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공주님, 그자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박물관으로 보내져 버린 최신 라이플에 대해 보고를 하는 테시라의 말투는 절대 곱지 않았다. 비서의 표본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듣기 좋은 억양과 어조, 성량이었으나 그러면 뭐 하나. 그녀의 온몸에서는 레스 키시르에 대한 반감이 묻어났다.
“왜? 쉽게 안 넘어가니 짜릿하고 좋은데.”
“라미에르의 최고급 시계에 그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공주님이 들으시면―.”
“응. 들었어. 네가 한 아홉 번은 말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기왕 이 기회에 열 번을 채우시지요.”
또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테시라에게서 신경을 끄고 레티시아는 다시 시선을 화장대 거울 안의 제 모습으로 돌렸다.
다른 여자란 여자는 죄 해산물처럼 보이도록.
막중하고도 애매하기 짝이 없는 지시였으나 그녀의 전속 시녀들은 란스타인 최고의 기술자들이었다. 새벽처럼 일어나 아침을 꼬박 치장에 매달린 대가로 정오가 되자 레티시아는 그야말로 온몸에서 광채를 흩뿌릴 정도였다.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시녀들에게 보너스를 장맛비처럼 쏟아부은 레티시아는 의기양양하게 리오넬 가로 차를 몰라고 지시했다.
처음으로 슬롯머신에 돈을 집어 넣어 봤을 때가 기억나는 감각이었다. 낡고 고장이 난 데가 많아 내다 버리려는 것을 잠시 가지고 놀아 보겠다고 떼를 썼지.
차르르릉―.
요란한 기계음이 돌아가며 1데캇짜리 동전을 먹은 기계는 교묘하게, 마치 눈앞에서 약을 올리듯 원하는 숫자만 피해서 뱉어 내곤 했다. 1데캇이 5데캇이 되고, 5데캇이 50데캇이 될 때까지도 슬롯머신은 원하는 대가를 내놓지 않았다. 될 듯 말 듯 하다가 결국 꽝을 뱉어 내는 그 기계는 그녀가 기도를 하고, 협박하다가 종래에는 걷어차기까지 했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재를 털어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을 고용해 슬롯머신을 돌리게 했다. 원하던 숫자를 하루 만에 뱉어 내게 된 기계를 보며 그녀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화려하게 색을 바꾸며 반짝이던 슬롯머신의 불빛과 천박하게도 들리는 기계음들. 손에 넣는 순간 퇴색될 말초적인 흥분. 그런 것들을 그녀는 사랑했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창백하게 말라 있던 남자는 그녀를 처음 슬롯머신 앞에 선 어린 계집애가 된 것 같게 한다.
그 해골 뼈다귀 같은 남자가 넋을 놓고 입만 뻐금거리는 꼴을 보고야 말겠어. 내 호의를 받는 족족 내팽개쳐 버리고 예의상 편지 쪼가리 비슷한 것도 안 보냈던 것도, 그 밤 즐겼던 것은 나 혼자였다는 듯 연락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도 싹 다 기억하고 있으니 두고 봐. 똑같이 되돌려 줄 테니―.
‘……즐겼, 지?’
순간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그날의 기억은 짜릿한 쾌감에 정신없이 들러붙었던 것을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 얼굴로 바라보며 옷만 벗으면 알아서 흥분해 좋아하곤 했던 상대 남자들의 반응 같은 건 그녀가 일부러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이었다. 어련히 좋았겠지. 상대가 누군데.
감히. 상대가.
……상대, 가…….
“나만 혼자서 난리 쳤던 건 아니겠지!”
쉽게 부인할 수만은 없는 가능성에 홀로 난리 치는 공주를 예의 바르게 무시하며 운전사는 고급 승용차를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좁고 남루한 골목 사이로 몰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차 문이 열리고 레티시아는 칠이 벗겨져 가는 붉은 벽돌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리오넬 가 12번지 5호.
협박과 구슬림을 섞은 설득에 주위에 기자들은 없었다. 테시라가 적어 준 주소를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하고 레티시아는 티가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차르르릉.
귀를 따갑게 하는 소리와 함께 초인종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가 속으로 하나부터 다섯까지 샜을 때, 문이 열렸다.
