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헉.”
의식은 마치 절벽에서 던져진 듯 갑작스레 돌아왔다. 심장이 덜컹하는 아찔함과 함께 레스는 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낡은 목제 천장.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비강으로는 짙은 약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순간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에 잠식되어 숨이 가빠지려 할 때였다.
“깼냐?”
무덤덤한 목소리가 제멋대로 날뛰려던 불안을 잠재웠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또렷해진 시야에 세자르 메힌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들어왔다.
“……와, 세자르다.”
“뭐가 ‘와, 세자르다’냐.”
툭 내뱉은 말에 퉁명스러운 대꾸와 함께 물컵이 탁 소리 나며 놓였다. 더듬거리며 그걸 쥐어 마시자 그제야 쩍쩍 갈라져 있던 목구멍이 아릿하게 아파져 왔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밖은 해가 쨍쨍했다.
‘레파르 후작과 마주했던 것이 한밤중이었으니…….’
머리가 삐걱거리며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던가, 이틀이 지났던가. 혼자서 끙끙거리는 꼴을 못 봐 주겠는지 세자르가 그의 맞은편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흘 꼬박 잤다, 너.”
“음…… 생각보다는 오래 잤네. 만찬에서 어떻게 돌아온 거야?”
“레파르 후작이 데려다줬어. 머리를 깨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말로만 지껄이지 말고 의사나 불러 오라고 했지.”
“불러 봤자 들을 말은 똑같은데 뭐 하러.”
“조슈아 레파르가 알았다면 길길이 뛰었을 거다. 비무장에, 반항할 생각도 않던 이를 상대로 그리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한 것이 제 아비라는 걸 알면.”
“거참.”
의미 없는 가정이네.
그리 말하려던 것을 애써 참으며 레스는 그저 웃었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대못을 찔러 넣는 듯한 고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음, 내가 맞을 짓을 하긴 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냥…….”
대충 얼버무리자 세자르는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펴 들었다. 그 사려 깊은 무시에 감사함을 느끼며 레스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생각할 시간을 다오.’
그가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기 전, 레파르 후작은 그렇게 말을 했다.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가시밭길을 피하고 현 상태에 온존하고자 하는 본능 중, 어떤 것이 이길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은?”
“아프다 하니 직접 보러 오셨어. 나중에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나 드려라.”
“그래야지.”
남겨 두고 왔던 공주에게 신경이 미치자 가슴 한편에 둔중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변명을 하자면, 결코 기절할 생각은 아니었다. 데려올 필요도 없는 그를 에스코트랍시고 달고 와서 별별 구설수에 다 시달렸을 게 뻔한데 이젠 아예 양해도 구하지 않고 먼저 사라져 버리다니. 레파르 후작이나 그 시종이 공주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현실적으로 그런 배려를 기대하긴 힘들겠지.
공주가 아니었으면 그는 무언가를 해 보겠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그 승전 연회의 밤,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공주의 애인이라는 직위가 없었으면 그가 레파르 후작을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런데 그가 자기를 즐겁게 해 달라는 공주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했던가 하는 의문에는 부정적이었다.
“세자르.”
“음?”
“너는, 좋아하는 게 뭐야?”
며칠을 침대에만 누워 있어서 뻑뻑한 몸을 조심스레 일으키며 묻자 세자르는 미간을 찡그렸다.
“네 녀석 뒤치다꺼리할 필요가 없는 평안하고도 소소한 일상?”
“그거 말고.”
“……항공모함?”
“어떤 점이?”
“갑자기 뭐야?”
“뭐든.”
물로 적신 천으로 얼굴과 상체의 땀을 닦아 내며 묻는 말에 세자르는 꺼림칙하단 표정을 지었으나 그럼에도 읽던 책을 덮고 순순히 대답했다.
“내가 너를 헤레즈 앞바다에 처넣으면 너는 뜰까, 가라앉을까?”
“가라앉겠지?”
“그래. 그런데 네 몇만 배는 될 철 덩어리가 바다에 뜨는 거야. 뜨기만 하는 줄 알아? 전략상 완벽한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 생존, 작전이 가능하지. 록허트의 계승 전쟁을 생각해 봐. 주먹만 한 섬나라인 에르디나가 흑해를 지배하고 서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킨 원동력은 바닷길을 완벽하게 틀어쥐어 무역과 대륙 봉쇄를 동시에 가능하게끔 했던 해군이 있었기 때문이지.”
