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46. 다가오는 빛과 그림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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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다가오는 빛과 그림자 (3)
“그래서 이번에는 처리할 수 있겠어?”
처리할 수 있겠냐니.
귀찮다며 명령을 내리는 거조차 전화로 하던 사람이 이런 땀내나는 훈련장까지 찾아와서 한 말치고는 너무나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저번 임무에서 실패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한가지뿐이니까.
“나는 너희가 시킨 대로 목표를 죽일 뿐이다.”
“시킨 대로? 누가 보면 우리가 들어오라고 협박이라도 한 줄 알겠어.”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그녀의 말대로 협박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협회 본부에 있는 나에게 아무도 몰래 찾아와 흐름을 조작할 수 있는 그 존재에 대한 소문을 흘리는 게 협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1조장. 생각하고 말을 내뱉는 게 좋을 거야.”
그녀가 나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배후로 다가와 칼끝을 겨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건성건성 하는 듯 보이지만 조직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그녀이기에 예상된 반응이었고,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런 틈조차 주지 않았을 거다.
이미 바닥에 머리가 굴러다니겠지.
그렇기에 거리낌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개 같은 제안만 아니었다면 그림자까지 기어들어 와서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치? 우리가 좀 잘나긴 하지? A급 영웅도 말 한마디로 이렇게 만들고.”
그러나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우리의 단장님께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말이 참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무기들을 거두고는 내 앞으로 걸어 나와 너무나 즐겁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득바득 우기며 임무를 받아온 보람이 있었어. 이런 재미가 또 어디 있냐니까.”
표정과 말투로 봐서는 저 말들은 분명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나를 시험하기 위해 하는 연극 따위가 아니었다.
“하….”
그래서 더욱더 짜증이 치밀었다.
눈앞에 있는 미치광이를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내 실력 따위로는 저 괴물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말로 성질을 긁자니 그것도 무리였다. 저 괴물과 함께한 지 벌써 석 달이 넘어가지만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건들었다간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뒤지겠군.’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주제를 돌려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뿐이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여전히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용무로 이곳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다른 주제에 정신이 팔려있지만, 귀찮다며 부하나 전화를 통해 명령을 내리던 그녀가 직접 자신을 찾아온 거로 봐서는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 맞다.”
그녀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황과 맞지 않는 뜬금없는 행동이었으나 그 모습이 너무나 엄숙해 보였기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듯한 그녀는 지금껏 보여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모습으로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너는 이제부터 교주님을 알현할 거야.”
매우 중요해 보이는 이야기였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괴물이 말을 꺼내기 전에 몸가짐을 정돈하고 상대가 이곳에 있지 않음에도 존대를 할 정도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주?”
분명 그녀의 입에서 나온 교주라는 단어는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곳이 신전이나 교회도 아니고, 악명높은 범죄집단 그림자인데 뜬금없이 교주를 찾는 걸 어떻게 받아드리란 말인가.
“교주? 하 시발…. 죽여버리고 싶은데 이번 한 번만 참는다.”
지금 눈앞에서 마력을 줄기줄기 내뿜고 있는 괴물을 보고 있자면 사과를 보고 귤이라고 해도 믿겠다만은.
어찌 됐든 목표를 이루기 전에 죽을 수야 없으니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실수를 범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단장급이 아니면 모를만한 얘기니까. 이동하면서 대충은 설명해줄 테니 일단 따라와”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훈련장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갔고.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훈련장을 빠져나와 단조롭지만 고급스럽게 장식된 복도로 들어서자 그녀는 아까 설명해주겠다는 말을 지키겠다는 듯이 운을 띄웠다.
“우리 조직의 이름이 뭔 줄 알아?”
“그림자입니다.”
너무나 쉬운 문제였기에 답이 곧바로 나왔다.
5살짜리 아이를 붙잡고 제일 유명한 범죄조직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백이면 백 나처럼 대답할 거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저 표정을 보니 베베꼬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가 이렇게 쉬운 문제를 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A급 영웅 때 엿본 기밀들과 이곳에서 얻은 지식을 총동원하여 숨겨진 의도를 고민한 뒤에야 하나의 단어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역천?”
솔직히 말을 꺼낸 나조차도 긴가민가한 협회 고위층 사이에서 돌던 뜬소문만 무성한 단체였다.