“안녕?”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녀의 등장에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따라 눈웃음을 지었다. 길게 속눈썹이 늘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지며 웃음이 맺혔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십니다, 공주님.”
마치 이리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게 일상인 듯한 인사말이었다.
“오늘 신경을 좀 썼지.”
“많이 신경 쓰셨다면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뻔했습니다.”
“내가 좀 그래.”
가볍게 턱을 치켜드는 모습에 레스 키시르는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웃으며 자연스레 몸을 틀어 문가에서 비켜섰다.
“공주님께 어울릴 만한 다기가 없어서 걱정이군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녀가 안으로 들어갈 것을 전제한 행동이었다. 그녀를 안으로 들이는 것을 거부했을 경우의 수만 수십 개 예습해 왔던 게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진짜로 왜 저렇게 태연한 건가, 그녀가 오늘 찾아올 거라는 정보가 샜나. 아니, 사실 그녀는 레스 키시르랑 한 십 년은 알고 살았던 친구 사이인데 그녀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려 잊어버렸나 싶었으나 집 안에서 완전히 돌이 되어 버린 레스 키시르의 룸메이트를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해군 군수사령부 소속 중위, 세자르 메힌이 공주님을 뵙습니다!”
본래 저 정도의 반응을 보여 줘야 하는데 말이야.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버려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은 얼굴이 거의 흉악범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공주는 세 명이 들어서자 숨이 막힐 정도로 좁게 느껴지는 거실을 쓱 둘러보았다. 그 시선에 더욱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세자르 메힌은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와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숨을 참는 것으로 터져 나오려는 재채기를 참은 레티시아를 세자르 메힌은 겨우 모습을 드러낸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고마워. 갑자기 말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
“아닙니다. 키시르 경에게 용무가 있으신 듯하니 저는 잠시 자리를 피해 있겠습니다.”
아니 괜찮다고 만류할 새도 없이 세자르 메힌이 군례를 했다. 어찌나 각이 살아 있는지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하하, 소리 내어 웃어 버리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그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쾅, 다소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친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스 키시르가 탄성과도 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르가 저리 빨리 움직이는 건 처음 봤습니다. 너무 겁을 주신 거 아닌가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본래 나를 처음 보면 다 저만큼 긴장해.”
“억울하시겠습니다.”
“그러게.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억울하다 뭐다 하면서도 레티시아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평생 발치에 무릎을 꿇는 이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자라 왔다. 서로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실과 붙어 있는 주방에서 차를 우리는 레스 키시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티시아는 새삼스레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레스 키시르의 뒤통수를 보았던가. 이자는 첫 만남에서도 그녀를 딱히 경외한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그는 긴장하지 않았고, 욕구하지 않았고, 그녀를 특별하게 보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그녀가 이 길바닥 어디에나 존재하는 계집애가 된 듯 취급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레티시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가 공주이고 이 나라 제일의 갑부이자 미인이고, 아니 그 이전에 그녀가 지난 엿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자들까지 잔뜩 대동하고 선물을 줄줄이 보냈는데. 아니 그보다도 더 이전에.
내가, 당신이랑 밤을 보냈는데.
“경은 이상해.”
“제가요?”
“나랑 있는데 왜 이렇게 긴장을 안 해?”
“그야, 전 이미 한 번 잡아 먹혔잖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여상스러운 답변에 레티시아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저도 모르게 헤 벌어진 입을 닫으며 그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른 주전자를 스토브에서 내리는 레스 키시르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억은 하고 있었네.”
간신히 말을 꺼내자마자 허탈함이 몰려왔다. 환장할 것 같은 심정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요상야릇해지는 감정에 그녀는 그 폭탄을 떨어트린 남자를 절대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나는 또 잊어버린 줄 알았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시네요.”
“과대평가하기에는 경은 연락도 한 통 안 했고.”
“공주님께는 제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텐데.”
달각, 그녀의 앞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였다. 이가 빠진 민무늬 찻잔에, 내어진 차는 시중에서 박스 단위로 파는 인스턴트 티백이었다. 레티시아는 뜨거운 속에 뜨거운 차를 꾸역꾸역 부어 넣으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나 들어는 보자 싶은 심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불합리할 정도로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걸터앉아 레스 키시르는 말을 이었다.