레스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의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갔다. 에르디나의 철포 함대를 동경해 대륙의 반을 건너 란스타인의 뷘터하우젠 왕립 사관학교 유학생이 된 세자르에게 레스는 그 에르디나의 항공모함들은 퓌레의 공습 부대를 맞아 움직이는 과녁판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냐는 잔혹한 진실을 들먹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기가톤급 전함에는 미사일을 몇 개나 실을 수 있는 줄 알아? 일단 실어 나를 수 있는 베틀리온급 전투기가 우선 88기 정도 된다고 치면 이 전투기가 각각 열두 개의 레아급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다고 치고, 그것과는 별개로 선상에 대함 미사일 12발에, 대공 미사일 188발이니 이 정도면 바다로 몰려와도, 하늘로 몰려와도 상대할 방법이 없어져. 이런 움직이는 요새를 가지고 해안 도시에 폭격이라도 시작해 봐. 위치가 고정된 육상 기지는 과녁 수준을 면할 수가 없지. 제공권, 제해권 유지에는 솔직히 항공모함을 제외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거야.”
세자르가 지난 몇 분간 쏟아 낸 말의 양은 보통 그가 하루에 하는 말의 양보다 두 배는 많을 듯했다. 아예 사람이 바뀐 듯 눈을 번뜩이며 하는 말에 레스는 어색하게 웃음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엔진의 구조와 순항 미사일의 위력으로 이어지자 쏟아지는 전문 용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러니 공주가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을 했을 때 믿지 않았던 거다. 그는 자신의 호오를 말할 때 세자르의 반의반이라도 성의를 보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대충 고맙다고 말하며 집을 나선 그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공주에게 감사 인사와 사과는 해야 했고, 얼굴을 보면 저번의 그 질문을 또 이어서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러 가지로 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저는.”
숲을 좋아합니다. 일반적인 숲에는 나무가 몇 그루나 있는 줄 아십니까? 브륀셀의 가장 대표적인 숲인 라몬트에는 나무가…… 나무가…….
숲을 좋아합니다. 공주님께서는 숲에 들어가면 길을 잃으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헤매지 않고 빠져나오실 수 있으실…….
……숲을 좋아합니다. 숲은 모든 생명의 보고이며 라몬트 숲은 예로부터 브륀셀의 가장 큰 기초 산업인 임업과 조선업의 근간이 된 나라 부흥의 가장 큰 주춧돌이 되었으며…….
“오셨습니까, 키시르 경.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절망적이다.
별 거지 같은 이유만을 늘어놓았을 뿐 공주의 질문에 근본적인 답은 마련하지 못한 채 발걸음은 이미 공주 저 응접실에 당도해 있었다. 어느새 제 얼굴을 외운 공주 저의 총괄 집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묻는 말에 레스는 억지로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이며 오는 길에 샀던 해바라기 한 다발을 내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 관리가 소홀하여 공주님께 저번에 크게 폐를 끼쳤습니다. 사과하고 싶은데 잠시 뵐 수 있겠습니까?”
“찾아오시면 언제든 뵐 수 있게끔 지시를 해 두셨습니다. 지금 서재에 계시니 따라오시지요. 꽃은 직접 전해 주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인자한 총괄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는 그를 안내해 회랑을 가로질렀다. 회랑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공주의 취향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것. 반짝이는 것. 시선을 잡아끄는 것.
따스한 가을 오후의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너머로 스며들어 흰 대리석 바닥을 오색으로 빛냈다. 흰 대리석이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벽을 장식한 태피스트리에 수놓인 신과 요정들이 희로애락을 노래했다. 공주가 보는 세상은 이렇듯 찬란하고, 아름답고, 반짝이는가 싶었다. 이 저택 안의 따스한 평화로움이, 고요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차분하게 어루만지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어, 경! 왔어?”
그리고 그 정점을 찍는 공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반갑게 맞았다.
황금빛으로 부서져 가는 늦은 오후의 햇살에 둘러싸여 공주가 웃었다. 반가운 듯 웃음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난다.
“몸은 어때?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미안해.”
아름다운 것. 반짝이는 것. 시선을 잡아끄는 것.
꼭 자신 같은 것들만 좋아해 자신 같은 것들을 주위에 모아 둔 이 작은 낙원에서 공주는 정말이지, 온갖 비현실적인 것들을 모아 둔 꿈 같았다. 그는 자신이 겨우겨우 찾아낸 좋아하는 것을 공주가 이해할 수나 있을까, 자포자기를 닮은 심정이 들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그날은 몸이 안 좋아서 공주님께 정말 폐를 끼쳤습니다.”
“덕분에 나는 꽃도 받았잖아. 이러고 있으니 정말 가을 같다.”
해바라기를 내밀며 그리 말하자 공주는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 듯 그를 가만히 보다가 결국 살랑살랑 웃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꽃을 장식할 곳을 찾아 서재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레스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요하게 캐묻지 않아 주는 공주가 고마웠다.
“모처럼 왔는데 좀 이야기나 할까? 아, 마침 저녁 준비를 시키려던 중이었는데, 같이 먹을래?”
그 말에 무심코 편안하게 풀어졌던 레스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키시르 경?”
