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레티시아는 솔직히, 처음으로 레스 키시르가 우는 걸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면처럼 얼굴에 들러붙어 버린 미소가 무너진 자리에 순간이지만 부서질 듯 섬세한 표정이 드러났다. 파르르 떨리며 내리깔렸던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눈꼬리가 살짝 습기를 머금고 붉어졌다가 한 번 느릿하게 깜박인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공주님이 부럽네요. 자신만만하게 권하실 만한 맛입니다.”
다시금 떠오른 옅은 미소는 지금까지의 것과는 어딘가 좀 달라져 있었다. 똑같은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레티시아는 순간 넋을 놓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님?”
“……그.”
혀가 어째서인지 굳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이유 없이 당황하며 그녀는 전투적으로 스푼을 쥐었다.
“원하면 데려가도 좋아!”
이유식을 시작으로 그녀가 22년간 입에 넣었던 모든 것을 만들어 왔노라 자부심이 대단한 로페르가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었다. 동그랗게 눈을 떴던 레스 키시르는 곧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공주님, 저희 하숙집에는 제대로 된 주방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우리 집에 오라는 말이었어. 로페르는 죽만이 아니라 카나페도 잘해. 샌드위치도 맛있고, 뭐든 말만 하면 만들어 줄 거야!”
“이미 충분히 공주님 저택의 식량을 축내고 있는데요.”
“그 정도로 축날 재물 아니다? 나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야?”
그에 결국 레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예, 레티시아 레반스타인 공주님이시지요.”
“그래, 그리 알아 모시도록 해.”
턱을 도도히 치켜들고 헛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레티시아는 레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핏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카르파초를 보고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한 것과 나이프나 포크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 걸 보고 뭔가가 잘못된 듯하다는 생각은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말라 있던 것에 그 영향도 없진 않은 듯했다. 다행히도 핏기가 없는 죽은 잘 먹었고, 스푼은 별문제 없이 쥐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핑거 푸드도 별 거부감 없이 먹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많이 못 먹네.”
죽의 양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는데 반쯤 먹자 현저히 스푼 질이 느려지더니 3분의 2쯤 먹었을 때는 먹는다기보다는 거의 욱여넣는다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맛있는데 본래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합니다.”
“그러면 좀 걸을래? 호박 보러 가자.”
그 말에 풋, 또다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지 시선을 살짝 피한다.
“호박을 좋아하셨군요.”
“오늘부터 좋아하려고.”
그 뻔뻔한 말에 남자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스 키시르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레티시아는 무심코 자신의 앞에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길게 뻗어진, 굳은살이 빼곡히 박인 손. 조심스레 그 위에 손을 얹으며 몸을 일으키자 자연스레 팔을 돌려 팔짱을 끼게 한다. 올려다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려한 얼굴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찬란한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햇살같이 반짝이는 미소가 어렸다.
‘……아, 나 망한 듯.’
얼마 전부터 꽤나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이제는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는 예쁘장한 얼굴에 참 약했다.
더 이상 보고 있다간 정말 무언가가 뿌리째로 흔들릴 것만 같아서 그녀는 다소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부터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닌 남자는 별말을 더하지 않고 그 걸음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로 양쪽으로 가득 심어진 은행나무의 노란 잎 사이로 가을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오는 정적 속, 닿아 있는 피부를 따라 레스 키시르의 체온이 느껴졌다. 올려다보니 미소를 짓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풀려 있는 옆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긴장을 내려놓은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레티시아는 그가 지금까지 그녀 앞에서 단 한 번도 긴장을 푼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의식이 없는, 잠이 든 상태에서도 레스 키시르는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듯했다.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보면 볼수록 시선을 끌어당기는 얼굴이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집요하게 관찰하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레스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주님, 걸으실 때는 앞을 보세요.”
“하지만 옆에 훨씬 더 보기 좋은 게 있는데.”
“넘어지십니다.”
“경이 잡아 줄 거잖아?”
웃음기 어린 말과 함께 레티시아는 팔짱을 끼었던 손을 떼어 레스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큰 손에 퍼즐 맞추듯 밀려 들어가며 꼭 힘을 주어 쥐었다.
레스는 마치 낯선 것을 보듯 손깍지가 끼워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곧, 맞잡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러네요.”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가 묘하게 행복해 보여 레티시아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지는 듯했다. 혀가 농밀하게 얽히는 딥 키스부터 시작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살까지 섞은 사이인데 어째 스킨십의 진도는 반대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성인식을 치른 후에는 성인 남자와 손만 잡고 만족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
기분이 좋은 것도 같고, 어딘가 답답한 것도 같고, 어색한 것도 같아 슬그머니 손을 빼려 하자,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으려는 듯 남자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 손에는 결국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그녀의 손은 허무하게도 쉽게 빠져나가 버렸다. 아까까지 미지근한 온기가 닿아 있던 손끝이 갑자기 휑해진 듯해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매만졌다.
올려다본 레스 키시르의 표정은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그 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느끼는 것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람일까. 결국, 레티시아는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까 그녀가 잡았던 것보다, 그가 잡았던 것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시선이 맞닿았다. 자신이 온전히 담겨 있는 그 따뜻한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무심코 그 눈꼬리에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공주―.”
레티시아는 발꿈치를 한껏 들어 올려 뭐라 입을 열려 하는 레스 키시르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지 감겨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연약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붉은 기가 남은 눈가에 몇 번이나 반복해 살짝살짝 입술을 떨어트리며 그녀는 남자의 어깨를 지그시 힘주어 눌렀다. 레스는 그 손길 아래 온순하게 몸을 낮췄다.
한껏 발돋움해도 수평이 되지 않던 시선이 차차 낮아져 그녀를 올려다보는 형국이 되자 레티시아는 이번에는 어깨에 지그시 힘을 주어 뒤로 밀었다. 천천히, 남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샛노란 은행잎 위로 레스 키시르가 쓰러졌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눈과 시선을 맞추며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여 남자의 몸 위에 체중을 실었다. 코와 코가 맞닿자 반사적으로 그가 눈을 감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술을 포개며 뺨을 어루만지자 레스가 손바닥에 뺨을 비벼 왔다. 손을 뻗어 살짝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자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할까.’
반복해서 어루만지는 뺨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잘못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남자는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욱 시선을 끄는 면이 있었다.
하자고 하면 싫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레스 키시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거부한 적이 없다.
“안 하십니까?”
그러나 단정히 감겨 있는 그 눈이 뜨이며 그리 질문이 돌아오자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럼.”
왜 저랑 시간을 보내십니까?
뒤가 생략된 질문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저를 그녀 원할 때마다 편리하게 불러다 쓸 수 있는 자위 도구 취급하는 듯한 말이었다. 그렇게 여겨져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불러냈을 때마다 해 댔긴 했지만.
“그냥.”
의문을 담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다시 한 번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그의 옷을 벗기는 대신 조심스레 그의 위에 몸을 기대어 목을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그렇게.
그리고 남자가 조심스레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등을 끌어안았을 때, 레티시아는 자신이 옳은 답안을 골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