“멋없이 달라붙어 봤자 성가시게 할 뿐이지 않습니까.”
“안됐네. 나는 질척질척한 남자가 좋은데. 나 좋다고 매달리는 남자는 더 좋아하고. 아, 그런데 제일 취향은 뭔 줄 알아?”
“뭐지요?”
“선물 잘 받는 남자.”
대놓고 심통이 난 얼굴에도 남자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덕분에 결국 이렇게 다시 공주님 얼굴을 뵙게 되었지 않습니까?”
“…….”
선수다.
저건 선수였어.
내가 드디어 선수에게 낚였구나.
뜨겁기는 또 더럽게 뜨거워 차를 마시는 건지 혀를 고문하는 건지 모르겠을 찻물을 연신 홀짝이며 레티시아는 들어 올린 찻잔 너머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짜증 나, 경.”
그녀는 처음에 레스 키시르가 그녀를 어떻게 봤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한 톨의 관심도 없었다. 그뿐일까. 가끔씩,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질척하게 가라앉는 눈동자는 그녀를 원망하는 것도 같았다.
그녀가 알아서 먼저 사과를 했다고는 하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무관심에서 호감이 될 수 있는가.
“노리고 이러는 것 같아. 경은 처음에 나를 별로 안 좋아했잖아?”
“공주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좋아하는 척하고, 한순간에 살도 섞고.”
본인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레티시아는 왠지 그날 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정말로 그 밤바다에 가라앉았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말리고, 사과하고, 대화를 이어 가는 그 짧은 사이에 그의 안에서 무언가 사고의 전환이 있었다.
레스 키시르는 그녀에게 무언가 얻어 낼 게 생겼다. 태도의 전환은 그걸 위한 계획의 일부이다.
그게 그녀가 지난 엿새 동안 머리를 쥐어짜 가며 도달한 결론이었다.
“원하는 게 분명히 있을 텐데. 그래서 내 관심을 끌려고 이런 가당치도 않은 연극을 하는 것일 테니까 경이 질질 울면서 매달릴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도 했는데 말이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은 차분했다. 그 시선을 마주 응시하며 레티시아는 그와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클럽하우스 멤버들을 욕하고, 그 장난 같은 내기에 임했던 자신을 욕하고, 매번 무능하다가 딱 한 번 유능해서 그녀를 이 똥통에 처박은 오라비를 욕했다.
“……좋았어.”
“예?”
“그날 밤이 좋았다고! 의미 없는 줄다리기 하면서 허비할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좋았어!”
억울한 건, 그녀가 정확히 레스 키시르의 예상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녀를 애먹였던 슬롯머신처럼 보통 공을 들이는 거로는 원하는 걸 내주려 하지 않는 남자 때문에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은 장장 일주일간 다른 남자 따윈 눈길조차 주지 못했다.
그리고 제일 억울한 건, 그녀 본인이 무심코 그게 나쁘지 않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번번이 그녀의 예상을 배신하는 남자가 괘씸하면서도 신선했다. 남자의 계획에 놀아나는 거라도 상관이 없다 생각이 될 정도로.
그렇다면, 저 남자의 노력을 즐기는 게 뭐가 나쁜가.
레티시아는 이번에야말로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 나를 이용해도 좋아.”
열 살의 그녀는 백 명의 인력을 고용할 수 있었다. 스물두 살의 그녀는 원한다면 나라 전체를 고용할 수도 있다.
레스 키시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곧 이 남자를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남자와의 줄다리기는 꽤 재미있을 것이다.
“나를 즐겁게 해 줘. 나는 결코 값을 가볍게 치르진 않아.”
어차피, 달리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다.
“공주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다할 수 있을 리가요.”
금빛 부드러운 눈이 또다시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여전히 창백하고 깡마른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그나마 살이 붙어 일주일 전만큼 초췌해 보이지는 않았다. 찻잔을 쥐고 있던 레티시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 그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레스 키시르는 무감하게 물어 왔다.
“그럼, 제가 뭘 하면 좋을까요?”
레티시아는 그 손을 꽉 마주 지으며 읏샤, 하고 끌어 올렸다. 엉겁결에 딸려 올라가며 동그랗게 눈을 뜨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현관문 쪽으로 까닥했다.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