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주님, 일어나셨어요?”
늘어진 커튼 너머로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뜨니 두꺼운 암막 커튼 너머로 창백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다 했더니 레스의 팔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어제 산책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온 후 서재에서 벽난로를 피워 놓고 책을 함께 읽다가 그대로 서로의 옷을 벗기고 뒹굴었다. 그 증거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훤히 드러난 남자의 어깨며 등줄기에 발갛게 남아 있었다.
“곧 나가.”
그 흔적을 손끝으로 하나하나 덧쓰며 레티시아는 소리 죽여 대답했다. 본래 조그만 인기척에도 화들짝 놀라며 깨곤 했던 레스는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이제는 제법 혈색이 돌아 발그스름했으며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조각같이 우아한 선을 되찾은 얼굴은 표정이 사라지니 소년처럼 앳되어 보였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조심스레 손끝으로 쓸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를 껴안은 팔에 꾹 힘이 들어갔다. 바짝 끌어당겨져 맨가슴에 고개를 묻자 닿은 피부를 통해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생각 없이 그 박동에 귀를 기울이자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평화롭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몸이 노곤하게 늘어졌다. 탄탄한 가슴에 고개를 비비자 잠결에 레스가 그녀의 머리 위로 입술을 눌러 왔다. 좀 더 조르듯 고개를 비비자 다시 한 번 키스가 떨어졌다.
다시 한 번. 또다시 한 번.
다시 눈이 감기며 잠이 몰려왔다. 테시라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사냥회 준비로 만나 봐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빌어먹을 총…… 이번에는 뒤로 넘어지지 않게 연습 좀 해야 하는데…….
‘일어나기 싫어…….’
한없이 몸이 늘어질 때였다.
“저…… 공주님.”
그녀를 깨우고 잠시 방을 나섰던 침방 시녀가 다시 조심스레 말을 붙여 왔다.
“린스베른 왕자님께서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평화로운 아침이 단번에 박살이 나는 소리였다. 레티시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레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린시는 머리가 없대, 양심이 없대?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이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에 밀고 들어와서 사람을 나오라 말라야?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
“……송구하오나 이후에 중요한 공무가 있기에 오래 기다리실 수는 없다 전해 달라 하십니다.”
결국, 레티시아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 * *
“누구는 중요한 공무가 없어?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서 지가 부르면 재깍재깍 대기하고 있어야 해? 내가 무슨 24시간 대기조야?”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남자의 맨살과 말랑말랑한 기분 좋은 곳에서 쫓겨나 옷을 입게 된 레티시아의 입에서 쉬지 않고 불평이 터져 나왔다. 주인의 기분이 저조한 것을 느꼈는지 예전 시녀들이 입을 닫은 채 손만을 부산히 움직였다. 그것도 손님이랍시고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좋은 향을 내겠다며 향수를 뿌리는 제 처지가 짜증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응접실을 갈아엎든가 해야지. 어딜 방문 요청장도 보내지 않고 멋대로 기어들어 와서 오라 마라……. 상판을 갈아엎을 인간 같으니라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린시의 그 보정 안 된 상판을 갈아 버리면 분노한 모왕이 그녀를 불러다 난리를 칠 것이다. 말로만 얻어맞으면 또 모를까, 그녀의 영지인 리베르탄의 무역세를 멋대로 조절해 버릴 수도 있다. 설마 고작 이것 때문에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이스칸타 3세는 자신의 외아들에 관해서는 상식을 포기한 면이 없잖아 있지 않은가. 그에 항의해 따질 수도 있다만 그녀가 모왕에게 대드는 거로 보이는 행동을 취하자마자 들러붙을 시선이며 소문들을 생각하자면……. 안 그래도 린시를 무시하고 레오르나와만 만난다고 파벌을 만든다느니, 왕을 몰아내려는 물밑 준비를 하고 있다느니 포기하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마당에.
‘앓느니 죽지.’
어차피 지난 22년, 린시의 뒤를 세심하고도 정성스럽게 빨아 주며 살아왔던 인생 아닌가. 한두 번 더 빨아 준다 해서 제 혀가 갑자기 썩어 들어가진 않겠지.
이를 벅벅 갈면서도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레티시아의 얼굴에는 꽃이 피어나는 듯 화사한 미소가 맺혔다.
“오랜만이야, 오빠! 와, 이게 무슨 일이래? 이런 이른 아침부터 오빠 얼굴을 다 보다니 오늘은 운수가 좋으려나?”
그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띤 린스베른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팔을 벌렸다. 생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그녀가 그 품에 안기자 그가 가볍게 그녀의 양 볼에 입을 맞췄다.
“너야말로 오랜만이다, 키샤. 하도 얼굴 보기 힘드니 잠시 짬을 내 봤어.”
“에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오빠는 바쁘잖아? 어머니께서 맡긴 일 하는데도 하루가 다 갈 텐데 굳이 나한테까지 시간 뺏기면 미안하지.”
