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6)

2.

‘하느님.’

연회장 한복판으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녀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어색하게 웃어 주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며 레티시아는 속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고도 또 쥐어뜯었다.

‘다시 제가 술을 마시면 그냥 뇌를 해파리로 바꿔 주세요.’

생존 본능만 남아 있는 해파리라면 이런 자기 파괴적인 헛짓은 못 하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지저로 파고드는 상념에 그녀는 그냥 생각을 포기했다. 등 뒤를 슬쩍 돌아보니 자비심이라고는 지나가는 개한테나 줘 버린 클럽 멤버들이 눈을 빛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죽어도 그녀가 생기다 만 것같이 생긴 남자와 춤추는 걸 보고 죽겠다는 열의가 느껴졌다.

결국,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한 레티시아는 제 주변에 모여드는 사내들에게 대충 웃는 얼굴로 대꾸하며 그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클럽 멤버들의 가학적인 성향을 충족시킬 정도의 대단한 외모이나 그녀에게 생리적 혐오감은 주지 않을 그 절묘한 균형을 맞출 수 있을 얼굴의 소유자.

벤호프 자작은 기념비적인 오늘의 연회를 위해 머리를 감지 않았다.

라시노엘 경은 개성적인 얼굴이나 그러므로 의외로 숨겨진 팬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빌 백작은 이미 해파리를 뇌 대신 장착하고 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얼굴의 사내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은데 그들을 애써 외면하고 꽝과 지뢰 사이에서 고민하려니 속이 더부룩해질 정도였다. 보통 때라면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날아다녔을 발걸음이 오늘따라 축축 처지기만 했다.

그때였다.

그녀에게 열성적으로 말을 거는 인파 너머로 연회장 한쪽 구석에 홀로 서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자를 때를 놓쳐 덥수룩하게 기른 지저분한 옅은 갈색 머리칼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이는 서른은 넘지 않았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입고 있는 흰색과 금색의 왕국군 의전복에 달린 견장 줄은 세 줄이었고, 피 같은 장미 장식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건 오늘 왕이 사탕처럼 흩뿌렸던 성 미카텔라 훈장 수료자의 상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남자가 오늘 연회의 주인공 중 하나인 왕자의 부관이라는 말이었다. 제1특수부대 지휘관의 부관이었다면 적어도 중위, 진급이 빨랐다면 대위까지 진급한 유망주였다.

이렇게 군침을 흘릴 거리가 많은 인사라면 호기심에라도 이리저리 말을 붙여 볼 만한데 그 주위에는 정말이지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이 연회장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전기장이라도 친 듯 그의 주위에만 휑하니 공간이 있었다.

‘누구지?’

왕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을 시간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훈장 수여식이 끝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고개를 들이밀었던 레티시아는 오라비의 이 부관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다행히도 그녀는 귀가 좋은 편이었다.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요? 성 미카텔라 훈장을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자에게 주시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이라면 모를까, 저자는 술김에 적의 첩자에게 부대의 암구호를 죄 불었다잖아요. 제1특수부대가 거의 전멸한 건 따지고 보면 저자 때문이 아니에요?”

“대체 왜 다들 쉬쉬하는지 몰라요. 자식을 잃은 부모만 불쌍하지요. 레파르 후작이 결투로 저자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어 얼마나 이를 갈았는데.”

“귀족도 아닌 젠트리 태생이라면서요? 아비는 가지고 있던 장원이 망해서 나무나 실어 나르던 장사치였다던데 본래라면 이 수정궁에는 발도 들이지 못했을 천한 것이.”

“그래도 어차피 끝났잖아요? 군에서도 퇴직당하고, 들어 보니 제 형도 쪼들린다니 거리에 나앉는 것도 금방이지요.”

레스 키시르.

연회장 하객들의 입방아 위에서 장렬히 화형당하고 있는 젊은 대위의 이름이었다.

하객들은 딱히 소리를 죽여 쑥덕거리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괴롭히려는 듯 목소리를 대놓고 높였다. 그 소리가 분명히 다 들렸을 텐데 그는 벽에도 기대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서 시선만을 살짝 내리깔고 있었다. 부스스하게 늘어진 머리칼로 가려지지 않은 입매는 무표정하게 다물려 있었고, 양옆으로 늘어트린 어깨에도 힘이 들어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용물은 몽땅 사라진 채 껍데기만 그 자리에 세워 놓은 듯했다.

제 잘못으로 제 부대원들을 전멸로 몰아넣은 인간이 보일 만한 상식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흐응.”

레티시아가 손끝으로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 공주님?”

그녀에게 다가와 신나게 떠들던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옮기는 레티시아의 모습에 당황한 듯 그녀를 불렀다. 그런 그에게 미안하다는 표시로 손 키스를 날린 그녀는 제게 몰려드는 인파를 익숙하게 헤치며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영웅에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레티시아는 딱히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부모 잘 만나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먹고 잘사는 다른 한량들처럼, 그냥 이대로 쭉 나라가 망하지 않고 잘나갔으면 좋겠다, 정도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죄 없는 이들의 아들딸들이 수없이 죽어갔다고 해서 그 누군가에게 욕을 쏟아붓기에는…… 글쎄.

고의로 그 죄 없는 아들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이의 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안녕, 키시르 경.”

그녀가 레스 키시르의 앞에 정확히 멈춰서 말을 걸자 주변의 수군거리던 소리가 마법처럼 뚝 끊겼다.

‘이제야 조용해졌네.’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는 그제야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저를 응시하는 레스 키시르를 바라보았다.

