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8. 순탄치 않은 개회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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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순탄치않은 개회식 (2)
개방행사의 개회식이 치러지는 대강당.
입학식 때와 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는 곳이지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이곳에 도착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니 뭐든 반갑지 않겠냐마는.
“저 아이가 그 1학년인가? 생각과는 좀 다르군.”
“애새끼들이 하는 말이 다 그렇듯이 소문이 많이 부풀려진 모양입니다. 그래도 얼굴이나 몸매를 보면 쓸만할 것 같지 않습니까?”
덕분에 나를 향한 선을 넘는 발언들도 지금만큼은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눈앞에 있는 모든게 반짝반짝 거렸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별것도 아닌 일에 일일이 대응할 기운도 없을뿐더러 내가 했던 것들이 있으니 견제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좋다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거다.
“끄윽”
“죄송합니다. 뭔가 있길래 해충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 참고로 정강이가 부러져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헌터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이런 개새... 윽.”
“미안하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저놈은 내가 잘 교육시키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격을 넘은 듯한 중년남성에 관련된 것도 아니고.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조금 전에 벌어졌던 교문 앞에서 두 명의 존재가 격리공간을 넘어 아카데미를 말아먹을 뻔한 사건 때문이었다.
‘후…. 도대체 왜 싸운 거야.’
예상과 달리 그녀들의 싸움은 너무나 쉽게 끝이 났다.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른 내가 무색해질 정도로 격렬한 반발은커녕 일말의 저항조차 없었다.
이지윤은 주위를 격리시킨 마법을 해제하고는 개회식이 시작한다며 대강당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세리아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샤를과 데보라를 공중에 띄우고선 언제 싸웠냐는 듯 유유히 뒤를 따라갔는데 내가 더 이상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 남겨져서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것이다.
‘이미 끝난 일인데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이것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잘 풀린 건 맞다.
계속 싸우는걸 원했던 것도 아니고,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에서 별 탈 없이 넘어간 것도 맞고, 처음 계획한 대로 세리아를 대강당으로 보낸 건 것도 맞으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내 영혼을 반쯤 가출시켜버린 것에 대해서 꿍한 마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지윤이 세리아를 찾아온 이유라던가. 원수지간이라지만 모종의 약속이라도 있는지 선은 넘지 않는 그녀들의 행동이라던가.
앞으로의 행동방식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알고 있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건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직감과 판단력을 가졌다지만 어떻게 있지도 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까지 맞출 수 있겠는가.
흐름을 읽을 줄 알던 그녀라면 가능하겠지만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는 건데.
“하….”
고개를 들어 세리아가 자리한 귀빈석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그게 쉬웠으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
다짜고짜 가서 물어보기에는 이미 끝난 일이라 명분이 부족하고, 다른 방법을 찾자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답을 받아볼 때쯤에는 이미 별 탈 없이 행사가 끝났거나 아카데미아 날아간 뒤일게 분명했다.
결론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수많은 패를 가지고 있던 거치고는 너무나 무력하게도.
“너무 낙관하고 있었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것만 나 또한 평화에 물들어 무뎌져 있던 모양이었다.
마음 한편으로 내가 대처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리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과거의 나를 자책하며 시간을 낭비할 생각 따위는 없었고, 세리아의 의미심장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웬만해서는 연관되기 싫었으나 지금껏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면서 과거를 포함한 내 정체를 밝혀도 문제가 없는 인물은 한 명뿐이 없었고.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SNS에 접속해 그 녀석이 사용하던 이름을 검색했다.
‘한번 죽을 뻔하기도 했고 300년이란 시간 동안 성격이 변해 잠적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생각했던 것만.’
역시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최상단에 떠오른 뻔뻔한 낯짝. 그건 분명 천사에게 들이대다 나에게 토벌당할뻔한 리치 녀석이 분명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팔로워의 숫자가 8000만 명이 넘어가는지는 모르겠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곧바로 채팅창을 열어 필요한 정보를 써 내려갔다.
