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46)

6.

레티시아의 바람대로 조간지 헤드라인이 레스 키시르의 자살로 장식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더욱더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있었다.

[충격! 레티시아 공주의 다음 남자는 오빠의 부관?]

[단독 취재: 레티시아 공주의 손을 거절한 남자. 레스 키시르는 대체 누구인가?]

[떨어지는 왕실의 권위. 몰락 귀족조차 거부하는 왕실. 레티시아 공주의 남성 편력도 이것으로 끝인가?]

레티시아는 차곡차곡 쌓여 올려졌던 조간지들을 싸그리 긁어모아 벽난로 안에 처넣었다. 불붙어 타오르는 조간지 하나하나가 그걸 기사라고 싸질러 댄 기자 놈의 면상이라 상상하며 그녀는 부지깽이를 친히 들고 장작을 푹푹 쑤셨다. 레스 키시르를 침대로 끌어들인 순간 그녀는 연회장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터졌던 플래시 세례를 모조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기사 쓸 게 그렇게 없어서 이런 걸 기사로 내? 이건 사생활 침해야. 왕실 모독죄로 고소할 거라고!”

펄펄 뛰는 주인을 측은히 바라보며 수석 비서 테시라 자르덴은 제가 심혈을 기울여 탄 차를 홀로 홀짝였다. 자업자득이다, 내가 언젠간 이럴 줄 알았다, 이 기회에 이 남자 저 남자 건드리고 다니는 그 버릇 좀 고쳐라 등등 할 수 있는 말은 많았으나 어차피 들어먹지도 않을 말을 떠드느라 고용주의 눈 밖에 나느니 테시라는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기로 했다.

“실제로 요새 꽤 평화로웠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머니가 훈장을 다섯 개나 뿌렸잖아! 그거에 관해서나 쓸 것이지!”

“그래서 쓴 거죠. 레스 키시르. 성 미카텔라 훈장 수여자이자 레티시아 공주를 만인의 앞에서 차 버림으로써 그녀의 흠결 한 점 없는 기록에 지울 수 없는 스크래치를 낸―.”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라고 하기엔 조간지 1면에 실린 사진이 너무 빼도 박도 못할 정도였지만 테시라는 역시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는 사야 하는 한정 구두가 있었고, 공주는 그녀에게 월급을 하사하는 전지적 신이었다.

결국, 조간지가 입자 단위로 분해된 후에야 부지깽이를 내려놓은 공주는 한참을 정신 사납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편지는? 나한테 메모라던가 전보라던가 아무튼 뭔가 온 거 없어?”

“기자들한테서 잔뜩 오긴 했는데요. 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가십은 취급 안 한다는 콧대 높은 <란스타인 일보>에서 예외적으로 인터뷰 요청이 왔…… 는데 관심 없으시겠지요. 예, 물론.”

“그거 말고 잔뜩 더 왔을 거 아냐. 에머리가 오늘 한가득 들고 오는 거 봤는데.”

“그거 다 읽느라 추가 시급을 받아야 할 지경입니다. 에버튼 양을 필두로 해서 클럽 하우스 멤버분들께서 브런치 초청장을 보내셨고―.”

“그거 말고! 아,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걔네들은 앞으로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이 저택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 특히 세르시 조세 그 계집애.”

“……그냥 누구 편지를 기다리시는지 말을 하세…….”

빙빙 돌며 핵심을 피하는 대화에 테시라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하려 했을 때였다. 순간 운석처럼 떨어져 내려 뒤통수를 후려치는 깨달음에 테시라는 자리를 홱 박차고 일어섰다.

“공주님, 설마 잤어요?”

“으, 으응?”

“아니지요! 설마 아닐 거야! 아니 무슨 아무리 공주님이 바지만 입고 있으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공주님을 믿었는데!”

“아니 무슨 말이야! 내 기준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아니, 부정해 주셨으면 하는 건 그게 아니었는데요!”