‘……음침해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남자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야위어 보였다. 장교들의 예복을 기성품으로 뿌릴 정도로 국고가 빈약하지는 않을 테니 맞춤옷이 적어도 한 사이즈가 커질 정도로 살이 단기간에 빠졌다는 말이다. 특히 남자는 키가 큰 편이라 더 왜소해 보였다. 까칠하게 말라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에서 얄쌍하니 옆으로 긴 눈 아래가 거뭇해 해골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해골은 순순히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히 몸을 숙였다.

“공주님.”

목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목구멍을 긁으며 나온 목소리는 거칠고 갈라져 결코 듣기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른 훈장 수여자들을 흘끗 바라보니 다들 이날을 위해 칼을 간 듯 정돈한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광이 날 정도였다. 젠트리 출신이라도 요즘은 대귀족보다 더 부유한 이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도 꼴이 저 정도라니 본가의 재정 상황이 꽤나 빈약한 듯했다.

주위의 시선이 모조리 이쪽에 꽂힌 것을 피부로 예민하게 느끼며 그녀는 흘끗 남자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원수 같은 클럽 멤버들의 경악한 낯이 보였다.

‘이 정도라면 저 각다귀 같은 것들도 만족할 테고.’

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지나가던 급사를 손짓으로 불러 와인을 받아 들었다. 허리가 잘록한 크리스털 잔 안에서 로제 와인의 투명한 연분홍색이 가벼운 손목의 움직임에 맞춰 찰랑였다.

“훈장 수여 축하해.”

“……감사합니다.”

“오빠의 곁에서 보좌했다지?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 덕분에 오빠가 무사히 돌아왔어. 동생으로서 감사하는 바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연회는 처음인가? 브륀셀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 아닌데?”

“능력이 부족하여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습니다.”

“겸손하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레티시아는 나름 당황했다. 아주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높고 굳건한 철벽이었다.

레스 키시르는 마치 그녀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듯 굴었다.

그녀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그런 척을 하는 이는 있었다. 정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녀가 말을 붙이면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왕족이 의회의 장식품이 된 게 아니냐 조롱해 대는 이들이 나타나는 시대라 하더라도 제3왕녀로 란스타인 제1무역항 리베르탄의 영주이자 왕국에서 제일 많은 세금을 내는 루쉔하이츠 상회의 실소유자라는 자리는 달랐다.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원하는 것이 없어도, 결국에는 원하게 되었다.

특히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그리되는 것을 원한다면.

“키시르 경.”

살풋, 눈을 휘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레티시아는 와인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혀끝에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쓴 로제의 맛이 남았다.

“사실, 오빠가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자기 이야기 하는 것에 그리 취해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 이야기에 시간을 할애할 리가 없다.

“그래서 쭉 궁금했지.”

한, 오 분 전부터.

이 사람은, 훈장 수여식도 다 끝난 지금까지 무슨 심정으로 이 자리에 꾸역꾸역 붙어 있어서 저 수군대는 소리를 다 듣고 있는 걸까. 원하는 게 있는 거라면 왜 그녀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까.

레스 키시르는, 그녀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그렇기에 옷깃 위로 보이는 가냘픈 목선이 더 도드라졌다. 벗긴 채 엎드리게 해 놓고 척추를 따라 핥아 내리면 저자는 어떻게 몸을 떨며 흐느낄까.

그 목소리는 어떻게 갈라질까.

저 세상 다 산 것 같은 낯짝을 하는 저자는, 쾌락에 젖어 어떻게 흐트러지고, 그 후에 절박하게 어떻게 매달릴까.

습관처럼 혀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레스 키시르에게 내밀었다. 남자의 시선이 보석같이 투명한 빛으로 찰랑이는 로제의 색에서 그 잔의 스템을 들고 있는 가늘고 우아한 흰 손가락으로, 또 그 잔에 닿았던 입술이 그리고 있는 유혹적인 선에 머물렀다.

그 시선을 눈으로 좇으며 레티시아는 미소를 더욱더 짙게 했다.

“경, 나랑 춤출래?”

그 말에 레스 키시르의 눈이 순간 놀람으로 커졌다.

“나, 그대가 마음에 들어.”

주위에서 소리 죽인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피부로 느껴지는 경악과 당황의 공기를 만끽하며 레티시아는 의기양양하게 답을 기다렸다. 감격해서 쩔쩔매는 것도, 당황해서 굳어 버리는 것도, 제 의도를 의심하며 애써 사양하는 말을 늘어놓는 것도 다 예상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사교계에 첫선을 보이는 촌스러운 사내 하나 구워삶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때마침 바뀐 음악에 맞추듯 레스 키시르가 손을 뻗었다.

“공주님.”

그 손은 그녀의 손을 잡지도, 그녀가 내민 잔을 받아 들지도 않았다. 살짝 제게 기울어진 잔의 바닥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간 남자의 눈이 사르르 접히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무언가를 억누르듯 갈라지며 살짝 떨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꾸에 그녀가 미간을 찡그린 순간,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차갑고 까끌까끌한, 사막의 모래알 같은 입맞춤이 와인 잔에 감은 손가락에 닿았다. 그 생경한 감촉에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다리를 다쳐서 공주님의 파트너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게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었나. 그녀는 몰랐다.

“공주님의 손을 잡기에 더욱 어울리는 이에게 그 영광을 내려 주세요.”

입술이, 그다음에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영광을 발부리에 걸린 돌을 걷어차는 듯한 무심함으로 입에 담은 남자는 손을 정중히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등을 돌려 아예 자리를 떠 버리는 레스 키시르가 정말로 왼쪽 다리를 가볍게 절고 있어서 레티시아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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