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46)

2.

“우와아아아!”

관중의 열광과 함께 선두의 다섯 마리의 말이 전속력으로 트랙을 돌아 결승점으로 돌진했다. 뙤약볕이 내리쬐어 바짝 구워져 버린 레이스 트랙 위로 말굽이 내리찍히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안쪽의 12번 마(馬), 앞으로 쭉쭉 치고 나옵니다! 선두에는 3번 마, 8번 마…… 이 순간에! 아웃 코스로 빠르게 돌진하는 12번 마! 순위가 뒤집히나요! 이대로 추월하나요! 코스를 좁히는 3번 마, 선두를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아이고! 넘어졌습니다!]

“크아아악!”

“우와아아!”

“좋았어!”

“죽여 버려!”

핏대가 돋을 정도로 확성기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해설자의 목소리를 집어삼키며 일대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선두를 달리던 흰 말이 다리를 삐끗하며 넘어지자 후미의 말들이 당황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말들이 넘어진 말들과 엉켜 한 덩이가 되어 구르고 아슬아슬하게 참사를 피한 말들을 진정시키는 기수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선두의 두 말은 이때를 틈타 더욱 속도를 올려 내달렸다.

[선두는 이제 3번 마, 12번 마, 9번 마! 그리고 대망의 1위는…… 이게 무슨 일입니까! 12번 마! 무명의 다크호스입니다! 모든 관중을 경악케 하는 우승자는 12번 마―! 기적 같은 역전승입니다!]

끄아아아아―!

허공에 주먹질하며 절규하듯 포효하는 우승마의 기수의 모습에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쏟아졌다. 환호에 날뛰는 이들, 시뻘게진 얼굴로 고래고래 욕설을 내지르는 이들,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앞만 바라보는 이들.

VIP석의 차양 아래에서 레티시아는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멀쩡한, 경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피가 끓게 하는 레이스를 레스 키시르는 마치 식물원 꽃 구경하는 것처럼 관람하고 있었다. 저 밑에서 목숨 걸고 말을 달렸던 이들이 알았다면 거품 물고 뒤집어졌을 일이었다.

‘내가 레스 키시르에 대해서 아는 것.’

연애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동정 언니에게 연애에 대해 훈수를 들었다는 사실이 꽤나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고작 열다섯 살의 나이로 국정 운영에 발을 들였던 왕태녀가 아닌가. 한 번 믿어나 보자는 생각에 그녀는 자신이 레스 키시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되짚었다.

꽤나 유복했으나 지금은 쫄딱 망한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상경한 고아.

아등바등 살아남기 위해 했던 피나는 노력과 재능으로 많은 교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뷘터하우젠의 총아.

최전선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른 속도로 진급해 왕자의 보좌관까지 맡게 된 젊고 유망한 장교.

……그리고 소문만 무성한 채 부상으로 떠밀리듯 은퇴한 배신자.

“공주님?”

시선이 느껴졌는지 레스 키시르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기울어지며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제 제법 뷘터하우젠 입학 시의 증명사진과 비슷하게 닮아 가는 얼굴을 레티시아는 가만히 시선으로 훑었다.

“경마는 별로 안 좋아하나 봐?”

“싫어하진 않습니다. 다만, 접할 기회가 없었다 보니 좀 낯설어서요.”

“뷘터하우젠에서도 승마는 가르치지?”

“저렇게 마구 달리게 하지는 않지만요. 타게 된다면 말보다는 군용 차량인데, 둘 다 비싸니 운전병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교양으로 배웠습니다.”

학교에 대해 말하는 얼굴에서 조금이나마 감정의 편린이 느껴질까 싶었으나 그런 건 없었다. 서류상으로 봐서는 뷘터하우젠의 그 5년이 그나마 가장 편하고 재미있는 시기였을 텐데 그는 차라리 재무제표를 읽는 게 더 흥미진진하다 싶은 듯한 낯이었다.

“그러고 보니 뷘터하우젠은 전투과 학생들에게 특수 보직을 요구한다고 하던데, 맞아?”

“예. 특수 병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필요할 때는 특수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서요.”

“경은 특수 보직이 뭐였어?”

“저격병이었습니다.”