그 기색이 수상하게 느껴졌던 걸까. 공주의 눈이 흐려졌다. 그 순수하게 걱정 어린 시선을 앞에 두고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이미 저녁을 먹고 왔습니다.
몸이 아직 안 좋아서 식사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은 이후에 용무가 있는지라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변명. 변명. 변명.
지금 어떻게 넘어간다 해서 앞으로 식사 초대가 사라질 것도 아닌데 핑계를 대서 거절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저, 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핑계를 대서 거절했는데 얼마나 더 거절할 수 있을까.
“몸이 안 좋으면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요.”
결국, 그는 조금 조급하게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동석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는, 공주가 필요했다.
* * *
“비프 카르파초와 시금치 아란치니입니다.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록산 234년 산 레드 와인이 있지?”
“이런, 드디어 그게 테이블에 오르는군요. 메인에 정성을 쏟지 않으면 와인이 아까워지겠어요.”
“어머, 로페르가 와인에게 눌릴 걸 걱정할 수준이야?”
“예의상 한 말이었습니다, 당연히.”
공주와 주방장 사이의 화기애애한 잡담은 레스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다란 직사각형 디너 테이블 위에는 그가 가져왔던 해바라기가 크리스털 물병에 담겨 장식되었다. 새하얀 대리석 테이블 위로 짙은 푸른색 식탁보가 덮이고, 그 위로 흰 접시와 투명한 와인 잔과 거울처럼 빛나는 식기가 놓였다.
포크가 큰 것, 작은 것 두 개, 나이프가 하나, 스푼이 큰 것, 작은 것 두 개.
달칵, 접시가 부딪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얇게 저민 고기가 놓였다.
“와인을 따라 드릴까요?”
“……아니요, 물로.”
‘키시르.’
입 안이 바싹 말라 가는 듯했다. 애써 미소를 띠며 와인을 따라 주려는 주방장을 거절하고 눈을 지그시 감아 눈앞에 들이밀어진 시뻘건 고기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이는 식기를 애써 뇌리에서 지우려 했다.
‘해부를 하다 보면 말이야, 배가 고파진다는 걸 알아?’
“그러고 보니 경과 이렇게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네? 다과는 한두 번 같이 한 것 같은데 어쩌다 지금까지 그럴 기회가 없었지?”
공주의 경쾌한 목소리, 간수의 느긋한 목소리. 쓱, 쓱, 칼이 갈리는 소리. 타들어 가는 시가의 매캐한 향.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무언가 대답을 했다. 공주가 소리 내어 웃는 걸 보니 대답이 적절했던 모양이었다. 시선을 애써 아래로 내리지도, 공주의 접시에 올리지도 않은 채로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오른손을 들어 테이블 위의 나이프를 쥐고, 왼손을 들어 테이블 위의 포크를 쥔다. 왼손에 힘을 주어 고기를 찍고, 오른손을 앞뒤로 움직여, 썬다. 금속이 근육을 자르는 특유의 느낌과 함께 혈향이 코를 찌른다. 기계적으로 왼손을 움직여 입을 벌리고, 고기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을 다물고, 씹는다.
옅은 구역질이 나 그는 입을 냅킨으로 닦는 척하면서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입 안이 마비된 듯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 촉감과 질감과.
‘사람의 근육과 피부를 자르는 게 짐승의 고기를 자르는 거랑 정말 별 차이가 안 나니 뇌가 착각하거든.’
시야가 좁아지며 새까맣게 물들었다. 금세라도 쥐고 있는 나이프가 그의 입 안을 썰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가 연기에 숨이 막혔다. 쓱, 쓱, 마치 스테이크를 썰 듯 간수는 그의 발목을 뒤에서부터 썰었다.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썰려 나가고 드러난 비복근을 마치 고기 찌르듯 쿡쿡 찌르며 간수는 울컥울컥 피가 쏟아져 나오는 상처를 담뱃불로 지졌다.
‘내일은 여기야.’
친절하게 정강이뼈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다행히 간수가 약속한 그다음 날, 왕태녀의 군대가 급습해 왔다. 꼬박 일주일을 앓아누웠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지웠다. 떠올리지 않으려 하면 마치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기라도 한 듯이.
순간 씹어 삼켰던 고기가 견딜 수 없이 역해 그는 급히 냅킨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풀숲에 고개만 처박고 안도하는 타조 같은 짓거리였다. 차라리 계속 꾸역꾸역 밀어 넣다 보면, 이 끔찍함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 보면 언젠가는 이 모든 게 무뎌지는 날도 오겠지.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무시하고 그가 다음 고기 조각을 찍어 올렸을 때였다.
“리스티.”
공주가 난데없이 식사 시중을 들던 하녀를 불렀다.
“네, 공주님.”
“갑자기 죽이 먹고 싶어졌어. 생각해 보니 양고기는 어제도 먹었잖아.”
