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46)

9.

레티시아가 차를 멈추게 한 곳은 다네즈 가의 한쪽 끝에 자리한 작은 성 같은 석조 건물 앞이었다. 연회색 벽돌은 간간이 풍화되고 색이 바랬으나 그마저도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벽을 타고 자라난 덩굴장미가 푸르른 이파리와 새빨간 꽃으로 삭막하게도 보였던 건물을 장식했다. 간판조차 없는 의상점. 그런 것 따윈 없어도 상관없다는 오만하기까지 한 자존심의 표시였다.

이곳이야말로 란스타인 제일의 남성 의류 전문점 라미에르였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라미에르의 총지배인 아틀란테 시노미네가 꽃 같은 미소를 뿌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소녀같이 앳되고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는 레티시아와 그녀의 손을 자연스레 받아 에스코트하는 레스 키시르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질문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걸 무시한 채 레티시아는 생긋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아틀란테. 주변에서 하도 너를 찬양하는 소리가 많아서 오랜만에 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런 말은 제가 만든 옷을 입고서 해 주세요.”

“아틀란테가 남자 옷만큼 여자 옷도 잘 만들게 되면 꼭 입어 줄게.”

“차라리 말이나 못 하시면 제가 원망을 않지.”

그에 그냥 웃어 버리며 마치 제 가게라도 되는 듯 자연스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레티시아를 아틀란테는 곱게 흘겨보았다.

로비를 지나 꽤 긴 복도를 걷자 천장이 온통 유리로 되어 있는 메인 쇼룸이 드러났다. 천장에 샹들리에 대신 매달린 범고래와 태양의 색유리 조각상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가운데 쇼룸 중앙에는 붉은 벨벳 천이 덮인 소파와 흰 대리석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가림막과 몇십, 몇백 벌은 될 듯한 옷들이 옷걸이에 걸린 채 죽 늘어져 있었다.

레티시아가 소파 위에 걸터앉자 기다렸다는 듯 흰 정장을 차려입은 시동 둘이 차와 간단한 다과를 세팅했다. 아틀란테가 ㄱ자로 자리 잡은 반대편 소파에 앉자마자 레티시아는 본론을 꺼냈다.

“저번에 말했던 대로, 키시르 경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구하려고 해.”

“몇 개 가봉을 한 제품을 준비해 두었으니 입어 보실 수 있으세요. 치수를 잰 후에 사이즈를 조금 조절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요.”

눈으로 수치를 재는 듯 아틀란테가 레스 키시르를 위아래로 찬찬히 뜯어보듯 훑다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저희 수석 디자이너가 도와드릴 거예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 키시르는 아직 잡고 있던 레티시아의 손끝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차갑고 마른 입술이 손끝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레티시아는 어느새 다가온 라미에르의 수석 디자이너에게 이끌려 가림막 뒤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놀라지 않네.’

라미에르는 웬만한 귀족이나 부자들도 긴장하게 하는 아우라가 있는 곳이었다. 이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쇼룸의 장식 하나하나는 오히려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인가? 레스 키시르에게는 기본적으로 그녀가 쏟아붓는 돈에 대한 경외심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돈이나 물질에 한하지 않고 그냥 감정의 흔들림이라는 게 평균보다 극히 모자란 것 같았다.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승전 연회에서 춤을 청했을 때 정도를 제외하곤.

“신문에서 사진을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생각보다 더 마르셨네요. 아예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은 빼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아틀란테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포트폴리오 파일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 말에 레티시아는 절로 그날 밤 손끝에 선명히 만져졌던 등뼈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렇지.”

“공주님, 경을 너무 혹사시키시는 건 아니지요?”

가늘게 눈을 뜨며 장난스레 그녀를 흘겨보는 아틀란테의 모습에 레티시아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이 난리를 친 게 뭐 때문인데. 레스 키시르가 혹사당하기를 거부해서가 아닌가.

“저 사람은 내가 손을 대기도 전부터 저랬어.”

