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46)

7.

“눈 감았지?”

“그래.”

레스의 눈앞으로 손을 몇 번 흔들어 보인 후 세자르 메힌은 날카롭게 날을 간 면도칼을 쥐었다. 지저분하게 자라난 지푸라기 색 머리칼을 몇 번 손끝으로 쓸어 넘기며 세자르는 정면의 거울에 비친 레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충 어디를 어떻게 잘라 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세자르의 칼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사각, 사각, 잘려 나간 머리칼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은 채로도 가까이 다가오는 칼날을 느낄 수 있는지 머리가 잘릴 때마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흐트러지고 가빠지는 숨결에서 신경을 떼지 않은 채로 세자르는 더욱 손을 빨리하여 머리를 잘라 냈다.

“됐어.”

툭, 가볍게 어깨를 치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 레스가 헐떡였다. 어느새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히고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잔을 건네는 것을 받아 들어 단번에 비운 레스의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3데캇.”

그런 친우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세자르는 커다란 빗자루를 가지고 와 바닥을 쓱쓱 쓸었다. 털갈이라도 한 것처럼 수북이 바닥을 덮는 머리카락을 보며 레스는 허전하게 느껴지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비싸다.”

“나 자선 사업자 아니다.”

“1데캇으로 깎아 주세요, 근육이 멋진 세자―.”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두툼한 손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한껏 몸을 웅크려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레스가 투덜거렸다.

“아파.”

“일자리는 알아보고 있는 거냐?”

“날 원하는 데가 없어.”

“교수들은? 그렇게 극찬해 대더니.”

“소데베르크 교수님, 베른하임 교수님, 라덴 교수님 셋 다 자퇴하셨어. 제자로서 염치가 있지.”

“제일 쓸모없는 게 잘나가는 양반들 걱정이지.”

“그래도 망할 거면 혼자서 망해야 할 것 같다는 사명감이라고나 할까.”

“그것참 쓸데없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말에도 레스는 헤실헤실 웃었다. 어딘가 한 군데 나사 빠진 듯한 그 꼴에 쯧, 하고 혀를 차며 세자르는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버리고, 꺼내 놓았던 미용 도구를 정리했다. 그 뒷모습을 레스가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안 물어봐?”

“뭘.”

“왜 공주님한테 냉큼 빈대 붙지 않았느냐고.”

일주일 전, 눈을 뜨기가 무섭게 울린 초인종에 나가 보니 레스를 반긴 것은 어디 패션지의 화보에나 등장할 만한 세련된 미인이었다. 우아하게 컬을 넣어 등허리까지 기른 화려한 금발에 목까지 올라오는 흰 터틀넥 스웨터 위로 연갈색 트렌치코트를 차려입은 여자는 일반인이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교묘함으로 그를 재빨리 위아래로 훑었다.

‘레스 키시르 경 되십니까? 레티시아 공주님의 수석 비서인 테시라 자르덴이라고 합니다.’

수상보다 많은 월급을 받으며 나라 제일의 갑부인 공주의 스물다섯 개 사업체의 관리자들을 총괄 관리한다는 공주의 수석 비서였다. 극도로 예를 갖추면서도 결코 아랫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재주를 지닌 테시라 자르덴은 깊게 숙였던 허리를 펴자마자 반쯤 몸을 돌려 제 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간의 줄을 드러냈다.

‘공주님께서 어제 연회의 실수를 사과하시며 보낸 선물들입니다. 그분의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부디 기꺼이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 구름같이 모여든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세자르의 무뚝뚝한 얼굴이 한층 더 굳었다. 상자를 들고 찾아온 이들 하나하나가 브륀셀에서 알아주는 고급 상점의 지배인급 인사들이었다. 내용물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그 공주가 최고급품 이하의 물건을 보냈을 리가 없다. 그런 이들을 우르르 끌고 와 기자들 앞에서 공주가 사과의 표시로 선물을 보냈다고 떠벌리듯 말했다. 레스와 같은 일개 퇴역 군인으로서는 감히 거절할 수 없는 막중한 부담을 걸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레스 키시르는 그 선물들을 모조리, 아주 보란 듯이 뚜껑도 열지 않고 돌려보냈다.

‘공주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사과해 주셨습니다. 이리 분에 넘치는 선물은 제게는 과하니 굳이 주시겠다면 공주님의 이름으로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세자르는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비서의 눈이 돌아가는 걸 처음으로 보았다. 그녀는 레스가 라미에르 남성품 라인의 최신 시계를 정말로 무료 급식소에 기부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후 더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 후로도 선물 공세는 엿새를 꼬박 채우며 이어졌다. 어제 보낸 최신 라이플은 물욕이 없다 자부하는 세자르마저 뒤흔들 정도로 세련된 최첨단 장비였다. 군 기밀로 반출이 제한된 최신종의 바로 전 단계의 기종이었다.

