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경호원들이 미처 열어 주기도 전에 차 문을 열어젖힌 레티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왕태녀 저의 앞뜰을 가로질렀다.
“베런.”
“공주님.”
어디서 그녀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오르나의 수석 비서가 그녀를 맞이했다. 걸음걸이를 늦추지 않는 레티시아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빨리하며 베런은 왕태녀 저의 중앙 계단을 두 계단씩 올랐다.
“소문은 들으신 듯하군요.”
“어디까지 사실이야?”
“……유감스럽게도, 전부 다입니다.”
그 말에 레티시아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속보: 수정궁, 영령 추모제의 불을 붙이는 것은 레오르나 왕태녀가 아닌 린스베른 왕자라 밝혀.]
[53년 만에 일어난 이변! 더 이상 영령 추모제의 성화 봉헌은 왕태자만의 영예가 아니게 될 것인가?]
[차기 왕좌의 계승자는 누구? 밀려드는 질문에도 수정궁, 명백한 답을 피해.]
[집중 취재: 수정궁은 원래부터 레오르나 왕태녀에게 차기 왕좌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신문이란 신문이 모조리 미친 듯이 써 재끼고 있는 내용은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오늘 정기 기자회견을 가진 왕이 겨우 보름 후에 있을 영령 추모제의 성화 봉헌자를 레오르나 왕태녀에서 린스베른 왕자로 바꾼다고 선언하였다는 것. 지난 53년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차기 왕위 계승자가 맡아 왔던 성화 봉헌을 왕위 계승자도 아닌 왕족이 맡게 된다는 게 왕태자를 갈아치우려 하는 왕의 속내를 드러낸 게 아니냐는 추측. 그리고 다른 후보자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지 않은 한 웬만하면 왕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후계자 책봉을 레오르나 왕태녀는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의문.
레티시아는 머리를 팍팍 헤집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언니는 좀 어때?”
“……괜찮다고 말씀은 하십니다만.”
“어후, 그 등신.”
레오르나의 성격을 대변하듯 별다른 장식품 하나 없이 단출하고도 위압감이 넘치는 석조 복도에 서서 관자놀이를 꾹꾹 짚은 레티시아는 심호흡을 한 뒤 레오르나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여상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허락이 떨어지자 레티시아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레오르나는 교본에 나올 듯한 반듯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서류철을 넘기고 있었다. 깃펜을 쥔 손이 레티시아의 모습을 확인하자 잠시 멈췄다.
“키샤? 네가 이 시간에 일어나기도 하니?”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기도 하면 가끔은 그래.”
“헛소리할 여유가 있으면…… 레티시아!”
레오르나의 손에서 휙 서류철을 빼앗아 든 레티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서류철을 내던져 버렸다. 제4분기 예산안인지, 의회 발언안인지 다른 대단한 무엇인지 모를 종이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무슨 짓이야! 이건 그렇게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게 아닌 아주 중요한―.”
“언니, 진짜 등신이야? 호구야? 어머니가 지금 린시 때문에 언니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쳤는데 어머니가 시킨 숙제나 하고 앉아 있을 생각이 들어?”
“……이건 숙제 따위가 아니야.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내 사정에 따라 하고 안 하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아,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린시 실적을 쌓아 주시겠다? 오늘 조간 봤으면 알고 있지, 언니? 언니가 5년간 데캉트 왕국 놈들과 구르면서 쌓았던 실적이 하나씩 둘씩 린시의 것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거. 린시가 한 건 딱 한 번 출전해서 자기 부대 다 말아먹고 겨우 살아왔을 뿐인데 영령 추모제 성화 봉헌자까지 된 거. 이대로라면 의회 한 번 나갔다간 다음에는 왕태녀 자리가 간당간당―.”
“그러면!”
쾅, 소리와 함께 책상이 내리쳐졌다.
“그러면, 내가 더 어떻게 할까! 고작 이거 하나 가지고 쪼르르 달려가서 어머니한테 생떼라도 부려? 내가 당신한테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죽어라 노력했는데 왜 당신의 호의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새끼만 싸고도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그러면 어머니가 오, 내가 미안하다, 라고 사과라도 해 주신대?”
“그게 언니가 원하는 거야?”
그 말에 레오르나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레티시아는 속이 짓눌리는 듯했다.
‘……린시는 알았을까.’
오늘 느닷없이 그녀를 찾아온 것에 이 일이 아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내가.”
주먹을 쥐고 있는 레오르나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내가, 남자였다면. ……좀 더 말을 잘 듣는 딸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마디가 하얗게 변한 손을 바라보며 레티시아는 언니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살짝 붉어져 있었다. 금세라도 저 끄트머리에 물기가 어릴 것 같은데 끝끝내 눈가는 메마른 채였다.
“……그래도 똑같지 않았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뱉은 말은, 아마 레오르나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편애에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는 없는 거잖아.”
“…….”