아찔해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테시라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어, 목적어 다 빼놓고 말해도 어젯밤 일어난 일이 눈앞에 좌라락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공주가 레스 키시르와 잤다.

공주의 평소 행실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진짜로 대중의 앞에서 그렇게 여지도 한 점 없이 차였다면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겠지. 작정하고 달려드는 공주를 오래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정말이지 별로 없었다.

여기서 그쳤다면 테시라는 반쯤은 경외에, 반쯤은 한심함에 손뼉이라도 쳐 줬겠지만, 상대는 암구호를 적에게 유출해 자기 부대를 전멸시켰다는 소문에도 어째서인지 왕에게 훈장까지 받은 이였다. 군부가 입을 닫고 왕실도 정식 입장을 표한 적이 없기에 온갖 기상천외한 추측만 무성한 와중에 공주가 그자와 염문이라도 뿌려 봐라.

“공주님, 공주님이 짝사랑하던 남자한테 눈이 돌아가 군사 재판에 개입하고 불합리하게 훈장을 수여했다고 뒷말 나올지도 모르는 걸 생각하시고 하신 행동이겠지요?”

“키시르 경한테 무죄를 선고한 것은 군사 재판소이고 훈장을 수여한 건 어머니인데 왜 내가 욕을 먹어?”

“아니, 공주님, 진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런 소문이 붙는다는 것부터가 손해라는 말입니다!”

“어차피 걔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떠들게 되어 있어. 내가 선거에 나설 것도 아니고, 혼처가 궁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와, 어쩜!”

내 전화통에 불이 날 것은 생각 안 해 주시지! 내가 공주님 보좌라는 이유로 화장실에서까지 기자들에게 시달릴 건 아예 안중에도 없으시지!

억울해서 가슴을 쳐 대는 수석 비서를 무시한 채로 레티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돌아가시는 길 달빛이 밝기를.’

몇 번이고 레스 키시르를 물고 빤 후 그자의 아래에서 탈진할 때까지 흔들렸던 지난밤의 끝자락, 남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장을 갖춘 그녀의 발치에 몸을 숙여 신발을 신겨 주며 그 발목에 입을 맞췄다.

‘돌아오시는 길이 너무 멀지는 않기를.’

아쉽다는 듯 느릿하게 발목을 지분거리다가 떨어져 나가는 입술은 하룻밤 내내 이어졌던 키스로 살짝 부풀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괴롭혔으니 피곤해서 자는 건지도 모르지. 엄청 분위기 깨긴 하지만 저도 한 짓이 있으니 넘어가려 했다. 그녀와는 달리 일이 있으니 아침에는 바쁠지도 모르고.

그래서 레티시아는 착하고 끈기 있게 정오까지 기다렸다. 남자가 바쁜 일상 중 애써 짬을 내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하며 골라 가장 좋은 편지지에 한 자 한 자 적을 시간, 그리고 아무리 봐도 개인 시종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수배한 집배원이 수도 북쪽 끝에 있는 그녀의 저택까지 도달할 시간, 그리고 집사 에머리가 넘쳐나는 편지들을 정리해서 그녀에게 가지고 올 시간을 다 포함해서, 그래서 정오인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정오. 레스 키시르가 매너의 ‘매’ 자만이라도 아는 신사라면, 아니, 그자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덕과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는 뇌가 있는 자라면 그녀에게 안부를 묻고 애프터를 요청하는 편지 한 장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공주님이 내게 이러실 수는 없다고, 이렇게 매번 엿이나 처먹일 거면 급료라도 올려 달라고 바닥에 드러누워 시위하는 수석 비서의 얼굴에 쿠션을 던져 버리고, 사람이라면 이제는 슬슬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집사의 말을 무시하고, 신경 쓰이니까 제발 현관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말라는 하녀장의 말에 ‘지금, 어, 내가 어, 누군지나 알아?’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다 방 안으로 끌려 들어온 레티시아는 저무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이를 득득 갈았다.