그리고 레스는 그 라이플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공주님 애인 노릇을 하면서 단물 좀 빨아먹어 봤자 그분의 막대한 재산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복권 당첨되었다 생각하고 즐기라는 말은 왜 하지 않아?”

덤덤히 물으며 레스가 느릿하게 느슨한 튜닉의 끈을 가슴께에서 조였다. 반소매를 더 이상 입지 못하고, 목을 조이는 옷을 입지 못하고, 붉은색도 눈에 담기 힘들어하니 옷은 죄 검거나 흰, 품이 넓은 것들뿐이다. 덥수룩했던 머리가 잘려 나가 눈가와 목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나니 반대로 까칠하게 말라 도드라진 뼈대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가느다란 손목에 시선을 한 번 준 세자르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 같은 소리 반복하는 거 안 질렸어?”

“달리 할 일도 없는 실업자인데 뭐.”

“충분히 많은 이들이 같은 질문을 해 댈 테니, 굳이 나까지 그런 거 캐물을 이유 없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레스가 소리 없이 눈을 휘어 웃었다.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힐끗 바라본 세자르는 미간을 찡그리며 다소 성마르게 머리를 헤집었다.

“그래도, 공주님께 감사는 하지.”

“공주님께?”

“먹을 거로 애먹이던 녀석이 드디어 제 손으로 먹게 되었으니.”

“하하.”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녀석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퍽, 후려치며 세자르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청소한 지 꽤 되어 텁텁하게 느껴지는 방 안에 서늘한 아침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솔직히 그는 레스와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사관학교 시절 전투과 엘리트 코스를 정석적으로 밟은 레스와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기계공학과였으니 아예 가는 길이 달랐다. 마지막 학기에 사정이 생겨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었기에 비상 연락처로 서로의 이름을 적어 두었을 뿐이었다.

지금 룸메이트가 된 것은 군 병원에서 퇴원한 레스와 동행해 줄 보호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퇴원했을 때는 정말 목숨만 붙어 있었다. 다리를 다친 채 오래 방치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다가 퇴원 후 며칠 동안은 음식을 거부했다. 열이 펄펄 끓었다가 겨우 떨어졌나 싶으면 또다시 무서울 정도로 치솟았다.

겨우 회복되어서 승전 연회에 불려간 날, 세자르는 레스가 시체로 실려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반쯤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연회에서 돌아온 레스는 전에 없는 적극성으로 음식을 찾아 먹었다. 침대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어하던 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재활을 시작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세자르에게는 환영할 일이었다.

“이래 봬도 염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니까 나도 자립해야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반대로 모래가 묻어날 듯 메말랐다. 서랍을 열어 약병을 줄줄이 늘어놓고 한 주먹 가득 약을 물도 없이 삼키며 그는 느릿하게 목덜미를 주물렀다.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막혀 오는 것 같아 세자르는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음?”

무심코 골목으로 시선을 던졌던 세자르의 낯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푸른 상현달을 배경으로 한 독수리로 상징되는 레반스타인 왕가의 문장과 갤리선과 범고래를 새긴 루쉔하이츠 상회의 문장을 양옆으로 박아 놓은 레티시아 공주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마차는 오늘은 무슨 일인지 정오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레스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철벽에 드디어 나가떨어진 게 아닌가 싶었는데 좀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주위에 개 떼처럼 몰려들었던 기자들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요란스러운 공주의 마차와 그 뒤를 따르곤 했던 선물 상자를 든 사람들의 행렬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새빨간 고급 승용차와 그 뒤를 따르는 새까만 차 세 대가 소리 없이 하숙집 현관 앞에 미끄러지듯 정차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과 그 앞을 노점상 삼아 이것저것 좌판을 늘어놓은 이들로 숨 막히게 좁은 도로는 고급 승용차 네 대가 들어오자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답답해 보였다.

그 비좁은 건물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움직이는 검은 예복의, 아무리 봐도 사설 경호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하숙집 현관 앞 계단 양옆에 좌르륵 늘어지며 시립했다. 그리고 붉은 승용차의 뒷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자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야, 야야, 레스. 지금 밖에―.”

차르르릉.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그에 허둥대는 낌새도 없이 레스 키시르는 다시 한 번 제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서슴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

그리고 열린 문 너머로 그야말로 얼굴에서 휘광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아찔한 미모를 자랑하며 공주가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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