그 특수 보직을 살려 레스 키시르는 므네시바 침투 작전 때 제 소대를 이끌고 적군 참모 총장을 저격해 3년 만에 중위로 진급했다. 그 후 로케르트 철수 작전 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중대를 끌어모아 적군을 기습하여 혼자서 나흘 만에 쉰다섯의 적군을 사살했고, 레만 공방전 때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50일 동안 보급선을 지켰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는 아주 이례적으로 2년 만에 대위로 진급했다.

배신의 소문이 들려오기 전의 레스 키시르는 뷘터하우젠은 물론 란스타인의 모든 사관학교 학생들이 꿈꾸던 이상이었다.

“경은…….”

그 유명한 전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했던 말은 그대로 목구멍에서 사그라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은 그가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지, 현재의 추락을 상기해 괴로울 뿐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깍지 껴 마주 잡은 손을 무심한 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레스 키시르는 입을 열었다.

“일간지에서 공주님에 관한 기사를 워낙 많이 써 대서 가끔은 제가 공주님을 잘 아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

“마치 공주님을 도박, 난교, 파티에 중독된 쾌락주의자처럼 묘사하곤 하는데 그런 것 치고는 공주님께서는 경마를 별로 즐기지 않으시는 것 같더군요.”

“뭐, 그렇지. 안 그래도 매일 하는 게 숫자 놀음, 확률 계산인데 취미 생활에서까지 일하는 기분이 들잖아.”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는 왜 별로 좋아하시지도 않는 곳에 걸음을 하시는 겁니까?”

“……아.”

레스 키시르를 데리고 공연장, 미술관, 연주회나 만찬에만 줄곧 다녔던 것이 한 달도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가던 데를 계속 다녔을 뿐이다. 그걸 깨달아 남자가 좋아할 만한 곳에도 가 볼까 해서 찾았던 곳이 오늘 온 경마장과 그제 갔던 테니스 경기장, 한 일주일 전에 갔던 카지노였다.

“……경이 좋아할지도 몰라서?”

“……공주님.”

“키시르 경.”

제가 좋아하는 건 의미 없고 공주님이 좋아하는 게 제가 좋아하는 거니 그냥 하던 대로 공주님이 하고 싶은 거나 계속하세요, 라는 논조의 말이 이어질 것 같은 남자의 표정에 레티시아는 재빨리 말을 끊었다.

“경은 좋아하는 게 뭐야?”

그 말에 레스 키시르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 버리는 게 보였다. 한동안,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레티시아는 멍해진 금빛 눈동자가 미로를 헤매듯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허공을 응시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열렸던 입술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닫히길 반복한 지 몇 번. 침묵이 길어질수록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호흡이 얕아졌다. 소리 없이 목이 졸리는 듯 한동안 입을 벙긋거리다가 겨우 그가 입을 열었다.

“……숲이요.”

“숲?”

“숲속을 산책하는 걸 좋아합니다. 주위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평화로워서.”

“그리고?”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해요.”

“어떤 책?”

“다른 나라의 이야기요. 역사서도 좋아하고…… 로메르 제국의 역사서는 학교 다닐 때부터 계속 읽었습니다.”

“또?”

“새요.”

“어째서?”

“……그냥, 그냥,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되어서…….”

“키시르 경.”

듣고 있자니 제가 더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결국 레티시아는 어조를 강하게 하여 끝없이 이어지려는 말을 끊었다. 어딘가 멍한 표정의 레스 키시르가 시장통에 혼자 내팽개쳐진 미아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경이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꽤나 무례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으나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낯이 그녀의 손에서 억지로 달했던 그 밤과 지독히도 닮아 있어 레티시아는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그렇지 않습니다.”

레스 키시르는 그저 기계적으로 부정할 뿐이었다.

* * *

공주의 말은 저주같이 그를 따라붙었다.

‘그건, 경이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그의 호오(好惡)가 언제부터 중요한 것이 되었나.

