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키샤! 키샤, 기다려!”
어린 린스베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린 여동생의 뒤를 따라 달렸다. 멈춰 줄 듯 속도를 줄여 빙글 뒤를 돌아보았던 레티시아는 시선이 마주치자 씩 웃곤 다시 몸을 돌려 달음박질쳤다. 팔랑거리는 노란 치맛자락 사이로 사슴같이 매끈한 흰 다리가 거침없이 여름 별장의 정원을 내달렸다.
“거기, 헉, 거기 서! 내, 허억, 내 시험지!”
“돌려받고 싶으면 나를 먼저 잡아야지, 느림뱅이 린시!”
“너, 너……! 너 진짜!”
결국, 따라잡는 것을 포기한 채 허리를 꺾으며 숨을 몰아쉬는 오라비를 돌아본 레티시아는 킥킥 웃었다. 그녀의 손에는 린스베른의 역사학 시험지가 팔랑이고 있었다. 떡하니 겉표지에 찍혀 있는 ‘최우수.’ 린스베른 인생 처음으로 받은 ‘최우수’였다. 기념비적인 일이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보여 드리면 아빠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오빠가 감히 스스로는 못 하겠다고 하니까 내가 대신해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나, 난 아버지가 뭐라 생각하시든 신경 쓰지 않아. 어차피 공부는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퍽이나.”
대놓고 코웃음 치자 린스베른의 얼굴이 빨개졌다. 거의 반 시간을 시험지를 미끼 삼아 그녀에게 질질 끌려다녔던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도 다시 동생에게 달려들었다. 그 불쌍한 오라비를 피해 레티시아가 다시 도망치려 했을 때였다.
“이번 레포란드 백작의 발언도 당신 수작이지?”
그리 멀지 않은 곳, 여름을 맞아 슬쩍 열린 창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레티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잡았……!”
“쉬잇!”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채는 린스베른의 입을 다짜고짜 틀어막곤 레티시아는 그를 질질 끌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창 아래로 숨어들었다. 후원으로 바로 연결된 테라스의 유리문 너머로 소파에 앉아 있는 오스칸타르 대공 킬데르트 레반스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그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어, 어머니?”
덩달아 방 안을 훔쳐보게 된 린스베른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기차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의 브륀셀에 있어야 할 왕이 어느새 여기까지 내려와 있던 것이었다.
그런 왕을 올려다보며 읽고 있던 책을 덮는 대공의 시선은 부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또 대낮부터 술을 마셨습니까.”
“딴소리하지 말고 대답부터 해! 당신이 뒤에서 꾀었지? 뒤라센 법 개정안은 내가 십 년 가까이 매달려 왔던 일이야. 이제 와서 국회에서 좌초되게 둘 줄 알아?”
“취하셨습니다. 내일 제정신일 때 다시 이야기를…….”
콰당,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구가 뒤엎어지고 그 위의 물건들이 와르르 바닥에 굴러 산산조각이 났다.
‘……또 시작이야.’
지긋지긋한 심정에 레티시아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귀가 아플 정도로 틀어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발악하듯 질러 대는 소리는 귀청을 찢듯이 들려왔다.
“잘난 오스칸타르 대공께는 모든 게 다 우스워 보이지! 나는 왕이나 되어서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하는 짓마다 경멸스럽고, 실망스럽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지요.”
“너는 내가 왕으로도, 부인으로도 보이지 않지! 뱀 같은 냉혈한 새끼, 차라리 나를 밀어 내고 네가 왕좌에 앉…… 빌어먹을, 내게 등 돌리지 마! 나는 나가도 좋다 허락한 적 없어!”
퍽,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곧 테라스 문이 벌컥 열리며 오스칸타르 대공이 빠른 걸음으로 뛰쳐나왔다.
“킬데르트―!”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어머니의 고함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던 레티시아는 이마에서 뚝뚝 피가 떨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창백하게 질렸다. 억눌린 분노와 싸늘한 경멸로 일렁거리는 시선이 겁에 질려 잘게 떨리는 두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아버, 아버지, 피, 피…… 피가…….”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모습에 대공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곧 다시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잠시 머뭇거렸던 손이 레티시아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괜찮다.”
