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46)

First Movement

1.

그러니까, 그건 한 일 년쯤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데캉트 왕국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흰색과 금색의 군복을 입은 란스타인 왕국군은 수도 브륀셀 대광장을 지나 행진하고 있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행진곡이 울리고 거리 양쪽에서 애국심에 찬 시민들이 바구니 가득 담아 온 꽃들을 마음껏 흩뿌렸다. 그 행렬의 맨 앞에는 레반스타인 왕가의 특징인 불타는 듯한 새빨간 머리를 한 제2왕자가 군중을 향해 아낌없이 미소를 뿌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왕의 혈족이 이끄는 오천의 정예 부대. 란스타인 왕국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군의 위용에 걸맞은 위풍당당한 행렬이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아주 화창한 초봄의 오후였다. 란스타인 왕국군의 영광스러운 앞날을 하늘이 보장하는 것 같았다.

5층 펜트하우스에 있는 클럽하우스 발코니에 비스듬히 늘어진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은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조간을 들어 올려 보곤 킥킥 웃었다.

“모왕 폐하께서 돈 많이 쓰셨겠네.”

신문 맨 앞장에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출정 연설을 하는 제2왕자의 흑백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그 말에 그녀 주변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던 이들이 피식거리는 웃음을 삼켰다.

“저번에 뵀을 때 왕자님의 코가 저렇게 높진 않으셨던 것 같던데요.”

“아, 그러고 보니 눈도 저렇게 크진 않지 않았어요?”

“신성한 진실만을 담아야 하는 신문에 실릴 사진에 보정을 하다니, 세상에 망조가 들었군요.”

이미 테이블 위에는 열린 와인 병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기분 좋게 취해 얼굴이 발그레해진 가운데 레티시아는 턱을 괴고 클럽하우스 아래를 행진해 가는 오라비의 뺀질뺀질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잔을 단숨에 비웠다.

제2왕자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이 뷘터하우젠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모왕이 그 학교에 부어 넣었던 수천만 데캇의 후원금 때문이었다. 겨우겨우 졸업하고 나서 총을 마지막으로 쥐어 본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할 인사에게 육군 총사령관이라니.

지금까지 잘만 하고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내가, 장담한다.”

탁, 꽤 큰 소리를 내며 크리스털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우리 영광스러운 란스타인 왕국군은 결국 그 데캉트 왕국 놈들을 때려잡을 거지만.”

모든 멍청한 짓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는 법이다.

“그 전에, 우리의 친애하는 오라버님께서는 적어도 한 번! 영예로운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오시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아주 크게 일을 망쳐서 자기 군을 곤란하게 하시지 않을까!”

그녀를 위해 변론을 하자면 그녀는 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굴러온 돌에 총사령관직을 빼앗기고 반강제로 귀환 명령을 받은 그녀의 언니를 많이 좋아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평소보다 좀 더 많은 알코올을 섭취한 상태였다. 그리고 일단 란스타인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내가, 오라버니께서 정말 멀쩡하게 이기기만 하고 돌아오시면 여러분이 원하시는 벌칙 뭐든지 하나쯤은 수행해 주지!”

그 호언장담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눈을 빛내며 펜과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술기운에 그 장담을 호기롭게 적어 내린 레티시아는 끼고 있던 인장 반지로 승인까지 마쳤다.

지난 21년의 세월 동안 그녀에게 자제력과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르치려 노력했던 그녀의 언니가 봤으면 피눈물을 뽑았을 꼬락서니였다.

어쨌든 바로 그 언니를 위한 분노의 음주 파티를 벌였던 레티시아는 자기가 술에 취해 내뱉었던 이 호언장담 따위는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일 년 후 승전식 연회 날까진 말이다.

* * *

승전식 연회는 그야말로 그녀의 인생에 두고두고 박제될 만한 기분 더러운 이벤트였다. 진작 좀 나가 죽어서 사회에 보탬이 되어 주지 않을까 하고 반쯤 진심으로 바랐던 오라비가 예상외로 꽤 건실한 성적을 내고 귀환한 것이다.

그가 직접 이끌었던 제1특수기동대는 한때 적들에게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긴 했으나 그 패배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적의 본대를 거의 전멸시키면서 전선을 크게 뒤로 물렸다. 그 직후 레콘 강이 얼어붙고 혹한기가 닥치며 두 나라는 일시적인 정전 협정에 사인했다. 본대가 전멸하지 않았다면 데캉트 왕국이 정전 협정 테이블에 앉을 리가 없었기에 신문들은 제2왕자를 이 정전 협정을 끌어낸 일등 공신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아들이 첫 출정에서 끌어낸 괄목할 만한 전공에 크게 기뻐한 이스칸타 3세는 살아남은 아들의 부대원들에게 그야말로 훈장을 흩뿌렸다. 5년에 한 번, 10년에 한 번 수여되곤 했던 성 미카텔라 훈장이 하루 만에 다섯 명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여러모로 기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 만한 기삿거리가 산재한 자리였다.

그리고 오라비의 패배를 속으로 은밀히 바랐던 대가로 레티시아는 콧대가 천장을 찌를 기세의 오라비에게 붙잡혀 거의 반 시간을 시달려야 했다. 온갖 미사여구와 빙빙 둘러 가는 화법으로 장식된 자기 자랑에 얼굴 근육이 경련할 때까지 웃음 띤 채로 고개를 끄덕여 준 레티시아는 왕자가 멀어지자마자 연회장 한구석으로 도망쳐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린시 오빠는 매일 어떻게 거울은 보나 모르겠어. 그 잘나신 얼굴을 영접함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실제로 한 다섯 살은 늙은 듯한 공주의 모습에 어느새 그녀의 주위로 모여든 영애들이 소리 낮춰 웃었다.

