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큭, 콜록!”
넘어진 각도가 안 좋았던 걸까? 반사적으로 숨을 참을 새도 없이 바닷물이 그대로 콧속으로 들어왔다. 코가 시큰해지는 감각에 레티시아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기침을 했다.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물을 잔뜩 머금은 드레스가 닻처럼 몸을 잡아끌었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양팔을 단단한 팔이 받쳤다. 꾹 힘을 주어 밀어 올리자 레티시아는 겨우겨우 다리에 힘을 주어 바로 섰다.
죽는 줄 알았다.
저를 지탱하는 팔에 매달리다시피 해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레티시아의 어깨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숨을 하도 몰아쉬다 보니 기도가 자극되어 또다시 한 바탕 기침이 나왔다. 기침이 너무 심하다 보니 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아 구역질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녀는 제정신을 다잡고 허리를 조심스레 폈다.
코앞에 레스 키시르의 해골 같은 얼굴이 있어서 순간 화들짝 놀랄 뻔한 걸 가까스로 감추고 그녀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지금까지 생명줄처럼 그러쥐고 있던 앙상한 팔을 놓았다. 억울하게도, 제대로 서 보니 물이 고작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굴욕적인 상황에 그녀는 그냥 머리를 비워 버리고 생긋 웃었다.
“괜찮아?”
레스 키시르는 한참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예의 바른 시선 속에서도 이 미친 여자는 뭐지, 싶은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공주님께서 달려드시기 전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경이 죽으려는 것 같았어.”
“공주님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 보려 기다리는 이들이 그리 많은데 왜 이런 외진 곳에 계신 겁니까?”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예 화두를 바꿔 질문이 돌아왔다. 냉랭하게도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속으로 안도했다.
정말 죽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이야. 내일 조간에 그녀의 이름이 실릴 일은 없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위험 요소가 해결되어 긴장이 풀어진 레티시아는 다소 가벼워진 어조로 답했다.
“미안해서.”
“……예?”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경을 찾으러 다녔어.”
“공주님께서 제게 사과할 정도의 일을 하셨습니까?”
레스 키시르는 정말로 그게 궁금해서 묻는 것 같기도, 그녀의 기행을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나긋하고 예의가 바르면서도 어딘가 냉소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레티시아는 이 불쌍한 인사는 인생이 얼마나 원하는 대로 안 풀렸으면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먹지 못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나는 오빠 기사는 전혀 읽지 않아. 오늘의 연회에도 중간에 들어왔고. 다리가 불편한 줄 몰랐어. 알았다면 춤 대신 접시를 들고 와 이야기나 나누자고 했을 텐데.”
“……아.”
그 말에 남자의 굳은 표정이 미미하게 풀어진 듯했다. 표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지니 살짝 꼬리가 치켜 올라갔던 눈매가 반대로 조금 처졌다.
아니라고 해도 역시 신경을 쓰고 있던 게 분명하다.
제 날카로운 통찰력에 의기양양해진 레티시아가 선언했다.
“사과의 의미로 나도 오늘은 춤을 추지 않겠어.”
“아니―.”
“여기, 경의 곁에서 오늘 남은 하루 경의 충실한 하인이 될 거야.”
이 순간 레티시아의 미모가 빛을 발했다. 물에 젖어 갸름하고 조막만 한 얼굴에 달라붙은 붉은 머리칼이 달빛 아래 반짝이며 빛났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색이 짙어지는 녹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아름다웠으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말려 올라간 도톰한 입술은 수많은 사내의 꿈에 나타나 유혹했다. 그 어떤 헛소리라도 무심코 혹하게 하는 마법 같은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레스는 불현듯 정신을 차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니까? 나라 제일의 미녀한테 수발받는 기회가 매일 오는 줄 알아?”
“그래서 부담스럽습니다.”
“그럼, 가면이라도 쓰는 게 낫겠어?”
그 말에 레스는 무심코 공주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보석 같은 녹안이 장난기를 담아 반짝였다.