“그래도 뭐, 굳이 이유를 덧붙이자면…….”
레티시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레오르나가 화목하고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보아 왔다. 매일 최악에 최악을 갱신하는 부모님의 사이를 조율하고, 애정 없이 의무만 강요하는 어머니의 요구에 답하려 밤잠을 설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을 위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필사적으로 연기를 해 왔다.
하지만 그래서 무언가가 나아지기라도 했는가. 다른 이들은 다 포기하고 저만의 길을 갔는데 혼자만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에 사로잡혀 발버둥을 치면서 언니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괜찮아졌는가.
‘……이러니까 내가 두고 볼 수가 없지.’
조용히, 모왕의 눈 밖에 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끊어야 하는 게 레오르나와의 관계였건만.
“언니는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어.”
그 말에 레오르나가 이를 사리물었다. 눈꼬리의 붉은 기가 조금 더 진해지며 그녀는 교살당하는 듯 가닥가닥 갈라진 숨을 내뱉었다.
그 꼴마저 아버지와 빼 박은지라 레티시아는 가늘게 한숨을 삼켰다.
모왕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할 말이야 많았다. 그들의 아버지인 국서 킬데르트 레반스타인은 부인의 왕좌를 빼앗거나 그녀를 허수아비로 올려놓고 실세가 되려는 야심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라서, 좀 더 자질이 있던 손위 형제가 죄다 죽고 소위 운으로 왕좌에 오른 행운아라서 평생 의회의 쟁쟁한 인사들에게 치이며 살아온 왕에겐 그것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행운이라면 행운이자 어머니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평생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살았다는 반쯤은 진실이고 반쯤은 피해망상인 사실에 시달렸던 어머니에게 남편을 닮은 얼굴로 제 인정을 갈구하는 딸은 정말 좋은 먹이였을 테다.
그녀가 어머니였다면, 평생 언니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말을 잘 듣는 딸이었다면, 이라니. 그건 즉 나처럼 살겠다는 건데 언니, 솔직히 그렇게 살 수 있을 정도로 이타적인 인간은 아니잖아?”
그 말에 의자 등받이를 부숴 버리겠다는 듯 그러쥐던 레오르나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어머니를 닮아 욕심이 많고 아버지를 닮아 오만한 풀빛 눈동자가 한 번 파르르 떨리더니 길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나처럼 살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지.”
“만약에…… 내가 그분이 그리도 죽고 못 사는 소중한 아들을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 버린다면…… 그분께서, 그 소중한 아들을 구제해 달라고 내 발밑에 엎드려 비실까?”
“그럴지도.”
“거참.”
길게 호선을 그리는 레오르나의 입가가 처절하고도 흉포한 미소로 파르르 떨렸다.
“……기대되네.”
그 모습에 레티시아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안도감과 함께 가슴 한편에서 무언가가 한 움큼 떨어져 나간 듯한 상실감이 들었다.
그래, 그래도 이 얼굴이 좀 더 낫다. 이 얼굴이. 이리 비정하고, 악착같고, 비인간적인.
“레냐. ……언니.”
물끄러미 바라보는 레오르나와 시선을 맞추며 레티시아는 그 앞으로 상체를 은근히 기울여 제 자매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좀 치사하지 않아? 이리 아름답고, 돈도 많고, 밤에도 끝내주는 나 역시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지는 못하는데 언니만 그런 데 집착하는 게.”
그에 레오르나는 기막힘과 허탈함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한숨을 내뱉으며 느릿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머리를 짚어 표정을 가린 손가락 사이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왜 나니?”
“왜 나냐니?”
“어머니도, 린시도 너를 좋아해. 너라면 그 누구라도 고를 수 있었을 텐데, 왜.”
풀빛 눈동자에 순간적인 불신이 깃들었다. 그것이 이해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이유라면 많았다. 레오르나만큼 변함없이, 대가 없이 올곧은 애정을 주었던 이는 없었고, 레오르나만큼 존경스럽고 목표로 삼을 만한 이 역시 없었다. 그녀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키샤,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고, 잘못한 점은 진심으로 화를 내며 꾸짖어 주는 것도 멋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글쎄. 편애에 딱히 이유가 없는 거랑 같지 않아?”
“……그게 뭐야.”
“그보다 대답을 안 했잖아.”
레티시아는 손을 뻗어 언니의 손을 쥐고 그 손바닥에 볼을 응석 부리듯 비볐다.
“언니, 내가 이렇게 언니를 사랑하는데, 언니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니.”
레오르나는 손을 뻗어 제 동생의 머리를 꽉 감싸 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마주 팔을 감아 오는 혈육의 온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어미도, 아비도, 오라비도 아닌 저만을 그리 따랐던 이 사랑스럽고도 잔망스러운 동생의 위로에 그녀는 꽉 눈을 감아 버렸다. 이를 사리물어 삭히기도,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어 외면하기도 전, 눈꼬리에 맺혔던 물기가 순식간에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