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걸음을 디디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에 지지는 것만 같아 레스는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어느새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다. 등 뒤로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하나하나 예리하게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목이 졸리는 듯한 압박감, 공기가 부족한 머리가 호소하는 어지러움, 아직 채 완벽히 회복되지 못한 다리 상처의 통증.
‘자네 때문이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자네만 없었더라면 일이 이 정도로 끔찍하게 잘못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본 거야?’
왕자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머리를 윙윙 울렸다. 다시금 소매로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구역질을 억눌렀다. 그는 후들거리며 꺾이려는 다리를 억지로 질질 끌어 정처 없이 걸었다.
어두운 곳으로. 어두운 곳으로. 빛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벌레처럼. 절 잡아먹으려 드는 수군거림이 없는 곳으로.
“큿, 허억.”
턱까지 차오른 숨에 가슴께를 움켜쥐며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는 바닷물이 차오르는 바닷가에 있었다. 왕가의 피서지로도 쓰이는 이 화려한 궁전은 사금같이 고운 백사장을 자랑하는 노테르 만의 해변을 후원 대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파도가 억지로 움직여 통증으로 욱신거리는 다리에 무심하게 부딪혔다.
기습처럼 솟구치는 통증에 그는 다리를 움켜쥔 채 소리 없이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신음을 참았다.
그의 간수 역할을 맡았던 데캉트 왕국군의 장교는 지독한 골초였다. 그자는 그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시가를 태우곤 했다. 남 피에트 산 시가의 숨 막히는 연기가 그 좁은 옥실을 가득 메우면 어깨가 빠지고 손목의 피부가 다 벗겨질 때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던 그는 재갈이 물린 채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빌어도, 고함을 질러도, 차라리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해도 장교는 마치 기계처럼 도구를 고르고, 흔들거리는 등잔불에 비춰 그 상태를 확인하는 일련의 동작 후 그의 몸에 찔러 넣었다.
살이 베어지는 날카로운 통각, 힘줄이 잘려 나갔던 순간의 감전된 듯한 아픔, 칼이 빼내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타는 듯한 아픔.
피가 정말 끊임없이 흘렀다. 바닥이 온통 붉어서 그는 장교가 제 피에 잠겨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붉어서 머리가 아팠다.
‘키시르.’
그 빌어먹을 작자는 마치 사관학교의 은사를 떠올리게 하는 친근함으로 제 이름을 불렀다.
‘그냥 포기하고 이쪽으로 붙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을 알았음에도 레스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마치 전생의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기억.
그러나 그는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뼈와 수술 시기를 놓쳐 다시 봉합할 수도 없는 힘줄이 통증을 호소할 때마다 자신이 그 순간의 선택을 기억해 낼 것임을 알았다. 해부된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긴 다리를, 지금 와서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을 떠올리고 후회했다.
한때, 그는 침묵을 택했다. 그 대가가 이것이다.
망가진 다리. 끝장난 미래. 진창에 처박힌 명예. 왕가의 자비에 빌붙어 연명하는 목숨.
그 연회장에서 모여든 이들의 혓바닥으로 공개 처형을 당하는 순간, 그는 제 인생이 떨어질 수 있는 곳만큼 떨어졌다 생각했다.
그 착각은 공주가 직접 말까지 걸며 친절하게 깨트려 주었다.
‘사실, 오빠가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손이 떨렸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대체 여기서 더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나, 그대가 마음에 들어.’
은근하게 여지를 흘리는 목소리, 거절은 생각지도 않는 듯한 자신만만함. 지금의 제 모습에서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구석은 터럭도 없는데 공주나 되는 이가 제게 왜 이러는 걸까.
제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필요한 게 아니고서야 제게 관심을 표할 이유가 있을 리가.
속이 메스꺼워지는 깨달음이었다. 공주가 진정으로 그걸 원한다면 그에게는 길게 거부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이었다. 그는 이걸 위해 끝끝내 입을 다문 게 아니었다.
이런 삶을 위해서 그토록 악착같이 죽음에서 도망쳤던 게 아니었다.