야전 병원에서 눈을 뜨기 전의 기억은 모조리 모호한 안개 속에 처박힌 듯했다. 레스는 꽤나 힘겹게 그 시절의 일을 떠올리려고 했고, 실패했다. 조각조각 찢어진 기억은 떠올리려 할 때마다 거부 반응을 먼저 일으켰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목이 졸리는 듯해 숨이 막혔다. 그 뿌연 안개 속에서 그는 손가락 하나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키시르 경? 몸이 안 좋으신가요? 안색이 나쁜데요.”

어느새 창백하게 변해 버린 안색에 만찬의 호스티스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붙였다. 그에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알코올이 조금 강했던 듯합니다.”

“저런. 조금 앉으시는 게 어떻겠어요? 공주님께서 돌아오시려면 좀 시간이 걸릴 텐데.”

“리튼의 셰리주가 그렇게 유명하더니 이유가 있더군요. 욕심부렸던 제 탓이니 벌 받는 셈 치고 서서 기다리지요.”

“어머?”

직접 담근 술을 칭찬하자 부인은 기분 좋은 듯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에 예의 바르게 마주 웃어 주며 레스는 파티 홀을 티 나지 않게 훑었다.

공주는 자신이 한 말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본래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거의 이틀 걸러 가며 사교 모임에 그를 동반하고 갔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수군대는 소리는 여전했다. 몇몇은 제 대대를 전멸로 몰아넣은 그를 감싸는 그녀의 행동을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다.

‘공, 그런 말은 훈장을 수여한 우리 어머니한테 가서 해.’

그 한마디로 대부분의 비난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왕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란스타인 국군의 수장은 여전히 왕이었다. 그리고 국회는 왕위 권위를 특수법이라는 조항을 앞세워 존중했다.

무엇보다, 그를 감싸고 도는 이가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었다. 왕국 제일의 거부인 그녀를 거슬렀다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불이익은 둘째 치더라도 많은 이는 이 아름다운 막내 공주를 사랑했다.

공주가 싸고도는 새 애인을 공격했다가 공주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에게 얽힌 추문을 꽤 빨리 잊었다. 다른 자극적인 사건은 계속 터지고 있었고,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대대원들은 많은 수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고작 삼백 명이다. 인간의 사고는 두 자릿수가 넘는 목숨의 무게를 실감하기 버거워한다.

283명.

매일 몇백 명의 사상자가 보고되는 전장에서 283명의 희생자들은 그저 또 다른 수치일 뿐이다.

호스티스의 명랑한 웃음소리에 마주 웃고, 그녀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럴듯한 몇 마디를 대꾸랍시고 내뱉으며 레스는 등 뒤로 돌려 마주 잡은 팔목을 세게 긁었다. 긁어도 긁어도 어째서인지 아프지가 않아서 더욱 손톱을 세우며 흉터를 헤집었다.

‘키시르.’

호스티스가 양해를 구하고 담뱃불을 붙였다. 느릿하게 타들어 가는 새빨간 불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담배의 매캐한 연기 사이로 살이 타들어 가는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네가 버텨 봤자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

손톱이 더욱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머리가 계속 몽롱해져 그는 이제는 입 안의 여린 살을 티 나지 않게 깨물어 댔다.

‘……당신이 옳았어.’

지금 와서는 간수의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이 옳았어.’

자학하듯 반복해서 인정하면서 레스는 입 안을 더욱더 세게 깨물었다.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입 안에 핏물이 고였다. 제 피가 서서히 발끝에서부터 차올라 익사하는 듯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드디어 목표하고 있던 이가 움직임을 개시했다.

“부인, 역시 잠시 바깥바람을 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물론이에…… 키, 키시르 경, 손목 부분에 피가……!”

화들짝 놀라며 하얗게 질리는 여자의 모습에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곤 그는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빠르게 그 자리를 떴다.

나이 지긋한 후작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후로 눈에 띄게 나이를 먹은 듯했다. 반 이상 새하얗게 새어 버린 적갈색 머리칼을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지팡이를 쥔 후작은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었다. 저택에 칩거하며 사교계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오늘 만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이가 찬 막내딸의 상대를 물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작의 저택 근처로는 발도 들일 수 없을 레스에게 오늘은 후작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기회였다.

피로가 쌓였는지 휴식을 위해 테라스로 향하는 후작의 뒤를 레스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여 쫓았다.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걷는 후작과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다리에 경련이 이는 그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후작님.”

