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어 버린 외출을 위해 만난 레티시아는 일견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오페라 공연으로 시작해 후원 가든파티로 끝나는 일정이다 보니 그녀의 옷은 화려했다.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은빛 머메이드 드레스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은 호수 면처럼 오색으로 찬란히 반짝였다.
“공주님.”
레스가 공주 저 로비의 계단참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자 공주가 흐응, 하며 짓궂은 미소를 짓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키시르 경, 오늘따라 유달리 더 잘생겼는데? 오페라 가수인 줄 알겠어?”
“그러는 공주님이야말로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경은 발전했는데 나는 현상 유지야?”
“거기서 더 발전하시면 어쩌시려고요.”
그 말에 까르르 웃으며 레티시아가 팔짱을 껴 왔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공주의 향수 향을 맡으며 레스는 티 나지 않게 살짝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을 설쳤나.’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 뒷좌석에 앉자마자 톡, 머리가 그의 어깨에 기대졌다. 가볍게 볼을 비비며 눈을 감는 모습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레스는 그녀의 눈가에 묻어 있는 희미한 피로를 눈치챘다.
어깨를 내준 채 그는 한 손으로 갖가지 장신구를 꽂아 반짝거리며 흘러내리는 긴 붉은 머리를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가 새하얀 이마를 잠깐 드러내고 다시 사르르 흘러내리는 그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부르릉, 낮은 엔진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가슴께를 간질이던 호흡은 반복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과 고급 차가 주는 적당한 흔들림에 어느 순간부터 깊고 느리게 변해 있었다.
공주의 컨디션이 흐트러진 이유는 역시 최근 들어 부상하고 있는 왕태녀와 왕자 사이의 갈등이겠지. 기자들이 피라냐 떼처럼 달려들어 매일같이 새로운 추측성 루머를 써 재끼고 있었고, 주위를 둘러봐도 모든 이가 죄 그 이야기를 했다. 자칭 분석가라는 이들은 차기 왕위가 왕자에게 넘어가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왕위 계승권을 내려놓고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벗어난 공주였지만 그녀는 오라비보다는 언니 쪽과 더 사이가 좋았다.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정말 모를 리가 없는데 알량한 이해를 건넨답시고 수천수만 번 들어 왔을 질문을 하여 잊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를 일을 또다시 억지로 떠올리게 하는 일은 그것만으로 폭력이 아닌가.
‘제가 뭐라도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의미 없는 말밖에 없는데 설마 공주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이 없었을까.
‘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낙관이야말로 무책임하지 않은가.
“으응……, 키시르 경?”
차가 부드럽게 정차하자마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레티시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깜박, 깜박, 아직 졸음 기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풀빛 눈동자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레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 눈꺼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 *
차에서 내릴 때의 태도가 이상했는지 오페라 내내 공주는 그를 신경 썼다. 물어봤자 답이 궁하기도 하고, 그에게 신경 쓰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레스는 딱히 그 착각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파티가 끝난 후에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 그때까지 적당한 변명은 생각해 둬야겠지만.
“정말 괜찮은 거야?”
“네.”
“……못 미더운데.”
가늘게 눈을 뜬 공주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사선으로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내는 공주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 두드리자 레티시아가 크앙, 소리를 내며 그 손을 깨물려는 시늉을 했다. 과장스레 양손을 들어 올리며 상체를 뒤로 물리자 공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공주님, 늦었으니까 장난 그만 치시고.”
그리고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의 수석 비서에게 혼나며 질질 끌려갔다.
