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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서큐버스는 하렘을 꿈꾼다-47화 (47/48)

〈 47화 〉 47. 순탄치 않은 개회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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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순탄치 않은 개회식 (1)

뎅­ 뎅­ 뎅­

한국 헌터 아카데미와 역사를 함께해온 시계탑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등교를 시작할 시간.

평상시라면 침대 속에서 피아를 껴안고 뒹굴거리다 서아에게 붙잡혀 일어났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후…. 어디쯤 도착하셨데?”

한숨과 함께 나보다 먼저 교문에 나와 있던 샤를과 데보라에게 다가갔다.

“리에나가 여긴 어쩐일이야? 어제 어머니가 분명 너한테 나올 필요 없다고 문자를 보냈다 하셨는데.”

샤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으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제 통화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갈 테니 마중 나올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세리아가 오랜 시간 인간들 사이에서 융화되어 살아가고 있다 해도, 그녀의 본모습은 악마이자 고위 서큐버스였다.

레아나 이지윤이라면 당연히 눈치를 챌 것이고. 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만나게 된다면...

‘생각하기조차 싫네.’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지만 이지훈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도 벌여놓은 일들이 많다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샤를이나 데보라에게 말할 수는 없었고.

“리에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고 쳤어?”

“뭔가 찔려서 나온 거 같은데.”

점점 더해가는 그녀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변명을 둘러댔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내가 직접 안내를 하는 게 맞을 거 같아서.”

주위에는 우리처럼 보호자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고.

표정, 동작, 호흡, 발성, 말투 모든 게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긴 하지. 어머니가 좋아하실 거야.”

매사에 꼼꼼한 데다 세리아를 닮아 눈치 또한 빠른 샤를이 속아 넘어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큰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과 달리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리에나. 네가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하려고 혼자 일어나서 준비를 마쳤다고?”

평상시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던 데보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왔을뿐더러.

“당연하지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가 지나가다 들은 게 있거든 기다려봐.”

어물쩍 넘기려고 하니 그녀는 뭔가를 찾으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열심히 화면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으응?”

처음에는 그냥 시간이 남길래 장난삼아 추궁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확신을 가진 거로 봐서는 정말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뭐지? 뭘 들킨 거지? 세리아 몰래 로렌시아에간거? 리에나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한 거? 개인금고를 연 거?’

빨리 반박할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하도 찔리는 것이 많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져 갈 때쯤.

“리에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는데?”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줄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세리아!”

고개를 돌려 은빛 머리와 규격 외의 가슴만 확인하고는 곧바로 품 안에 뛰어들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오지 않았으면 했으나 지금만큼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 갑자기 왜 그래.”

“오랜만이야.”

“오랜만인가? 리에나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만.”

세리아가 당황스럽단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꽉 껴안았고, 나 또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연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말이다.

‘좀만 더 늦었으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달이 날뻔했어.’

타이밍 좋게 등장해준 세리아 덕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샤를은 물론이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던 데보라의 시선까지 완전히 돌려버릴 수 있었다.

어쨌든 상황은 나쁘지 않았고, 세리아또한 쉽게 풀어줄 기색이 없으니 품속에서 달콤한 향기와 가슴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을 즐기...

아니,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안도감에 빠져 한가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나로 인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지만, 그녀들이 보호자인 세리아한태 인사를 하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엄마?.”

“리에나님 세리아님.”

옆에서 반쯤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던 샤를과 데보라가 정신을 차리고 다가왔고, 나는 세리아의 품에서 벗어나 곧바로 자리를 마련해줬다.

어차피 나를 의심했던건 이미 잊혀진듯했으니 시간을 벌며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미안. 내가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사양하지 말고 빨리해.”

그러나 가슴에서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봤을 때 무언가가 부자연스럽다는 걸 느꼈다.

자리를 비켜줬음에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샤를과 데보라도 이상했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조용했다.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세리아가 등장한 이상 이목을 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우리가 이곳에 있는걸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이랬어?”

창백한 표정의 그녀들과는 반대로 너무나 여유로워 보이는 세리아를 바라봤다.