공주는 자신의 매력을 표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건강한 자존감과 당당함이 밤하늘 아래에서도 햇빛처럼 넘쳤다. 어쩐지 아득한 심정이 되어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말씀대로 공주님이 이리 아름다우시니.”
가볍게 상체를 숙이자 코가 닿을 듯한 거리까지 얼굴이 가까워졌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공주가 그를 올려다본다.
공주는 왜 제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언젠가는 제게 익숙했던, 그러나 지금은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런 당당함, 호의 섞인 대화, 낯설게만 느껴지는 정상의 감각.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비스듬히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을 계기로 제가 공주님께 마음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려고 그런 약속을 마구 하십니까?”
“경은 나랑 이미 말을 섞었잖아?”
“그렇, 지요.”
“그럼 경은 언제고 나한테 빠지게 되어 있어.”
자신만만하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자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야위고 지친 얼굴이 순간 놀랄 정도로 소년 같아 보였다. 황당함인지, 흥미인지 모를 표정으로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제가 공주님께 빠지기라도 하면, 책임져 주시는 겁니까?”
그 표정이, 어째서인지 레티시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저런 식으로 웃는 걸까.’
그 미소는 이 어두컴컴한 밤에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등에서 묻어났던 짙은 체념과 닮았다. 애당초 그래서 그녀는 레스 키시르가 자살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손을 뻗게끔 하는 얼굴이었다.
“책임진다는 말은 별로 안 좋아해. 경이 짐 덩이처럼 들리잖아.”
“…….”
“경이 내게 흥미가 있고, 내가 경을 궁금해하면, 서로의 호기심을 채워 줄 수 있겠지.”
레스는 제 뺨에 서슴없이 닿아 오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좋아.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잖아.”
그 손이 나긋하게 피부를 쓸어내리며 뺨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덜미로,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내려갔다. 손가락이 지나간 곳을 따라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달콤한 감정에 취해 볼 수도 있고, 이 넓고 광활한 세계에서 서로 돕고 사는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또.”
톡, 손가락 끝이 마지막으로 가슴을 장난치듯 찔렀다. 레티시아의 상체가 기울어지더니 한 톤 낮아진 목소리가 남자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거지.”
“친구, 입니까…….”
“경?”
순간 이 부족한 광원 아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레스 키시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 모습은 다음 순간 마치 신기루였다는 듯 사라졌다. 그 자리를 천천히 물에 잉크가 번지는 듯한 미소가 채웠다.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까까지의 부서질 것 같은 미소와는 달리, 이번의 미소는 녹아내릴 듯이 달콤했다. 아까까지의 병자 같던 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퇴폐함과도 닮아 있는 매혹적인 곡선이었다. 흠뻑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자 처연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젊은 장교는 제 가슴에 닿아 있는 레티시아의 손을 잡아 입가로 끌어들였다. 차갑고 메마른 입술이 손끝에 닿자 레스 키시르는 고개를 살짝 모로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주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어느 쪽이 될 것 같습니까?”
그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전체적인 건강 상태가 워낙 안 좋다 보니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잔뜩 달아올랐다가 얼굴이라도 보면 식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만큼 짜증이 나고 허무한 일도 없는데.
할까, 말까.
“글쎄. 음, 일단 경은 말이야.”
손가락이 창백한 입술에 닿았다. 지그시 누르자 남자가 순순히 입을 벌려 안을 드러내 보였다. 얼음 사막같이 메마르고 창백한 남자의 몸에서 유독 붉고 습한 점막이 그녀의 손가락을 유혹하듯 머금었다. 뱀처럼 유연하게 손가락에 감겨 오는 혀를 손끝을 구부려 긁어내리며 레티시아는 결국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그녀의 손이 흠뻑 젖은 치맛자락을 한쪽 무릎이 훤히 드러나도록 들어 올렸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잘 빨아 줄 것 같아.”
그리고 그 말에 레스 키시르는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