얼굴 근육을 총동원해서 가기 싫다고, 나를 좀 구해 달라고 말없이 징징거리는 공주에게 레스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공주는 이 가든파티의 가장 큰 후원자였고, 후원금 모금회의 성격도 띠고 있는 이 파티에 참석해 적어도 짧은 환영의 말 정도는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공주가 5분간의 연설을 위해 화장을 고치고, 머리 매무새며 옷차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다듬을 동안 레스는 천천히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쌀쌀해지는 날씨 때문에 가든파티라 해도 대부분 초대객은 온실처럼 전면이 유리인 오페라 극장의 별관 안에 모여 있었다. 칵테일과 와인을 서빙하는 급사들이 스탠딩 테이블 사이를 우아하게 유영하고,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과 부유한 젠트리들이 화려하게 빼입은 옷차림으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들.
보아 익숙한 얼굴들, 아예 면대면으로는 처음 보는 얼굴들, 이 사람까지 왔나 싶을 정도의 유명인까지, 많은 수의 기자들이었다. 그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 레스는 아직도 온도가 떨어지면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다리에 조금 힘을 주어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의 애인이라는 지위는 공주 본인의 입으로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꽤나 대단한 것이었다. 공주와 떨어지자마자 알음알음 늘어난 인파는 레스가 별관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열몇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아는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키시르 경, 오페라는 좀 어떠셨어요? 헤르문디의 아리아는 유별나지요?”
“이야, 이렇게 잘생기신 분이신 줄 알았다면 진작 친해져 볼 걸 그랬습니다.”
“사실 제가 공주님의 남자들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하나 쓰기도 했거든요? 어때요, 경은 공주님의 마지막 남자가 될 자신이 있다, 없다?”
“공주님을 자주 뵌다면 왕자님도 뵙게 되는 일이 없잖아 생길 텐데, 껄끄럽지는 않습니까?”
“공주님께서 누구한테 수표를 사인해 주느냐에 따라 차기 왕좌의 주인이 바뀐다는 말도 있는데 경께서는 어떻게, 뭐라도 좀 들으신 거 있으십니까?”
친절함과 무례, 호기심과 도발 사이를 넘나드는 질문들 하나하나를 미소 띤 얼굴로 답하며 레스는 차갑게 말라 가는 입술을 소다수로 축였다. 라미에르의 수석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검은 예복은 몸에 붙어 몸의 선을 강조하는 디자인이었으나 소매 부분은 조금 낙낙했다. 유리잔을 들어 기울이자 소매가 살짝 흘러내리며 손목시계가 드러났다.
그렇지 않은 척, 혹은 대놓고 그가 걸친 물건들을 관찰하던 기자 중 하나가 흥미로움과 감탄과 부러움이 뒤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시계는 라미에르의 크리슬레트 라인의 최신품이 아닙니까? 이야, 저는 신문에서만 보던 물건인데요.”
공주의 수석 비서 테시라 자르덴을 뒤로 넘어가게 했던 라미에르의 소르쥬 라인의 최신품은 무료 급식소의 자선 경매에 부쳐진 후였기에 그가 오늘 차고 나온 것은 크리슬레트 라인의 최신품이었다. 이 예복 자체가 자연스럽게 시계를 드러내고 자랑하기 쉽도록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걸 미처 몰랐다는 듯, 계산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는 듯 레스는 감탄하듯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손목을 틀었다.
“그렇습니까? 이게 그렇게…….”
“앗!”
시계를 찬 왼손에는 유리잔 역시 들려 있었고, 거의 마시지 않은 소다수의 색은 푸른색이었다. 기울어진 유리잔에서 흘러내린 소다수가 시계를 구경하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던 기자의 흰 예복 상의 위로 튀어 순식간에 얼룩을 남겼다.
“괜찮으십니까, 오뎃 기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우선 닦을 것이라도…….”
당황한 낯으로 레스는 서둘러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딸깍, 손수건과 함께 끌려 나온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호화 명품으로 휘감은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의 애인과는 어울리지 않은 싸구려 은제 펜던트 목걸이였다. 무심코 시선이 쏠린 순간, 석조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펜던트의 뚜껑이 열렸다.
“아, 이건.”