“그럼 같이 외식도 자주 하고 몸도 움직이면서 신경 좀 써 주세요. 뼈대가 나쁘지 않으니 조금만 더 살이 붙고 근육의 모양이 잡히면 소화하실 수 있는 옷의 종류가 무궁무진하게 늘어나실 텐데.”

“그으래?”

꽤 진지한 얼굴로 챙겨 왔던 포트폴리오의 스케치들을 하나씩 다시 살펴보는 아틀란테의 모습에 레티시아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네가 칭찬하는 건 정말 드문데.”

몇 번 봐 오면서, 특히 웃는 모습을 봐 오면서 레스 키시르가 생각보다 그렇게 못 봐 줄 만한 얼굴은 아니라는 생각은 하긴 했으나 그 이상 눈을 끄는 면은 솔직히 없었다. 그건 그의 뷘터하우젠 입학 사진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몸 역시도 그랬다. 키가 크긴 했으나 워낙 말랐다 보니 솔직히 남성적인 매력은 찾기 어려웠다.

“비율이 잘 잡혔잖아요. 얼굴도 윤곽이 뚜렷하니 분위기 있고. 키도 큰 데다가 늘씬해서 태가 예뻐요. ……근육이 좀 늘어난다면 뼈대가 저렇게 도드라지지 않을 텐데. 잠시만요.”

깃펜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던 아틀란테가 무언가를 생각해 냈는지 가림막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치수 재는 것을 막 끝냈던 수석 디자이너를 불러내더니 뭔가를 쑥덕거렸다. 곧, 두 디자이너는 가림막 너머로 들어가더니 뭔가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레티시아는 국화 향이 나는 차를 홀짝거리며 발을 꼼지락거렸다. 처음 잠시 침묵이 떨어졌던 때를 제외하곤 가림막 너머에서는 작업을 개시한 디자이너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사락거리며 천이 스치는 소리, 옷이 살에 닿았다가 흘러내리는 소리, 지극히 공적인 어조로 이것 좀 입어 봐라, 이젠 벗어 봐라, 좀 더 타이트하게 조여 봐라, 따위의 요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레스 키시르의 목소리는 딱히 들려오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남자가 순순히 시키는 대로 인형 놀이를 당하는 게 눈앞에 그려졌다.

쿠키 세 개를 집어 먹고 차도 한 잔 다 비운 후 레티시아는 결국 찻잔과 쿠키 몇 개를 접시에 올려 들고 가림막 앞에 쪼그렸다.

“키시르 경, 좀 살 만해? 쿠키 줄까?”

“병 주고 약 주시려고요.”

“약보다는 좀 더 맛있어.”

쓱 접시를 내밀자 가림막 너머에서 기다란 손가락이 쿠키를 집어 갔다. 사락거리는 천이 스치는 소리에 오독, 쿠키를 씹어 먹는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아틀란테와 옷을 맞추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 요구하는 것도 많아서 끝내고 나면 지쳐. 최대한 작업을 최소화해 달라고는 했는데 그래도 그래. 하지만 그만큼 아틀란테의 옷은 최고야. 기다린 보람이 있을 거야.”

“감사해요, 공주님!”

가림막 뒤에서 아틀란테가 소리치는 소리에 레티시아는 킥킥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소녀처럼 턱을 괴었다.

“키시르 경, 나는 일각의 보수적인 이들이 나를, 나와 밤을 보낸 이들을 가지고 뭐라 떠들어 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나는 유명인이라 뭘 어떻게 해도 주목을 끌거든.”

무능, 부덕함으로 시선을 끄는 것보다, 반대로 유능, 존경스러움으로 소문이 도는 것보다 삼류 가십지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게 낫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걸 알아주는 이들이 충분히 있으니 생판 관계없는 타인이 절 두고 뭐라 지껄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상황이 축복받았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선물을 레스 키시르가 거절했던 것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이기도 하나 어느 정도는 그가 진심으로 그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그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주는 선물들은 나와 어울리면서 경이 들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헛소리에 대한 사과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편안히 받도록 해. 물질뿐만이 아니야. 선물은 써 버리면 그만이지만 내 애인으로 지내는 동안 경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 맺을 수 있는 인연들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경이 평생 가져갈 수도 있는 것들이니까.”