모든 범죄조직 위에 군림하고 심지어는 내가 있는 그림자조차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그런 터무니 없는 말만 무성한 이름.
그러나 소문에 비해 그걸 진짜 믿는 사람은 음모론자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게 존재한다면 이미 협회나 정부는 없어졌어야 마땅했으니까.
“오…. 역시 A급 영웅은 좀 다른가 보네?”
하지만 갑자기 멈춰서서 뒤를 돌아본 그녀를 보아하니 소문 속의 단체만은 아닌 듯싶었다. 저건 어찌 봐도 정답을 맞혀서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설마. 역천이 존재한다는 건가?”
“일단 설명해주기 전에 이름부터 정정해줄게. 역천이 아니라 역천교야.”
“역천교?”
“그래 맞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유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마력이 순식간에 가시화되어 눈에 검은색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내 신경을 잡아끌고 있는 건 전신을 압박하고 있는 그녀의 마력이 아니었다.
“시발…. 저게 대체 뭐야.”
막혀있는 줄만 알았던 복도의 끝에서 검은 마력을 먹어치우며 거대한 순백의 문이 현현하고 있었고, 마력의 방출을 끝낸 그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원래라면 나머지 내용도 내가 알려주는 게 맞겠지만, 네가 배운 검술이 검마의 것이라지?”
“그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연을 얻을 수 있었지.”
아카데미에 다닐적 우연히 만난 어떤 하프 뱀파이어의 도움을 받아 익힐 수 있었다.
그게 검마의 검술이었다는 건 그림자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런 거였나.”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복도에 있는 마력을 모조리 빨아먹고 완전하게 현현된 문을 가리켰다.
“궁금한 건 저 문 너머에 있는 교주님에게 직접 물어봐. 만나보고 싶다 하셨으니 적대적이진 않겠지만... 어쨌든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안내해줘서 고맙다.”
나 또한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바꾼 건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데려와 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문과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을 느낄 수 있었고, 어째서인지 눈을 감았다 뜨고 보니 문 앞에 도착해있었다.
‘뭐지….’
본능적으로는 이상하단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강해진 기운 때문인지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몽롱한 정신으로 문을 열려던 순간.
“선을 넘는 게 되겠지만 네가 걱정돼서 말하는 건데. 그렇게 들어가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너의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교주님의 협조는 필수니까.”
이미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충고가 들려왔고, 목소리에 섞인 마력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뭘 쳐다봐.”
그곳에는 아까 헤어졌던 곳에서 뚱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고맙다.”
“그런 인사는 됐어. 아무리 건방지고 거슬린다 하더라도 부하를 챙기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런 범죄조직에서 들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으나 이제는 일정 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어둠을 비추는 빛이 아닌 빛으로 인해 생겨난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지.”
“알았으면 내 이름에 먹칠이나 하지마. 너를 최대한 온건한 곳으로 데려오려고 별짓을 다 했으니까.”
“제1 무력단 단장님께 누가 안 되도록 하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고는 최대한 날카롭게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문 너머에 있는 교주는 흐름을 조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소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천계의 신과 견줄 수 있는.
아니. 어찌 보면 중간계에서는 신보다도 격이 높다는 거다.
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기운에도 홀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런 거로 도망치거나 겁을 집어먹을 거였다면 애초에 그림자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끼이익 쿵.
거대한 문은 내 의지를 반영하듯 완전히 개방되어 순백의 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나는 문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문 너머의 공간에서 맞이한 광경은.
“음….”
교단과 교주라 해서 거대한 홀이나 신전, 옥좌가 있는 그런 권위적인 모습을 상상했지만, 예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푸른 들판과 아름다운 호숫가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평화롭게 어울려 놀고 있는 동물들은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경계를 더욱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종에 상관없이 피식자와 포식자가 한데 모여 뛰어노는 모습은 현실이 아닌...
“현실이에요. 제가 흐름을 조작해서 그들의 운명을 바꿨을 뿐이죠.”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문이 있어야 할 뒤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재를 깨달은 지금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적대하는 기색 또한 없었기에 차분하게 몸을 돌렸고.
“모든 것을 저에게 통제받는. 싸움이 없는 이곳은 정말 평화롭지 않나요?”
순백의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한 명의 여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신이 역천교의 교주님이신가요?”
“음... 역천교의 교주인건 맞지만, 검마의 후계자를 만난 지금은 그의 오랜 친구였던 한아라고 소개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