촤아아, 파도가 그의 몸을 적시며 부서져 내렸다. 밀물 때가 되어 천천히 차오르는 바닷물이 어느새 그의 발목을 적셨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레스는 앞으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레스 키시르가 연회장에서 모습을 감춘 후, 득달같이 달려들던 다른 초대객들의 파도에서 허우적거리던 레티시아가 클럽 멤버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세르시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달려들었다.
“공주님, 설마 지금 처음으로 거절―.”
“아니거든?”
“어머어머어머, 정말! 정말인가 봐! 이게 웬일이래요? 어머어머어머!”
꺅꺅거리는 목소리에 레티시아의 신경이 날카롭게 서다 못해 갈려 나갈 지경이었으나 세르시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승전 축하 연회는 너무나 지겨웠고, 심술과 지루함에 시작한 놀이는 정말이지 기대도 안 했던 월척을 건져 올렸다. 레티시아 공주를 거절할 정도로 간 크고 욕구가 없는 남자는 정말 없었다.
순식간에 머리 여덟이 모이더니 레티시아를 제외하고 쑥덕거렸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리, 리츠? 란스?”
“레스 키시르. 젠트리 출신이라는데?”
“우리 오빠한테서 들은 적 있어요. 뷘터하우젠 수석 졸업자였다면서요? 왕자 전하랑도 졸업 동기였고.”
“아, 혹시 그래서 왕자 전하가 그쪽 부대로 임명되신 거예요?”
“아니, 그래도 훈장 받은 거 빼놓고는 뭣도 없는 거잖아? 대체 무슨 용기가 나서 공주님을 그렇게 딱 걷어차 버려?”
“차인 거 아니거든!”
“아, 공주님, 여기까지 다 들렸거든요? 어디서 진실을 왜곡하시려고. 저리 가세요, 훠이!”
순식간에 공주의 머리를 밀어 낸 후 좀 더 은밀한 쑥덕공론이 이어졌다. 왕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음에 통곡하던 모왕의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가 되어 레티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기에 끼고 싶지도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묘한 소외감에 그녀는 그 분노를 득달같이 달려들어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는 기자들에게 쏟아 냈다.
“찍으라고 허락 안 했거든요? 아, 좀 찍지 말아요, 진짜!”
물론, 특종 거리를 눈앞에 둔 기자들이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을 필두로 질문이 쏟아져 내렸다.
“공주님, 춤 신청 실패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이 정말이십니까?”
“지금까지와는 꽤 다른 상대였습니다만 혹시 오라비의 부관이기 때문입니까?”
“소설 쓰지 좀 마요!”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는데도 오히려 정면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공교롭게도 왕은 승전 연회를 선전용으로 써먹으려고 기자들을 잔뜩 불러들였고, 정치부뿐만이 아닌 가십난 기자들 역시 구름처럼 몰려들어 있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터지는 플래시의 향연에 내일 조간지에 떡하니 실릴 헤드라인이 머릿속에 좌라락 스쳐 지나가는 듯해 레티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늘은 망했어. 완전 텄어.’
“공주님, 대답을 해 주십시오! 아군의 기밀을 흘리고 다녔다는 풍문이 있는 이를 상대로 밤을 보내시려던 것이 정말입니까?”
“안 자요! 의례적인 인사치레예요! 방금 밤이 어쩌고 한 말 한 기자분, 소속이랑 이름 당장 대요. 희롱죄로 고소할 줄 알아!”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게 왕실의 입장입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만 같은 속 터지는 심정에 레티시아는 와인을 그대로 한 잔을 쭉 비워 버리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소동을 듣고 조심스레 다가오는 경비병들에게 재빨리 눈짓하자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그녀와 기자들 사이로 인간의 벽을 만들었다.
“공주님! 공주님 질문을!”
“대답해 주십시오! 국민들은 해명을 요구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실 수는 없습니다!”
벽 너머로 악악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진저리를 치며 재빨리 연회장에서 홀로 빠져나왔다. 평소라면 사진도 포즈까지 취하며 찍어 줬겠고, 저런 정신 나간 질문들을 같은 헛소리로 받아치는 것도 나름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다 박멸해 버려야 할 메뚜기 떼 정도로 보였다.
“아, 진짜, 텄어. 완전 망했어.”