“……레스 키시르.”

어제 살살 눈웃음치던 얼굴이 생각나자 머리끝까지 울화가 뻗쳤다. 잘생기지도 않은 게! 근육도 뭐 하나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게! 린시의 보모 노릇이나 하던 게!

“부숴 버리겠어.”

또 깊은 병이 도지셨구나. 이글거리는 주인의 눈을 보며 전담 시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D.H. 250년 6월 21일 출생. 현 나이 25세.

원목 교역상이던 로셍튼의 군터 키시르와 로베르 가의 네미아 키시르 소생. 네 형제 중 막내. 위로 두 형이 있고 누나가 하나 있음. 현 가주는 장남인 소완 키시르. 열다섯 살에 자립하여 전액 장학생으로서 뷘터하우젠 왕립 사관학교에 입학. 전술, 사학, 격투술, 특히 사격에 재능을 보임. 5년 재학 동안 전액 장학금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이 수석 졸업한 후 특채로 제5특수부대에 소위로 임관. 우수한 성적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3년 후에는 중위, 2년 후에는 대위까지 진급. 그 화려한 이력 덕으로 275년 이스칸타 3세가 직접 제2왕자 린스베른 레반스타인 왕자의 부관으로 지정함.

“……기구하네.”

푹신한 서재의 소파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발장난을 하며 레티시아는 아까까지 읽고 있던 파일을 옆의 협탁에 던져 올렸다. 협탁 위에는 꽤 많은 양의 서류철이 쌓여 있었다. 갖은 떼를 써 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유능한 수석 비서가 긁어모은 레스 키시르의 정보였다. 키시르 가의 인적서부터 재정 보고서, 뷘터하우젠 재학 시의 성적표와 입대 시의 추천서, 군 복무 중의 성과 보고서까지 포함해, 그의 인생사가 함축된 종이 쪼가리들이었다.

며칠간 짬이 날 때마다 훑어보았던 레스 키시르의 인생사는 마치 신파극의 주인공을 생각나게 했다. 후의 승승장구가 더 돋보이기 위해 어린 시절 온갖 역경에 시달려야 하는 주인공.

중소 무역상이던 부모가 죽고 상단이 재정 악화를 견디지 못해 파산한 후로 장남이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 나름 고군분투했는데 안타깝게도 장남에게는 상재가 없었던 모양이다. 소완 키시르가 상단주로 있는 노체스 상회의 재무 보고서는 대충 훑어보기만 했지만, 정말이지 엉망이었다. 형제들은 각자도생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고, 레스 키시르는 뷘터하우젠에 원서를 넣은 모양이었다.

그때까지의 고생을 보상하듯 뷘터하우젠에 입성한 후의 레스 키시르의 실적은 눈부실 정도였다. 뷘터하우젠의 학장단은 결코 장학금을 퍼 주는 인사들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에게서 5년 동안 전액 장학금을 받아 내고 졸업까지 수석으로 할 정도면 꽤 뛰어난 인재였던 모양이었다. 그랬기에 모왕이 린시의 부관으로 임명했던 것이겠지.

그런 화려한 이력이 한순간에 진창으로.

그리고 추락.

“귀엽게 생겼었네.”

레티시아는 한참 동안 레스 키시르의 뷘터하우젠 입학 시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풋풋한 얼굴의 열다섯 살 소년은 며칠 전 연회장에서 보았던 깡마른 사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색이 바랜 연갈색인 줄 알았던 머리칼은 사실 금갈색에 더 가까웠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길게 속눈썹이 드리운 눈매는 순진하고 귀염성 있어 보였고, 무엇보다 단정하게 목 끝까지 단추가 잠긴 민무늬 셔츠 아래의 단단하고도 과하지 않은 어깨와 가슴의 근육이 눈부셨다. 사진 너머 긴장으로 입매를 굳힌 소년은 결정적으로 스물다섯 살의 레스 키시르에게는 결여된 것이 있었다.