“…….”

“그러니까, 경은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의 애인으로서 누릴 모든 기회를 아낌없이 누리도록 해.”

레스 키시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공주님, 저도 사실 그날 밤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다시 공주님을 뵙고 싶어질 정도로요.”

한참 후에야 여상스레 내뱉은 말에 가림막 너머의 소란이 순간 딱 멎었다. 내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정말로? 아틀란테의 경악이 손에 잡히는 듯해서 레티시아는 하하, 마른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음, 칭찬 고마워? 별로 좋은 소리가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좀 불안하네.”

“공주님께서도 제 소문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야 뭐.”

처음에는 직무 태만부터 시작했다. 상관의 총애를 등에 업고 걸핏하면 근무지를 이탈해 주변 마을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여급에게 추근거렸다고 한다. 그의 아이를 뱄다는 여자들도 몇이나 나타났고, 업무 실수도 종종 있어서 징벌이 내려졌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뷘터하우젠의 엘리트가 군 생활 초기의 눈부신 성과를 이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탈선한 것이냐는 말도 나왔다.

소속되었던 제1특수부대가 전멸한 날 역시 레스 키시르는 모습을 감췄다 한다. 술에 취해 암구호를 적의 첩자에게 발설한 후 제 부대가 공격받는 모습을 뒤늦게 보고 제 실수에 지레 겁에 질려 도망가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들의 포로수용소 한편에 처박혀 있던 것을 왕태녀의 본대가 기지를 다시 탈환하면서 구출되었다는 것이 일간지들이 신명 나게 써 재끼고 있는 소설이었다.

“재미있는 소설이던데 어디까지가 진짜야?”

그 말에 레스 키시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다 아니다란 말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저와 있는 모습이 보이면 공주님께 안 좋을 겁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버석하게 메말라 갈라지는 목소리는 어린 소년처럼 불안정하게 들렸다.

레티시아는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가림막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사람을 보는 눈이 꽤나 정확하다고 자부했다. 그녀의 눈으로 본 눈앞의 남자는 저 모든 지저분한 추문에 어울릴 만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르는 일이다. 저리 말을 한다 해도 정말로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걸 꺼리는 이유는 따로 있을지 또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레스 키시르는 그녀를 걱정하는 듯했다. 그건 꽤 진심인 듯했다.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경, 걱정이 제일 필요 없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남자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 같아서 레티시아는 일부러 어조를 장난스럽게 했다.

“돈 많은 사람이랑 높은 사람.”

“…….”

“나 돈도 많고 지위도 꽤 높아.”

자화자찬은 그녀에게는 일상이었기에 부끄러움 한 점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다리가 아파져 그녀가 어이구,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허리를 두드렸을 때였다.

“그렇군요. 당신께는, 아무 일도 없겠군요.”

어쩐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에 휩싸여 레티시아는 가림막을 그대로 젖혔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표정으로 저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가림막이 사라지고 선명하게 드러난 남자의 모습에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다.

레스 키시르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말랐고, 여전히 병색이 짙었고, 여전히…….

아틀란테가 디자인한 옷은 품이 낙낙한 스웨터였다. 부드러운 흰색 직물은 부피감 있게 몸을 감싸며 왜소한 체격을 감추고 암갈색 롱코트가 자칫하면 펑퍼짐해 보일 수 있는 상체를 조이며 몸의 태를 드러냈다. 바지는 반대로 몸에 딱 들어맞아 길게 쭉 뻗은 다리의 선을 강조했다.

란스타인 최고 디자이너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오간 데 없었다. 아니, 그건 옷이나 장소 때문이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바뀐 것은.

갑자기 사라진 가림막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남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곧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태양을 조각한 유리 조각이 머리 위에서 불그스름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창백한 레스 키시르의 뺨이 처음으로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잠시 머물렀다가 곧 신기루처럼 스러져 버린 그 웃음이 자리했던 곳을 레티시아는 하염없이 응시했다. 온갖 지저분한 추문에 처박혀 가려진 남자의 더럽혀지지 않은 시절의 조각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레스 키시르라는 남자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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