손수건을 내밀던 레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숙여 펜던트를 집어 들곤 품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래 봤자 이미 펜던트의 내용물을 볼 사람은 다 본 후였다.
“그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 초상화라니, 누구십니까? 붉은 머리가 공주님과 닮았는데 공주님의 초상화입니까?”
“셀레스트 전선에 있을 때의 동기의 연인입니다. 돌려줘야 하는데 아직 그럴 기회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천하의 그 어떤 천치가 믿을까 싶은 거짓말에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자 레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밤이 늦었군요. 저는 공주님께 돌아가야 하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대놓고 자리를 피하는 그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시선이 쫓았다.
공주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애인이 공주는 아니지만 어쩐지 닮은 점이 있는 여자의 초상을 가지고 있다.
그 초상화 속의 여자는 누구이며 레스 키시르와는 어떤 관계인가.
타인의 연애사는 막장이면 막장일수록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오해에 불과한 것이든.
먹잇감을 찾아낸 기자의 무리가 천천히 흩어졌다.
* * *
‘……내 인생을 망쳐 버려도 상관없어.’
붉은 머리의 헤냐 로페르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제1특수부대가 주둔했던 주둔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의사의 일을 돕던 처녀였다. 레스는 그녀가 순결 서약을 하고 성 델피오레 수녀원에 들어가 치료사가 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날이 좋은 날이면 큰 느티나무 아래에 걸터앉아 의사 부부의 늙은 암소의 젖을 짜며 노래하듯 몸의 206개 뼈의 이름을 외우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들려오곤 했다.
‘그자는 알아야 해.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금보다 더한 바닥이 있다는 걸, 그자가 우리를 그 바닥에 처박았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해야 해.’
레스는 낙태약의 부작용으로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든 여자를, 야전 병원에서 걸레같이 망가진 채로 눈을 떴던 그를 보고 희열에 찬 눈을 번들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자를 기억했다.
‘그자도 인생이 망가지는 경험을 해 봐야지.’
“……큿.”
얼마를 걸었다고 왼쪽 다리가 찌르는 듯 아파졌다. 피로와 통증으로 진탕이 되어 버린 머릿속을 헤냐 로페르의 피가 묻어나는 듯한 목소리와 사방이 온통 새하얗기만 한 병실에 갇혀 있던 순간의 돌아 버릴 것만 같은 기억, 눈이 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란히 터졌던 카메라의 플래시가 두서없이 섞여 들어갔다.
그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반쯤 질질 끌다시피 하여 어둠이 내려앉은 후원 한편에 멈춰 섰다. 숨을 고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리안 로세트. 아까 펜던트를 떨어트렸을 때 그 안의 초상화 대신 그의 표정을 더욱 집요하게 살피던 남자였다.
기자는 레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붙임성 좋게 웃어 보였다.
“키시르 경, 일간 소모르 지의 리안 로세트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기쁩니다, 로세트 기자님. 제게는 무슨 일로……?”
“솜씨 좋으셨습니다. 얼마나 표정 관리가 익숙하신지 저도 순간 넘어갈 뻔했지 뭡니까.”
이미 다 안다는 듯 실실 웃음을 흘리며 하는 말에 레스는 기자를 빤히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삼류 가십지에서 일해서 말입니다. 경과 같은 제보자들도 몇 분 보아 왔습니다.”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러지 마시고요. 원하시는 대로 그 붉은 머리 여자분에 대해 조사는 해 보겠습니다. 돈을 떼먹고 간 전 애인이든, 아직 잊지 못하는 불륜 상대든 원하시는 게 있으면 뭐든 알아내는 대로 알려 드리지요. 경과는 말이 좀 통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기자님과 제가요.”
“저희도 먹고살기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경께서도 아실 텐데요. 요새 경기가 안 좋아서 정말이지 죽겠습니다. 전쟁 특수도 반짝이에요. 특히 저희처럼 특종을 먹고 사는 기자들은요.”