미미하게 끌어 올려진 입꼬리가 미소의 흔적을 만들어 냈다. 한 손으로 찢어진 이마의 상처를 누른 대공은 그들을 지나쳐 어딘가로 향했다. 뚝, 뚝, 떨어져 내리는 피가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방 안에서 왕이 가구를 뒤엎고 집기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소리 질러 대는 왕의 목소리에 정확히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가 섞였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할지, 아니면 저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위로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도망쳐야 할지 몰라 서로를 꽉 움켜쥔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너희, 아직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본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며 레오르나가 그들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그렁그렁한 두 쌍의 눈이 대번에 그녀에게 향해졌다.
“어, 언니! 흐어엉, 언니!”
“누, 누나!”
앞다퉈 달려들어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동생들을 양팔로 끌어안아 다독이며 레오르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와. 어머니한테 들키면 얼마나 혼날지 알지?”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 둘이 나란히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들의 팔을 끌어당겨 테라스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레오르나는 테라스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야 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동생들의 얼굴을 벅벅 닦아 내렸다.
“누나, 어머니랑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야? 두 분이 왜 자꾸만 저렇게 싸우시는 거야?”
“별일 아니야. 매번 있는 일이지.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오실 거야.”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항구에 유람선이 들어왔다던데.”
“유, 유람선?”
“후문 쪽 정원에서라면 보일 거야. 살짝 보러 갈래?”
“응!”
“갈래, 유람선!”
대번에 반짝이는 눈으로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들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레오르나는 양손에 하나씩 손을 맞잡고 후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좀 더 좋아지면 다 같이 보트를 띄워 놓고 피크닉을 하자. 어머니랑, 아버지랑, 린시랑, 키샤랑, 다들…….”
그러나 레오르나의 말은 후원으로 이어지는 내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끊겨 버렸다.
레티시아는 번쩍이는 빛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후문의 쇠창살 너머로 수십 명은 되는 듯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에 아예 후문을 열고 밀려 들어오려는 기자들의 무리를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과 저택의 하인들이 몸으로 틀어막았다.
“여기에 멋대로 밀고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취재 허가는 받고 온 겁니까? 물러서요!”
“왕태녀 전하! 국왕 폐하와 대공 전하의 사이가 이번 뒤라센 법 개정안을 놓고 최악이 되었는데 사석에서의 두 분의 모습은 어떠십니까!”
“두 분이 아예 별거하실 거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두 분께서 그에 대한 말씀을 조금이라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거 미친 새끼 아냐! 누구한테 뭘 물어보는 거야? 당장 꺼져!”
“태녀 전하! 레포란드 백작의 이번 발언은 역시 대공 전하의 뜻을 대변한 거였습니까?”
경호원들과 하인들이 몸으로 세운 벽 사이사이로 몇십 개는 되는 손이 뻗어져 나왔다. 레티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레오르나의 손을 으스러질 듯 쥐었다. 악악거리며 소리 질러 대는 목소리들, 눈이 멀듯 터지는 플래시들, 최악이 되었다는 부모님의 사이, 별거, 대공 전하의 뜻…….
“귀담아듣지 마.”
꽉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레오르나가 잇새로 으르렁대듯 속삭였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키며 열여덟 살의 왕태녀 레오르나 레반스타인은 홱 몸을 돌려 다시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녀 전하!”
“대답을 해 주셔야지요, 태녀 전하!”
“태녀 전하,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악을 써 가며 기자들이 레오르나에게 다가가려 인간의 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녀가 이 모든 상황에 얼어붙어 버린 동생들의 팔을 끌어당겨 내문 안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린스베른 왕자님!”
레오르나에게서는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다 판단한 기자 하나가 그녀에게 손을 잡혀 끌려가던 린스베른을 소리쳐 불렀다. 열세 살짜리 왕자는 크게 눈을 뜨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린시―.”