“네가 워낙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니까. 내가 참석하는 행사가 한둘이 아니고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 이리 만날 기회가 없는지.”
“하하, 그러게.”
생고생을 하면서 기를 쓰고 피해 다녔는데, 만날 기회가 많았다면 속이 뒤집혔을 거다.
“안 그래도 누님이 네게 사냥회 준비를 맡겼다고 들었어. 큰 연회이니 여러 가지 복잡하고 까다로운 점도 많을 거다. 내가 아스완 백작 부인께 말씀을 드려 봤는데―.”
“오-빠, 내가 무슨 애인가? 샤프롱이 필요하게. 내가 할 수 있어. 안 그래도 오빠가 저번에 주최했던 사냥회를 보고 준비를 많이 했거든? 그러니까 오빠는 보고 놀랄 준비나 해.”
“그래도 네가 어리니 얕잡아 보고 피곤하게 하는 이들이 없잖아 있을 거야.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고―.”
“오빠아, 내가 오빠 동생인데 누가 감히 나를 얕잡아 봐? 그런 것들이 있으면 오빠한테 이르면 되지!”
“그래, 알았다, 알았어.”
소리 높여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 린스베른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몸을 물리는 척을 했다. 레티시아는 실시간으로 구멍이 뚫리는 듯한 위장을 맛도 느껴지지 않는 차를 들이켜며 달랬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웬만한 사교 모임이란 사교 모임은 다 주최해 봤다. 린스베른 본인은 물론이고, 그가 조언자라고 밀어 넣을 그 아스완 백작 부인이라는 여자보다도 한 열 배 정도 더.
다른 이들은 결코 그녀를 얕잡아 보고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들른 거였어? 이거 내가 다 미안하네. 바쁜 오빠 시간을 고작 그것 때문에 빼앗아서.”
“사랑스러운 동생을 위한 건데 뭐 이 정도야.”
하하, 웃음소리를 내는 오라비의 모습에 소리 없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소파에 느긋이 몸을 기대었다. 온 목적을 달성했을 텐데 왜 아직 린스베른이 저 무거운 엉덩이를 들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가 정말로 동기간의 오붓한 다과를 즐기겠다며 여기에 눌어붙어 있으려 할 가능성을 셈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있지?”
“누구?”
“그 녀석.”
그 한 단어만 다른 무게를 지닌 채 귀에 박혔다. 레티시아는 잔을 들어 올려 짐짓 무구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녀석?”
“레스 말이야.”
“아.”
“어떤 사이야?”
“왜? 오빠도 그 사람 소문이 안 좋으니까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게?”
“아니.”
달칵, 찻잔이 놓이는 소리가 나며 린스베른은 느릿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 탓이야.”
“……응?”
“레스가 그렇게 힘들어한 것.”
“무슨 말이야.”
절로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느끼며 레티시아는 결국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동생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린스베른은 꽉 양손을 마주 잡았다. 레티시아와 아주 닮은 연녹색 눈동자가 고뇌로 깊어졌다가 그녀를 고통스레 응시했다.
“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그의 가정 상황이 안 좋다는 거.”
“……뭐어.”
“아닌 척했지만, 장래에 대해서 걱정하며 많이 힘들어했어. 뷘터하우젠에서 나뿐이 아니라 다른 고위 귀족들과도 끈을 많이 만들어 두려고 했고. 천성이 나쁜 애는 아니니까 많이들 좋아했어. 그런데 태생이 태생인지라 그걸 가지고 문제 삼는 이들도 꽤 있었고.”
“…….”
“언제 한 번 밤중에 울더라. 자기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태생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건데 자기가 어떻게 더 노력해야 하겠냐고.”
레티시아는 지금보다는 어린 레스 키시르가 그리 흐느끼며 절규하는 모습을 떠올리려 해 봤다. 모든 것을 속으로 삼키기만 하는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그는 지금보다는 열 살은 더 어렸다.
“내 딴에는 도와줄 작정이었어. 나는 보좌관이 필요했고, 그는 좀 더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때까지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 명분도 충분했지. ……그게 그렇게나 그에게 부담스러운 일인지는 몰랐어.”
“그러니까 지금 오빠는.”
레티시아는 레스 키시르를 둘러싼 그 모든 추잡하고 악의적인 소문을 떠올렸다.
“그 소문이 다 사실이라는 거야? 암구호 누설부터 시작해서 직무 태만에, 주정에, 강간까지?”
“강간은 아니었어. 합의된 것이었고…… 아이가 생겼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나머지는 다 들어맞는다는 듯한 말이네.”
“그 녀석은 충분히 죗값을 치렀어. 다레즈 수용소에서 그 녀석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들으면…….”
꾹꾹 억눌린 이름 모를 감정을 다시 한 번 억누르며 린스베른이 말했다.
“내가 뭐라 해야 할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나는 그 녀석도 이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네가 네 애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는지 아니까, 너를 만난 게 그 녀석에게 뭐라 할 수 없는 행운이라는 걸 알긴 하지만 동시에 너는…… 내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그 말에 레티시아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