이지윤과 세리아의 관계를 비롯해 300년간 벌어진 내가 모르는 사건들.
과거의 동료들과 대악마, 대천사를 비롯해 나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의 동태.
마지막으로 300년 전 붉은 달의 주인이자 서큐버스 퀸으로 군림하던 리에나에 대해서.
전부 적고 보니 화면이 가득 찰 정도로 방대한 내용이 되어버렸고, 이 정도 내용이라면 그 녀석이라 해도 꽤나 고생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와 더 많은 정보뿐이었기에 더 늘릴지언정 줄일 수는 없었다.
“후…. 그 녀석이 좋아할 만한 걸 줘야겠군.”
한숨을 쉰 나는 다시 한번 내용을 검토했고,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한 뒤에 마지막으로 그 녀석이 알려줬던 마법의 일부를 적고는 곧바로 전송을 눌렀다.
이제 남은 건 답장을 기다리는 것뿐인데...
“리에나 거기서 뭐 해. 이제 시작하니까 빨리 와서 앉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자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피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휴대폰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샌가 1학년이 있는 구역에 도착한 듯싶었다.
“온통 먼지투성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서아는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주기 시작했고.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남자라도 한 명 잡아먹고 오나 보지.”
유리는 음... 겉으로 저러고 있어서 그렇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거로 봐서 걱정했던 듯싶었다.
그렇다.
어찌 보면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이지훈으로써 미뤄둔 일을 끝냈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지금의 나는 이지훈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다니는 리에나였고, 그런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들과 함께 개방행사를 보내는 것.
그것은 그 녀석에게서 정보를 받는 것과 동급...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과 고민들은 한편으로 밀어두곤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야. 팝콘을 챙겨오느라 조금 늦었어.”
“팝콘?”
“내가 이런 행사를 좀 겪어봐서 아는데 먹을 거라도 없으면 심심해서 미칠걸.”
“머리를 다친 거야?”
곁에 있던 서아가 못 들을 걸 들은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침에 사라진 친구가 너덜너덜해져 돌아와서는 팝콘 때문이라 그러면 어이가 없겠지.
나 같았어도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동정, 고자 등등 엄청난 헛소리를 듣고도 뻔뻔히 반응한 게 나다.
내로남불쯤이야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법.
아공간에서 팝콘을 꺼내 말을 시작하려는 서아의 입에 넣어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받아 네가 좋아하던 초콜릿 팝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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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호텔이 즐비한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 속 가장 화려한 방에 있던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미친…. 이게 도대체 뭐야.”
평소와 똑같은 행동이었다.
공연을 끝내고 SNS를 켜서 자신을 향한 찬양을 둘러보다 개인 메시지를 보낸 미녀 중 한 명을 골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
벌써 20년간 지속해왔고 평화협정이 이뤄진 터라 상대가 천사라 해도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골랐던 여자만큼은 달랐다.
빨려 들어갈 듯한 붉은 눈에 반해 채팅창에 입장했지만, 그곳에서 기다리는 건 수백 년 전 악몽을 떠올리게 만드는 괴물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분명 죽었었다.
달의 주인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서큐버스 퀸과 동귀어진 끝에 죽었고, 그의 마지막을 함께한 용사를 통해서도 재차 확인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적혀있는 저 마법을 이해하고 저렇게 수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 없었고, 어떤 짓을 해서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가 그 녀석이라는 게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 없었다.
“일단 한국으로 가야겠어.”
무엇 때문에 이런 시기에 위험한 정보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의 라이프 베슬을 가진 이상 일단은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평생 사용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채팅앱을 열어 피해자들의 모임이라 적힌 단체채팅방에 들어갔다.
목표물을 찾을 때만 연락을 하기로 했기에 단 한 번의 채팅도 올라온 적이 없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의 무덤 앞에서 그들과 했던 약속을 잊지는 않았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지훈 출현. 한국 헌터 아카데미.
수백 년간 멈춰있었던 시간이 움직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