“왕자님, 국왕 폐하와 대공 전하께서 최근에 싸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낯빛이 변해 동생의 팔을 끌어당기는 레오르나의 말을 끊으며 기자 하나가 린스베른에게 외쳤다. 그 서슬에 제풀에 놀란 어린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바로, 좀 전에…….”
“저택 안에서 고성이 들리고 기물이 깨져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폭력이 있었다면 그건 어느 쪽입니까? 국왕 폐하십니까, 대공 전하십니까?”
“대공 전하께서는 엄해서 자녀분들께도 엄하게 훈육을 하신다 들었습니다. 직접 회초리를 드신 적도 있었다는데―.”
“리오폴! 저들을 지금 당장 끌어내! 린시, 너도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레오르나 공주님께서도 다른 형제분들을 도를 넘게 무시하고 깔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대해 왕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 린시……!”
레티시아는 겁에 질려 오라비의 옷자락을 잡았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처음으로 누나를 제치고 관심의 중심이 된 어린 소년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 맞아.”
그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레오르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고, 기자들의 관심은 더욱 집중되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고양감에 젖어 린스베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에게 극도로 집중되는 그 집요한 시선 하나하나를 마치 취한 듯 음미하며.
“누나랑 아버지가 나를…… 때렸어.”
그 말에 기자들 사이의 흥분이 광기가 되었다.
* * *
‘……기분 더럽게.’
레티시아는 잘 땋아 갖가지 핀으로 장식한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이었다.
그 일로 왕과 대공은 실질적인 별거에 들어갔으며, 레오르나는 린스베른의 뺨을 살이 터질 정도로 세게 후려쳤다가 어머니의 화를 사 쫓겨나듯 뷘터하우젠에 입학했다. 린스베른은 나중에 엉엉 울며 사과를 했다. 언제나 자신의 부족한 점만 찾아내는 아버지와 누나가 미워서 저도 모르고 한 짓이었다는 말에 그를 더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레티시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린스베른은 그 후로 변했다. 순진하고 우직하게 노력하는 것보다 더 쉽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경쟁자를 찍어누를 방법을 알고서도 외면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대공과 레오르나를 악역으로 만들어 왕의 총애를 얻고 선량한 피해자로 자신을 포장해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진실을 날조하고 연기를 했다.
자기 가족을 그런 식으로 짓밟고 올라가려는 인간이 동생을 위해 충고를 하러 왔다고? 그가 그녀에게 관대한 건 그녀가 일찌감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진 돈과 인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니까 열 받네.’
애써 잊고 있던 옛날 일을 떠올리자 손끝이 덜덜 떨렸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팍팍 헤집으며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오빠로서 동생을 걱정? 레스 키시르를 묻어 버리려고 내게 수를 쓰려는 거라면 모를까.’
정말 짜증이 솟는 것은, 린스베른이 하는 말이 진짜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린스베른의 말을 단번에 거짓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레스 키시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린스베른의 혈육의 정은 믿지 않지만, 그가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경력에 흠집을 낸 부관을 매장해 버리기 위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려 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믿을 수 있었다.
“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내가 왜 혼자서 이런 답도 없는 걸 가지고 머리 쥐어짜고 있는 건데!”
머리를 팍팍 헤집으며 레티시아는 홱 몸을 돌려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렇게 혼자서 머리 썩이며 궁리하는 것은 도저히 성미에 안 맞았다.
소문은 얼마든지 터무니없이 왜곡될 수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말은 언제라도 타의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법이다. 그녀는 린스베른을 확실하게 믿을 수도, 레스 키시르를 덮어놓고 믿을 만큼 잘 알지도 못했다. 어느 쪽도 완벽히 믿을 수 없다면 그녀가 레스 키시르를 진심으로 경멸하는 것은 그의 입으로 진실을 확인받은 후라도 늦지 않는다.
“키시르 경.”
침실의 문을 열자 이미 옷을 다 갖춰 입고 있던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레스는 창밖의 무언가를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한 발짝 늦게 부름에 반응하여 등을 돌렸다.
“일어나셨습니까, 공주님?”
