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5. 다가오는 빛과 그림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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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가오는 빛과 그림자 (2)
헌터 아카데미의 총장.
은퇴한 헌터중에서도 현역 때 이름깨나 날렸던 사람만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헌터를 양성한다는 임무를 받고, 외부로는 정부와 협회를 상대하며 내부로는 아카데미와 관련된 수많은 서류를 처리한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만 그런 것일 뿐이다.
최고가 왜 최고겠는가 일이 많다면 최악이라 불렸겠지.
실상은 아카데미는 외부에서 간섭할 수 없는 반쯤 독립적인 기관이며 서류들은 밑에 있는 실무진이 모두 처리하기 때문에 총장은 도장만 찍으면 된다.
수십 년간 사람과 마수만 때려잡던 인간들이 운영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런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총장을 하지 않고 이미 길드나 가문을 새워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거다.
결론은 하는 일 없이 평화롭게 말년을 보낼 수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하서진이 있는 이곳 한국 헌터 아카데미만큼은 달랐다.
지금에서야 색이 많이 빠졌다지만 모체가 정부의 주도로 설립된 기관인데다. 실무진들 손에 맡길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후…. 미치겠군.”
처리하고 처리해도 끊임없이 늘어나는 서류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평상시라면 진작에 끝내고 교내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지도해주고 있을 시간이건만, 개방행사에 참석을 알려온 몇몇 존재들 때문에 없던 탈모가 생길 지경이었다.
안전이야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테니 상관없다지만.
이상한 놈들과 마주치지 않게 동선도 새로 짜야 했고, 귀빈석 말고도 그들만을 위한 좌석도 마련해야 했으며, 그녀들의 딸들 또한 케어해야 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이 사실이 퍼져나가지 않았으니 행사 당일만 어찌어찌 잘 넘기면 된다는 거였는데...
띠링
띠링
띠링
조금 전부터 멈추지 않고 울리는 메일의 수신 알람으로 모든 게 엉클어졌다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뭣도 모르고 한발 걸치려는 정치인부터 몰락하는 가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보려는 가주, 듣도보도 못한 길드의 길드장까지.
메일을 보낸 사람들은 너무나도 다양했는데,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아카데미개방 행사에 참석하는 것.
평상시에는 쥐꼬리만도 못한 자존심 때문에 아카데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간들이 개방행사에 참여하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편린을 들여다본 자들은 정말 가도 괜찮냐고 물어보며 몸을 사리기 시작했는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귀찮아졌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차피 지금 메일을 보낸 사람들은 학생들의 부모도 아닐뿐더러 그저 그런 놈들이니 거절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 원인은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빠져나갔다는 소리였고, 그들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걸 알고 있던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그녀들뿐이었으니.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건의 중대함에 비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내가 고민해봤자 쓸데없는 짓이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이지윤이라 적힌 번호를 찾아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괜히 지레짐작하다 실수할 필요 없이 직접 연락을 해서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진행할지 물어보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성격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런 거로 연락을 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뚜르르 뚜르르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머릿속으로 질문을 정리하던 순간.
똑 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상치 못했던 노크 소리와 이곳에서 들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고.
“당연하지. 잠시만 기다리렴.”
나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는 몸을 일으켰다.
웬만하면 그녀와의 통화가 우선시돼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찾아온 학생만큼은 예외였다.
그냥 문을 박차고 들어왔어도 웃으며 맞이해줘야만 하는 그런 존재일뿐더러.
하물며 머지않아 그녀의 보호자가 찾아오는 지금에서는 더욱더 조심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직접 문을 열어서 그녀를 맞이하려 했다.
끼익
흑단나무로 만들어져 깊은 광택이 감도는 문이 열렸고, 그곳에 서 있던 학생은 예상대로 1학년을 뒤집어놓은 서큐...
“음...”
순간적으로 너무나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카데미를 뒤집어놓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큐버스 신입생이 있던 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대륙이 아니라 왜 여기에 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는 진조 뱀파이어와.