그것이 꽤 눈길을 끌게 하는 것이라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 사진 속의 소년을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졌다.

“테시라.”

“네, 공주님.”

소리를 높여 부르자 소파 너머,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제 부하 다섯을 부리며 산처럼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테시라가 소리도 없이 레티시아의 앞에 대기했다.

“요즘 어때?”

“처참하지요.”

주어와 목적어가 모조리 생략된 질문이었으나 테시라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군에서 퇴직했으니 본가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따로 일자리를 구해야 할 텐데 퇴직한 이유가 이유인 데다가 다리도 그 모양이잖습니까. 그렇다고 평생 군부 쪽 일만 해 오던 인사가 지금 와서 다른 일을 배우기도 쉽지 않지요. 어찌어찌 배운다 해도 떠도는 소문도 그렇고, 다리도 그렇고.”

“본가로 돌아가려고는.”

“재무 보고서 보셨잖습니까.”

“끔찍했지.”

“최악의 경우, 퇴직금이 떨어질 때까지 답이 안 보이면 돌아가야 하겠지만요. 적어도 지방이 하숙비는 더 쌀 게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은 뭐 하는데?”

“뷘터하우젠 때의 동기와 같이 하숙하면서 학교나 가정교사 쪽을 알아보고 있는 것 같은데 고용주가 될 만한 이들과 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반은 아직 전선에 있고 나머지는 뭐…… 소문이 소문이니까요.”

“힘들겠네.”

“힘들겠지요.”

“내 애인이라고 조간지란 조간지들이 다 떠들어 대는데도 그래?”

“감히 공주님을 거부했으니 오히려 더 힘들어지면 힘들어졌지요.”

“하긴.”

소파에 누워 팔걸이에 걸친 레티시아의 발이 까닥거렸다. 생각에 잠길 때의 습관으로 녹색 눈동자가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살짝 가늘어졌다.

테시라의 치마 아래로 이오니아 사의 한정 구두가 광택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 출시된 신상품이니 매대에 오르자마자 바로 산 모양이다. 구두가 새것이니 입고 있는 원피스부터 액세서리까지 모조리 다 맞춰 샀을 것이고, 명품이 아닌 건 거들떠도 안 보니 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지방이라면 집 한 채는 거뜬히 살 정도의 돈이 들었을 테다.

덕분에 이 나라에서 한 손가락 안에 꼽힐 재원은 만성적인 과다 채무에 시달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이 란스타인에서 테시라 자르덴만큼 물건 보는 눈이 좋은 이도 없었다. 란스타인의 명품 중 테시라 자르덴이 알지 못하는 명품은 명품이 아니라 불릴 정도로.

무려 제 고용주보다 더 비싼 물건들로 몸을 감고 있는 비서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본 레티시아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시라, 요즘도 쇼핑 좋아하지?”

“아무렴요.”

“그럼, 쇼핑해.”

손을 한 번 까딱하자 아주 드물게 멍하니 눈을 껌벅이고 있던 테시라가 잽싸게 책상으로 달려가 수표책을 가져다 댔다.

레티시아 레반스타인.

멋들어진 필체의 사인이 새겨지고 인장이 찍힌 수표가 금액을 적지 않은 채로 테시라의 손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원한다면 수도 브륀셀을 통째로 살 수 있는 종잇조각에 테시라의 손이 덜덜 떨렸다.

레티시아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음 한 음에 힘을 주어 말했다.

“브륀셀에서 내가 레스 키시르에게 구애하는 중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게 해.”

레스 키시르는 그녀의 발아래에서 엉엉 울며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자를 뻥 차고 떠나 버려야지!

“흐흐, 흐흐흐, 으흐흐흐흐.”

테시라는 그런 고용주의 모습에서 예의 바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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