“기자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하신다고요. 좋습니다.”
리안 로세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뻗으면 손이 닿을 거리에서 그가 은근히 상체를 기울였다.
“공주님과 왕태녀 전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진행됐는지 귀띔 좀 해 주십시오.”
“…….”
“공주님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숨겨도 경에게는 이야기해 줬을 것 아닙니까.”
“저는 공주님의 놀이 상대이지 부군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알지 못합니다.”
“놀이 상대를 라미에르의 물건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시킵니까? 아무리 공주님이 돈이 많으시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진 하지 않으시지요.”
“기자님.”
“녹음기 수준으로 기억해서 읊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런 뉘앙스의 대화가 있었다, 정도만―.”
“그리고 그 내용을 몇십 배로 부풀려 소설을 쓰시려고요.”
은근히 속닥거리는 리안 로세트의 말을 자르듯 레스가 끼어들었다. 입가에 여전히 옅게 미소를 띤 채였으나, 하는 말은 아무리 봐도 긍정적인 대답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일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리안 로세트의 눈빛에 짜증이 묻어났으나 곧 그는 그것을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덮었다.
“소설이라니,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로세트 기자님의 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어 봤습니다. 주간 잉스페르 지 소속일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 일하시는 일간 소모르 소속으로 내신 기사까지 모두 다.”
“하, 하하…… 농담이시지요? 그 많은 걸 다시 보라고 하면 저도 다 못―.”
“다른 신문들은 다 정정 보도를 냈는데 혼자서만 꿋꿋하게 오보를 사과하지 않으셨던 일이 벌써 다섯 번씩이나 있으셨더군요.”
“……제 기사에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 뿌듯해지려 하는데요?”
“공주님께서 왕태녀 전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는 제가 알지도 못할뿐더러 알았다 하더라도 제멋대로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경이 한 말이라고는 하지 않지요. 철저히 익명성은 보장해 드립니다. 저는 펜던트 속 여자분이 누군지 입 닫고 경이 원하는 사실만 알아내 드리고, 경은 제 변변찮은 궁금증만 살짝 해소해 주시면―.”
“로세트 기자님.”
레스 키시르는 아직 다리를 절었다. 겨우 살이 올랐으나 아직 어딘가 병색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은 창백했고, 예의 바른 미소를 걸고 있는 얼굴은 수려할 뿐이어서 도무지 유해해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리안 로세트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기자님께만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저도 소설 쓰는 걸 좋아합니다. 기자님께서 제 입을 빌어 공주님에 대한 소설을 굳이 쓰셔야겠다면 저도 다른 기자님들을 통해서 기자님에 대한 소설을 좀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상스레 덧붙이는 말은 그 부드러운 어조 때문에 그 의미가 순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 키시르 씨. 지금 저를 협박하는 거예요?”
이 비리비리한 병신에게 순간이나마 움츠러들었던 것, 심지어 협박성 발언까지 들었다는 것에 뒤늦게 리안 로세트의 자존심이 발끈했다. 평소보다 더 거칠게 눈을 부라리며 리안 로세트는 그가 무심코 뒷걸음질 쳤던 한 발짝을 다시 성큼 내디뎌 레스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솔직히 그쪽 정말 뭣도 없잖아요. 공주님 애인 놀이 유예기간이 보통 2주에 길어 봤자 한 달인데 그쪽이 얼마나 더 버틸 것 같아요? 공주님 관심 좀 받으니까 본인이 뭐라도 된 것으로 착각하는 듯한데, 정말 나랑 누가 더 바닥까지 내려가나 진흙탕 싸움이라도 해 보자는 거예요?”
그 말에 레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종처럼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싸늘한 밤공기를 울렸다.
“아니,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기자님.”
처음으로 레스 키시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제가 못 할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 리안 로세트는 상대가 세자릿수가 넘는 사람을 죽인 공으로 훈장까지 받았던 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