가볍게 내뱉은 말에 하녀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으나 당황하는 것이 역력했다. 레스는 생글거리면서 웃는 공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양고기로 대체 무슨 요리를 할 예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뭐든 준비 과정이 보통 오래 걸릴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직전에 바꾸라 하면 주방에서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닐 테다. 귀족들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그런 면에서 공주는 대단히 무던했다. 고용인들을 쓸데없이 곤란하게 할 성격이 아니다.
“주방장에게 말해서 다른 메뉴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응. 아, 맞다. 어제 점심으로 내왔던 호박죽 아직 좀 남아 있어?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
“예, 주방에 전해서 그쪽으로 준비시키라 하겠습니다.”
“응응, 부탁해.”
어차피 명은 내려졌고, 공주가 그걸 철회할 기미도 보이지 않자 하녀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이 자리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공주가 깨끗이 비운 식기를 물리자 예법에 따라 하녀들이 레스의 앞에 놓인 접시 역시 깨끗하게 치웠다. 메뉴가 죽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스푼 하나를 남기고 식기 역시 깨끗하게 물렸다.
“공주님, 갑자기 왜…….”
“키시르 경, 호박 좋아해?”
“예?”
“지금 호박이 제철이거든. 우리 주방장은 좀 정석적인 사람이라서 자기 음식에 들어갈 재료는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박박 우기니까 진짜 맛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예에.”
“그래서, 호박 좋아해, 싫어해?”
나는 호박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호박이 뭔지 생각해 내는 데도 한참 걸렸다. 사관학교 때는 잘 기억도 안 나지만 군에 있을 때나 제대한 지금은 식재료라고는 주로 감자, 채소, 닭, 빵……. 녹색과 하얀색 이외의 것을 먹어 본 지 꽤 오래되었다.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됐네! 기대해. 로페르의 음식은 진짜 맛있어.”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모습에 레스는 이게 그렇게 좋아할 만한 일인가 싶다가도 공주가 좋아하면 됐지 않나 싶어 안도했다. 왜 호박을 싫어하지 않는가를 묻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말씀하셨던 호박죽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방장이 죽을 접시에 받쳐 들고 등장했다. 와아, 와아 소리를 내며 공주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모습에 어딘가 불퉁해 보였던 주방장의 얼굴도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레스는 멍하니 눈앞에 놓인 샛노란 죽을 바라보았다. 날이 없는 스푼을 들어 가득 뜨자 크림같이 부드러운 죽 위로 이름을 알 수 없는 견과류가 뿌려져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죽을 입가로 가져가 한 입 먹었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운 단맛이 퍼졌다. 그냥 액체와는 다른, 그보다는 좀 더 점성이 있는 걸쭉한 액체 안에 무언가 자잘하게 씹히는 것들이 있었다. 군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어딘가, 익숙하기도 한 맛이기도 했다.
생각이 거기에 닿았다가 아, 하는 탄성이 흘렀다. 혀가 맛을 제대로 느낀 것은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 향을 느끼고, 맛을 음미하면서 그 어두컴컴한 독방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
생각이 거기에 닿자 사고가 멈췄다. 턱 하고 걸려 버린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어느 순간 또 툭, 하고 매끄럽게 돌아갔다. 말이 이성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저번에 물어보신 거.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공주는 놀란 얼굴이었다. 본인이 뭘 물어봤는지 기억조차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속을 앓았는지도 눈치조차 채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좋았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상관없었다.
“어렸을 때 본가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취미로 몇 가지 작물을 키우곤 하셨습니다. 정원 일에는 영 소질이 없으셔서 심으면 죽고, 심으면 죽고 그랬는데, 어째서인지 호박만큼은 안 죽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기억이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다. 쨍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던 황금빛 해바라기의 벌판. 태양을 닮은 커다란 꽃들이 새파란 하늘 아래 만개하고 그 사잇길을 어머니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채로 앞서 걸으셨다. 그런 그녀의 뒤를 그는 형들과 다 같이 사이좋게 호박을 하나씩, 해바라기를 한 아름씩 안아 들고 쫓았다.
“저희가 아플 때면 그 호박을 가지고 죽을 끓여 주셨습니다.”
“와, 어머니가 직접?”
“아니요. 어머니가 아니라, 부엌일을 도와주시던 분이.”
“뭐야, 그거.”
공주의 웃음소리가 종처럼 울렸다. 그 맑은 소리에 정수리가 정으로 찍혀 내리듯 아팠다.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아마 저랬던 것 같다.
“……그걸, 좋아했던 것, 같습, 니다.”
말을 애써 쥐어짜자 눈가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자꾸만 솟아오르려는 감정을 익숙하게 억누르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푼을 들어 죽을 다시 한 모금 입 안에 떠 넣었다.
달콤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