어제 하루 보여 주었던 친근감은 마치 꿈이었다는 듯 그는 잘 정돈된 가면 같은 미소를 띠었다. 바로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자 손끝이 차가웠다. 양손으로 그 손을 잡아 꼭 쥐어 녹이며 레티시아는 그가 바라보고 있던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던졌다.
“뭘 보고 있었는데?”
“아뇨, 그냥.”
어딘가 무기력한 시선이 하릴없이 비가 쏟아지는 정원을 향했다.
린스베른의 자동차가 현관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여벌의 우산을 받쳐 들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금갈색 머리칼의 비서는 왕자가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우산을 씌워 주며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비가 참, 많이 온다 싶어서.”
남자의 혈색 없는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본 레티시아는 그의 손을 꽉 쥐어 시선을 끌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솔직히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물어보실 것이요.”
여상스레 되묻는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어쩐지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듯한 몽롱한 눈에 미간을 찌푸린 레티시아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경은, 정말로 술에 취해 적에게 암구호를 흘렸어?”
그 말에 레스 키시르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 거짓말입니다.”
마치 오늘의 날씨에 대해 말하는 듯, 평화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저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군 복무 중 여자와 합의하에든, 강제로든 관계를 맺은 적은 일절 없습니다. 암구호를 적에게 흘렸다는 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군 기밀이기에 상세한 정황은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일단 그렇습니다.”
마치 몇 번이고 혼자서 연습이라도 한 듯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말에 레티시아는 순간 당황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혹시나 했던 의혹이 사실이라고 정작 본인의 입으로 확인받으니 오히려 그녀는 사고가 정지되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진담인가.’
무미건조한 표정은 차라리 그가 지금 농담을 하는 것처럼 들리게 했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왜 이제까지…….’
인터뷰 한 번, 억울하다는 말 한 번,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진짜라면.’
그녀가 이 ‘진실’을 믿는다면, 이제 대체 이걸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사실, 다 거짓말입니다.”
그 순간, 산뜻한 목소리가 울렸다.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분위기가 그 가벼운 한마디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허탈함과 화, 그리고 안도감이 뒤엉켜서 레티시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면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으라고…….”
“그냥, 다 관두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말을 끊듯 레스 키시르가 말했다. 옅게 띤 웃음, 속을 알 수 없는 시선, 고저가 거의 없는 나직한 목소리.
“술을 마시면 좀 잊혀서 그랬습니다. ……끔찍한 실수였지요.”
거짓말이다.
“도망칠 때는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눈앞이 새하얗게 되어서 그냥 필사적으로 달렸습니다.”
거짓말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절대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루하루 후회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레스 키시르는, 그녀를 믿지 않기로 선택했다.
* * *
“……와, 등신 같아.”
달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떠나간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레티시아는 주르륵 벽에 등을 기대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녀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좀 생각하고 움직이라 그리 가르치려 했던 레오르나가 알았다간 아주 환장을 할 만한 행동이었다. 레티시아는 뭐라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낭패감과 부끄러움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뒤통수를 쾅, 쾅, 벽에 박아 댔다.
‘……당사자 말을 들어나 보고 결정해야 한다니.’
말은 번드르르하지.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레스 키시르 역시 그러할 수 있다. 린스베른 역시 진실을 모르고 있을 경우, 레스의 잘못이 그냥 불운한 오해였을 경우, 악의를 가지고 사실을 날조한 제삼자가 있을 경우. 여러 가지 변주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다.
그녀는, 고작 한 달 만난 레스 키시르의 말을, 오로지 그의 말만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불의는 밝혀낸 순간, 도의적 책임이 생긴다. 그리고 책임은 그녀가 지난 22년간 필사적으로 피하던 것이었다.
“공주님.”
그때, 똑똑,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테시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티시아는 대체 어떻게 일그러져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팔에 더욱 깊이 파묻었다.
“……테시라, 지금은 나 좀―.”
“공주님, 이걸 좀 보셔야 합니다.”
언제나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수석 비서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어 테시라가 내민 신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간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기사 제목을 읽자마자 레티시아의 얼굴이 휴짓조각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