내일이면 린시가 조간 1면이 제가 아니라고 징징댈 거다. 이만한 돈과 노력을 쏟아 넣었는데도 아들이 조명을 받지 못한다면 어머니는 또 엄청 화를 내시겠지. 그리고 언니는.
‘내가 언젠가 이럴 거라 했지?’
“……돌아 버리겠네.”
그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내가 뭐랬어, 라는 말을 하는 날이라도 오면 그녀는 목숨을 걸고 하극상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이게 다 레스 키시르 때문이다. 철천지원수지간이라도 춤 신청한 상대를 그렇게 단번에 거절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다리를 진짜로 절고 있는 상대에게 그것도 모르고 춤 신청을 한 건 사실이라 그녀는 마음껏 상대를 욕할 수도 없었다.
“아으, 진짜!”
한껏 모양을 내 꼬아 올린 머리칼이 거친 손길에 부스스 흐트러졌다. 아예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핀을 뽑아내자 새빨간 머리칼이 굽이치며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머리를 쥐어뜯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참을 사람 없는 수정궁의 어두운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레티시아는 마음을 정하고 홱 몸을 돌렸다.
깔끔하게 레스 키시르를 찾아내서 사과를 한다. 없었던 일로 한다.
그리고 다시 잘 꾀어서 그 남자가 그녀의 발아래에서 엉엉 울며 발을 핥게 해 달라고 빌게 한다.
“완벽해.”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을 거부한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를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없다.
완벽한 계획에 자신이 너무나 기특해져 턱이 한없이 치켜 올라가는 듯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하자 레티시아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수정궁은 오로지 연회와 왕실의 피서를 위해서만 오픈되는 여름 궁전이라 그리 넓지 않았다. 그중에서 레스 키시르가 갈 만할 인적이 없는 곳은 더욱 한정되어 있었다.
몇 군데를 뒤져 밀회를 나누는 남녀를 기겁하게 하고 불법으로 약을 피우는 이들을 경비병을 시켜 끌어낸 후 그녀는 어느새 백사장이 이어지는 곳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수정궁은 그 이름에 걸맞게 복도를 따라 꽃처럼 수정이 피어나 있었다. 그 색색의 수정 사이에 끼워 놓은 전구의 빛이 유백색 복도와 벽에 반사되어 오색으로 반짝였다. 손가락 끝으로 회랑의 난간을 쓸어내리며 레티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조금만 더 지나면 자정인데 생각보다 레스 키시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시녀들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했고, 초대객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경비병에게 물어봤는데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힐에 익숙하다 해도 손톱만 한 뒷굽의 힐을 신고 수정궁 전 부지를 다 뒤지는 것은 꽤 지치는 일이었다.
슬슬 아파 오는 다리 때문에 한쪽 힐을 벗어 들고 발목을 천천히 풀어 주고 있을 때였다.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순간 모습을 드러낸 만월의 빛이 해변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빛을 반사해 찰랑이는 검푸른 해수면을 별생각 없이 바라보던 레티시아가 화들짝 놀라 몸을 기울였다.
허리까지 잠기는 물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그녀가 지금까지 발이 부어터질 듯 찾고 있던 칙칙한 지푸라기 색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조금 비틀거리던 그 몸이 한 발짝 더 수심이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키시르 경!”
이것저것 생각할 새도 없이 레티시아는 힐을 벗어 던지고 달렸다. 발이 푹푹 백사장에 파묻히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이 다리에 휘감겨 몸이 비틀거렸다. 머릿속에는 내일 조간 헤드라인이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충격! 절름발이에게 춤을 권한 레티시아 공주의 몰지각한 행위, 부상병을 자살로 몰아넣어.]
[‘본래부터 마음이 약한 이였는데…….’ 공주가 생각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다.]
[레티시아 공주의 남성 편력,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죽으면 안 돼, 키시르 경!”
필사적인 외침과 함께 레티시아는 몸을 날려 레스 키시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공주―.”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던 레스 키시르의 얼굴이 황당함과 놀람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물을 잔뜩 먹은 옷자락이 다리에 엉겨 붙었다.
“으, 으아앗!”
전혀 공주답지 않은 비명과 함께 그녀는 레스 키시르와 엉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