 키시르만큼 정말 뭣도 없었더라면 그를 위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다 고소해 줄까?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아예 경의 이름자 하나 지면에서 찾아보지 못하도록 압력 넣을 수도 있고.”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은, 그리고 할 줄 아는 것은 그냥 그런 것뿐이었다.

“떠들라고 일부러 그런 겁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일이 아니었어도 제가 좋은 소리 들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변하는 건 없어요.”

“…….”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자들이 입을 다문다 해도 떠들고 싶은 사람들은 떠들 겁니다. ……짜릿하잖습니까. 특히 다른 사람의 추문은.”

저보다 높은 사람이 추락하는 이야기.

저보다 잘난 사람이 실패하는 이야기.

저보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야기.

“모든 사람의 입을 막지는 못합니다. 막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공주님까지 욕하면서 더 떠들어 대려 할 텐데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은 채 애매한 미소와 함께 얼버무려졌다. 레티시아는 그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에서 삼켜진 말을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레스 키시르에게는 더 이상 짓밟힐 만한 명예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내 욕받이를 자처해 먹지 않아도 될 욕까지 다 먹으려고?”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로 괜찮아?”

올려다본 얼굴은 감정 한 조각 보이지 않은 채 담담했다. 괜찮다는 게 정말 진심처럼 보여서 더욱 속이 뒤틀렸다. 이것 역시도 운이 좋아 모든 것이 풍족했던 그녀가 모르고 있을 뿐인,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인가? 그녀는 이런 것까지 이해하고 납득해야 하나?

“당신은 정말 그걸로 괜찮아?”

아무리 무뎌졌다 하더라도 악의가, 굴절되어 덮어씌워지는 불명예가 아프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한 행동입니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레스의 표정이 조금 당혹스럽게 변했다.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른처럼 갈 데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손이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조심스레 그녀의 뺨에 닿았다.

“조간에 실리는 유명인의 추문은, 분명히 재미있고 자극적이지만, 그건 동시에 누군가의 비극이기도 하니까…….”

“…….”

“그러니까, 가능하면 오랫동안 그 비극이 당사자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였다면, 분명 그런 것을 바랐을 테니.

나직하게 덧붙이는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그녀는 자신이 레스 키시르를 패배한 내기의 벌칙 취급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만난 후에도 한두 번쯤은 별생각 없이 흥미 위주로 추측성 발언을 떠들어 댔을지도 모른다. 별로 친하지도 않는, 겉치레를 위한 대화만을 나누는 이들과 할 말 중 자극적인 가십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어디 있을까. 스스로 그 주제를 꺼내진 않았어도 맞장구 정도는 쳤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고 상대와의 관계 악화를 각오하면서 그런 흥미 위주로 타인에 대한 악의적인 억측을 늘어놓는 건 그만두라고 말을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만났던 날 레스 키시르의 면전에서 다른 이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보았으면서, 그가 그날 정말로 밤바다에 가라앉아 죽어 버리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랬다.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불쾌히 여겼다면 무언가가 바뀌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그렇기에 레스 키시르는 그녀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다.

“……경, 나는 경을 아직도 잘 아는 것 같지가 않아서 섣부른 판단은 보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사람이 얼마나 쉽게 거짓말을 하고 진실이 얼마나 허무하게 날조되는지 아니까.”

……그저 보상을 하고 싶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모르는 잘못일지라도, 아니, 레스 키시르라면 그녀의 모든 치부를 알아도 아무런 원망도, 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 거짓말입니다.’

그녀에게 패트런으로서의 역할 정도만을 기대하는 그는 그날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 같지도 않은 미소를 띠며 얼버무리겠지. 기대하지도,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은 채 그저 모든 걸 혼자 묻어 버리겠지.

그런 건 싫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경이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어쩐지 조금 굳어 버린 레스 키시르가 도망치려는 듯,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 손을 꽉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서 레티시아는 당혹으로 짙어진 황금빛 눈동자를 잡아먹을 듯 응시했다.

……지키고 싶다.

타인이 온전히 남길 바라 자신을 깎아 내는 이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방패가 되어 주고 싶다.

“경이 나를 조금이라도 믿고 싶어질 것 같은 때가 오면 다시 한 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어? 그땐 경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말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그녀 안에서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모호했던 감정의 윤곽이 잡혀 갔다. 그녀는 여전히 진실을 몰랐고, 레스 키시르를 몰랐다.

“믿을게.”

그러나 그녀가 자신이 본 그를 믿고 싶어졌다는 것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명백하게 알았다.

* * *

“셀레스트 전선에 있었을 때의 레스 키시르의 연인?”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은 눈앞의 왜소한 체격의 기자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안 로세트는 초대받은 적도 없는 가든파티에 무슨 수를 썼는지 비집고 들어와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키시르 경과 동기셨다 들었습니다. 그럴 낌새라도 있었습니까?”

“글쎄. 군은 장교들의 사생활까지는 간섭하지 않으니까 나도 굳이 캐묻지는 않았지. 그렇게라도 숨통을 틔워야 한다면 억지로 막기만 할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래도 충격이더군요. 공주님께서 그렇게 잘해 주시는데 다른 여자의 초상화를 그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니.”

그리 말하며 리안 로세트는 왕자의 반응을 은밀히 살폈다. 서글서글하고 누구에게나 다감하게 대한다는 왕자는 그 말이 사실인지 느닷없이 나타나 질문을 퍼부어 대는 그에게도 꽤나 예의 바르게 대해 주었다.

그것이 왕자가 정말로 성격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그가 흘린 정보가 흥미로워서인지는 모를 일이다. 리안 로세트가 확신에 가까이 짐작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정도.

첫째, 왕자는 레티시아 공주를 꽤 진심으로 아낀다. 아니, 적어도 공식 석상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또, 왕자는 레스 키시르를 꽤나 아낀다 말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적극적으로 그의 구명에 나서진 않았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왕자가 원했다면 레스 키시르의 오명이 지금처럼 화려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둘째, 왕자는 사실 레스 키시르를 그리 아끼지 않는다.

‘쓰레기 같은 새끼.’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는데 숨통이 조이는 듯했던 공포가 떠올라 리안 로세트는 이를 갈았다.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을 때 뒤통수에 달라붙은 조소 어린 시선에 모멸감으로 그는 잠을 꼬박 설쳤다.

‘감히.’

레티시아 공주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죽다 만 병신 새끼가.

“어떤 여자던가? 이름을 말하면 혹시 생각이 날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예상했던 대로 관심을 보이는 왕자의 반응에 리안 로세트는 반사적으로 죄송한 미소를 띠었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굴도…… 아, 붉은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워낙 작아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라.”

한참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테라스 난간을 톡톡 두드리던 왕자가 여상스레 물었다.

“로세트 기자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어?”

“왕자님의 부탁이시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려야지요.”

“키샤가 걱정이야. 가벼운 연애만 반복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한 상대에게 진득하게 마음을 붙이려 하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친구로서, 오빠로서,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정말 난감해.”

“그거 정말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대가 알아봐 줄 수는 없을까? 어쩌다가 그 둘이 만나 깊은 관계가 된 건지, 그 사이가 어떤지, ……여러 가지.”

은밀히 낮아지는 목소리에 리안 로세트는 속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숨겼다.

“고작 그 정도야 간단하지요.”

“정말 고마워. 약소하지만 받아 가게. 내 사소한 부탁을 이리 흔쾌히 받아 준…… 감사의 표시야.”

왕자의 손에서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가 뽑혀 내밀어졌다. 그 반지를 공손히 받아 들며 리안 로세트는 깊게 몸을 숙였다.

“기대에 꼭 부응해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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