“왕자님의 그런 면모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도 있어요. 귀여우시잖아요. ……나름.”

“귀여움을 찾으려면 개를 길러. 개는 꼬리라도 흔들 줄 알지.”

“그렇게 왕자님을 싫어하시는데―.”

“어허, 싫어하다니. 나는 린시를 싫어하지 않아. 그저, 삶은 짧고 세상에 사람은 많은데 어째서 굳이 친오라비와 말을 섞어야 하나 싶을 뿐이지.”

그 말에 말을 꺼낸 리세 에버튼 브란스타인 백작 영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흙탕 속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도 안 믿겠어요, 라는 의미의 몸짓이었다. 그런 리세를 레티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리세, 또 주간지에 말 이상하게 옮기지 마. 안 그래도 내가 레냐 언니만 좋아하고 린시는 무시한다느니 하는 헛소리가 특종이 되어 뿌려질 때마다 모왕께서 얼마나 구박을 하시는데.”

“음, 하지만 실제로 그러시고…….”

“린시랑은 주기적으로 사진 같이 찍어 주잖아. 다른 사람이랑 있을 때는 언니랑 친한 척도 안 하고.”

“그 누구도 완벽히 만족시키지 못할 노력이라는 말을 드리고 싶지만 안 들으시겠지요.”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어. 왜 사람은 꼭 편을 들어야 하는 건데? 왜 나한텐 대화할 사람을 고를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 거야?”

아, 또 시작하셨다, 라는 표정으로 리세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를 포기하곤 와인으로 도피했다. 이미 와인이 한 석 잔 들어가 감정이 풍부해지고 이성이 희미해진 레티시아는 자신의 열변에 감동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린시도 넓은 세상에 나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도 만나 보고 그래야지. 인맥도 넓히고, 친구도 만들고, 사랑도 찾고. 그리고 굳이 가족과 신문에 실려야 한다면 나랑 같이 가십난에서 씹히는 것보다는 레냐 언니랑 사회 정치란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거야.”

“왕자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걸요? 레오르나 공주님과는 균형이 너무 안 맞지 않나.”

“그렇게 붙으면 진짜 왕위 계승전 같아서 숨이 막히잖아요.”

“그야 그쪽은 진짜 왕위 계승전이잖아. 나는 뭐.”

“진즉 외야로 물러나셔서 인생을 즐기시는…… 음, 자유로운 한 마리 고고한 늑대?”

“미남이면 누구나 덥석 덮쳐서 한입에 잡아먹는?”

그 말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레티시아 역시 같이 킥킥대며 급사가 가져온 와인을 비웠을 때였다. 같이 와인을 홀짝이고 있던 세르시 조세 티린게일 자작 영애가 은근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도 공주님, 다행히 린스베른 왕자님이 승리하셨잖아요.”

“어, 그렇지?”

“패배가 한 번 크게 있긴 했지만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정보가 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부관의 탓이고요.”

“그렇, 지……?”

“지금 공주님, 공들이고 계신 상대는 없으신 거지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인 데다가 세르시의 눈이 과하게 빛나는 게 대단히 불길했다. 본능적으로 일신의 위험을 느낀 레티시아가 도망가려 의자를 슬슬 빼자 세르시의 재빠른 눈짓을 받은 영애 둘이 날렵하게 레티시아의 양팔에 팔짱을 꼈다.

“공주님, 이런 것 사인하신 기억은 나세요?”

수많은 과음과 철야 파티로 얼룩진 기억을 더듬으며 제 혓바닥이 지껄였을 법한 망발을 기억하려 레티시아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그녀의 눈앞에 팔랑이는 고이 접힌 종이쪽지가 그녀의 과오를 친절히 일깨워 주고 있었다.

<나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은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이 아무런 본인의 실책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시 상월 클럽 멤버들이 제시하는 벌칙을 무엇이든지 한 가지 수행할 것을 란스타인의 청월 옥좌를 걸고 맹세한다.>

“이, 이건……! 이건!”

이 대각선으로 삐뚤어지는 필체는 럼이 한 병 정도 들어간 후 자신의 필체였다. 발뺌도 하지 못하도록 끝에는 제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인장이 찍혀 있지 않아도 란스타인의 왕족이 청월 옥좌를 걸고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이건 입이 아니라 주둥이요, 손이 아니라 만악의 근원임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며 그녀가 그 각서를 필사적으로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주위의 영애들은 꺅, 소리를 내지르며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레티시아가 주최하는 온갖 기상천외한 유흥거리로 가득한 파티에 익숙해져서 이런 정석적인 연회에는 일찌감치 흥미를 잃은 그녀들은 때마침 찾아온 이 건수에 상어 떼처럼 달려들었다.

저 꼴을 보지 않으면 이 현실도 사라지지 않을까.

열심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레티시아에게 세르시가 애교스레 팔짱을 꼈다.

“공주님, 브륀쉘 사내의 미의 척도는 공주님께 간택되느냐 마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

“……개인의 취향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

“그래서 연회장이란 연회장에 오기만 하면 남자란 남자들이 다 공주님만 신경 쓰잖아요. 소외되는 여자로서 좀 억울해요. 누군 미남이랑 안 놀고 싶나.”

“응, 그건 그렇…… 지?”

“그러니까 공주님, 이번 벌칙은요.”

쿡쿡 소리 죽여 웃으며 장난스레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미남 아닌 남자랑 한 번 춤 춰 주기예요.”

그녀는 솔직히 내 눈알을 뽑아 버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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