능력이 제한된 내가 느끼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쯤이나 되는 존재가 이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음…. 내가 나타날 때부터였나?”

“왜 가만히 있던 거야?”

“도움이 됐잖아. 내가 여기서 능력을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아지거든.”

그녀의 말처럼 따져보면 도움이 된 건 맞았지만, 이건 마치 우리가 서 있는 이곳만 현실에서 격리한 것처럼.

격리?

“미친….”

자연스럽게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단순히 마력을 덧씌워 소음을 차단하고 인식을 왜곡하는 정도라면 어려운 일이긴 하나 총장을 비롯해 격을 넘은 교수들이면 할 수 있는 일이라 별문제가 없겠지만, 공간을 격리 시킨 거라면 말이 달라진다.

공간을 비트는 기예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뿐더러.

아카데미 안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이지윤!”

다급하게 앞으로 뛰어나갔지만 때는 이미 늦은 듯 보였다.

세리아는 물론이고 모습을 드러낸 이지윤까지 서로를 응시하며 너무나도 즐겁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뇌에 갈 영양분이 몽땅 가슴으로 간 미친년아.”

“300년 동안 남자 한 명 못 사귀어본 노처녀 뱀파이어한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오가는 대화에는 살기가 흐르다 못해 넘쳤고, 더 이상 말로 끝낼 생각 따윈 없다는 듯 마력을 끓어 올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해는 하겠는데 말이지.’

둘 사이에 여러 감정이 쌓여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다른 기억들로 덧씌운다 해도 상처가 쉽게 아물 리가 없겠지.

시대적인 상황이 그랬고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일이라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거니까.

그렇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싸움은 또 다른 얘기였다.

이곳이 어디던가.

사람이 없는 넓은 들판이면 몰라도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아카데미 정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공간의 틈을 비집고 만든 곳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불안정한 곳에서 평범한 헌터도 아닌 저 괴물들이 진심으로 전투를 벌인다?

‘객사하기 딱 좋겠네.’

위험을 감수하고 모든 능력을 발휘한다면 몰라도 현재의 나로서는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변해가는 샤를과 데보라는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저 두 명의 사이로 끼어들어야 한다는 건데.

고위급 서큐버스가 전개한 대마법이 파훼 되며 마력의 덩어리들이 흩날리고.

종의 한계를 벗어난 하프 뱀파이어가 연성한 수없이 많은 무기가 내리꽂히는 전장에 제 발로 걸어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있다면 그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거다.

‘근데 그게 나네.’

하긴 내가 제정신이었다면 서큐버스들이 전부 후퇴한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리에나랑 일대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다.

예상외의 피해는 있었겠지만 죽지는 않았을태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의 나와 리에나가 그랬듯이.

“이!”

마법진 속에서 튀어나온 촉수를 잘라내며 한 걸음.

“미친년들아!”

목을 향해 쇄도하는 붉은 검을 튕겨내며 두 걸음.

“다 죽일 생각이 아니면!”

그 외에도 흩날리는 수많은 전투의 잔재들을 막아내면 걷기를 잠시.

이제는 무기를 꺼내 근접전을 벌이고 있는 그녀들이 눈앞에 들어왔고,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던 대화 내용이 들려왔다.

“너 진짜 뒤질래? 나한테 매혹을 걸어?”

“사랑이 고파 보여서 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면 미 안 해~”

“오늘 저녁은 서큐버스 꼬리곰탕이다.”

역시나 사선을 해쳐오며 열심히 내질렀던 내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뭐 그럴 줄 알았어.’

내 말을 들을 거였음 시작도 하지 않았을 터.

나는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두 개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기며 다시 한번 힘껏 소리쳤다.

지금까지 외쳐왔던 거와 마지막으로 해야 했던 말까지 전부.

“이 미친년들아 다 죽일 생각이 아니면 작작 좀 해!”

마력을 담아 소리를 질렀으니 눈깔이 반쯤 돌아버린 두 명의 귀에도 쏙쏙 박힐 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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