결국, 후작이 아무도 없는 밤의 회랑에 접어들자 레스는 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부름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발견한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네놈이 감히……!”

“직접 조쉐의 부고를 알리지 못하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말을 잃고 입을 몇 번 벙긋거리던 후작이 그에게 다가왔다.

“네, 네놈, 네놈이 감히, 네, 네가 무슨 낯으로!”

“후작님!”

경호로 붙은 두 시종이 기겁하며 붙잡으려는 것을 거세게 뿌리치며 후작은 단번에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들을 잃고 앓은 뇌졸중으로 오른 다리가 불편한 후작의 걸음은 불안정했고, 한 번은 넘어질 뻔했다.

‘아버지는 과보호라니까요.’

그 모습을 앞에 두고, 다섯 살 연상이었던 붉은 머리의 중위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요새 누가 서른 살 아들이랑 부둥켜안으려 들어요. 징그러워 죽겠다니까.’

조슈아 레파르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애정 표현에 대단히 자유로웠다. 뒤에서 우와아, 함성을 지르며 달려와 힘껏 어깨동무를 하기도, 웃을 때마다 옆 사람을 퍽퍽 내리쳐 원성을 사기도 했다.

“후, 후작님! 진정하십시오!”

시종의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후작의 지팡이가 레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레스의 몸이 휘청였다. 균형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가 허공만을 가르고, 뭘 어찌할 틈도 없이 왼쪽 다리의 힘이 풀려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빡.

대리석 바닥에 머리가 부딪쳤다.

‘언제 내가 우리 아버지를 대위님께 소개해 드릴게. 말 안 듣는 나 같은 아들보다는 성격 서글서글하니 좋은 대위님을 훨씬 더 좋아하실 겁니다.’

므네시바 전투에서 합동 작전을 펼쳤던 조슈아 레파르는 지휘하는 것보다는 직접 총을 쥐고 돌격하는 걸 좋아했다. 미친 듯이 돌격해서 총질하는 조슈아 때문에 적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 그는 엄폐물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 적들의 머리에 하나씩 하나씩 총탄을 박아 주곤 했다.

‘내 머리는 하도 단단해서 총탄도 튕겨 나가. 그러니까 넌 네 머리통이나 걱정해.’

끈이 끊어져 쓸 수 없게 된 그의 방탄모 대신 제 것을 머리에 씌워 주며 조슈아 레파르는 등을 퍽퍽 내리쳤다. 그 방탄모를 쓰고 끝까지 잠입해 레스는 그를 중위로 만들었던 저격을 성공시켰다.

“겨, 경! 괜찮으십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잠시 정신을 잃었는지 귓가에서는 잔뜩 겁에 질린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눈을 뜨자마자 제일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딘가 당황한 낯의 후작이었다.

‘……눈썹이.’

곤란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이 찡그려지는 모습이, 조슈아 레파르와 닮아서 숨이 막혔다.

“조쉐, 는.”

“겨, 경, 피가 많이 납니다! 일단 먼저 지혈을 해야―.”

“조쉐는 사흘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말을, 해야 한다.

간수가 다시 돌아와서 목을 조르기 전까지. 목소리가 아직 나오는 와중에 어서.

“폐렴에 걸려서 반쯤 혼수상태였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습니다.”

총탄은 저를 뚫을 수 없다며, 불통의 사나이라고 불러 달라며 낄낄대던 붉은 머리의 중위는. 낚시는 송어 낚시가 제일이라며 한참을 떠벌리던 남자는. 다섯 살이나 어린 후임이 저를 제치고 승진해 제 상관이 된 것에도 어색해하지 않고 제 일처럼 기뻐해 줬던 선임은.

조슈아 레파르는.

또 다른 282명의 희생자들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지도 몰랐던,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 버린 그들은.

“병원으로 제때 옮겨져 치료를 받고 청결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영양 섭취를 했다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사흘만 더 버텨 줬다면!”

후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것이 보였다.

조쉐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기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타인이 어찌 되든 신경조차 쓸 여력이 없는 레스 키시르는.

“그를 죽게 했던 것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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