대한민국의 비공식적 의전서열 1위인 대마법사가 그렇게도 아끼는 막내딸.
거기에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지도 몰랐던 로렌시아의 후계자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교수들의 보고를 통해 그들이 같이 다니는 것은 알고 있긴 했지만, 하필이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다 함께 자신을 찾아올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 있는 이상 아카데미의 총장이었다.
한 명 한 명이 국가 하나의 권력과 맞먹는다고 봐야겠지만, 학생들에게 당황해서야 되겠는가.
자꾸만 발동되는 능력이 심연을 들여다보라는 듯 강요하고 있었으나 겨우겨우 고개를 돌리고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편하게 앉으렴.”
* * *
문을 열자마자 능력에 휘둘리는듯한 모습을 봤기에 순간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했었지만, 피아의 말처럼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돌발행동을 할 걸 대비해서 내 능력이 필요하다는 건가?”
하서진은 소문이 학생들을 통해 퍼져나갔다는 설명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고는 곧바로 핵심을 짚어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곧바로 대응책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뛰어나단 증거였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원하던 내용을 말했다.
“네. 총장님께서 능력을 활용해 금기 마법과 같은 위험요소를 사전에 차단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한 방법까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만 말해도 그의 능력 선에서 전부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생각은 얼추 맞아떨어졌다.
하서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의견에 동의했다.
“적절한 판단이야.”
“감사합니다.”
“내가 더 감사해야지. 이건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도록 할 테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교내 순찰을 강화해야겠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야. 내가 주축이 될 거니 그렇게 전달해줘.”
통화내용이 들리지는 않아서 상대가 누군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났으면 빨리 가서 자자.”
“총장님이 나서준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뭐가 됐든 빨리 기숙사나 가자. 짐을 덜풀었거든.”
총장실에 들어오고부터 조용히 지켜보던 동기들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봐도 좋겠지.
“그래. 전화가 끝나면 마지막 인사만 하고 가자.”
나는 허벅지를 베고 반쯤 잠에 빠져있는 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통화도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고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따로 회의를 소집하지.”
예상대로 3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통화가 끝났고, 하서진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늦어져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사고가 터지고선 어찌저찌하다 휘말리는 것보다야 조금 무료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뭐, 이렇게까지 했는데 터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때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다.
어쨌든 이걸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고, 더 이상 나눌 얘기는 없으니 잠들어버린 피아를 안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할 얘기는 없나?”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서아와 유리를 바라봤다.
총장실에 오면서 하서진의 능력이 정확히 뭔지 궁금하다고도 말했었고, 혹시라도 그녀들이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은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 보였다.
‘하긴 지금은 있다 해도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겠지.’
서아또한 티는 내지 않았지만, 피아와 마찬가지로 대련 때문에 피곤해 보였고, 유리는 로렌시아에서 이곳으로 건너올 때 레아의 마법으로 넘어왔기에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능력을 사용해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하서진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1학년의 사고뭉치들이 떠나간 뒤 총장실에 홀로 앉아있던 하서진은 어느샌가 열려있는 창문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이신건가요?”
“무슨 생각이라니?”
남들이 본다면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화를 한다 생각하겠지만, 자신의 눈에는 지금의 사태를 일으켰을 거라 생각되는 장본인들이 똑똑히 보였다.
내가 현역 때까지만 하더라도 연합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하프 뱀파이어와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
그녀들은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어째서 정보를 푸신 건가요? 제대로 말씀해주셔야 저도 사령관님을 적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녀들의 계획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지할 생각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총장으로서 학생들을 보호해야만 하니까.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전 사령관이 장난을 치다 새어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컸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종종 있었기에.
그러나 대답은 사령관이 아닌 옆에 있던 프레이 교수에게서 나왔고, 내용 자체도 내가 생각하던 그런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림자를 끌어들일 거다.”
그림자라니….
분명 물어봐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꾸. 아니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 웃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건 마치 인간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신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