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40. 예상치 못한 만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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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예상치 못한 만남(2)
“아무 소식도 없다가 가호를 넘겨주다니 미쳤어?”
“앞으로 로렌시아를 이끌어가실 여왕께서 그런 말투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여왕? 로렌시아? 그건 또 무슨 소리인데!”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분명 레아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이동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지훈이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그녀는 부끄럽다며 의식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귀를 쫑긋거릴 정도로 당황해 있었고, 그걸 봐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도 있는 대화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 또한 나의 정체와 이지훈의 행방을 비롯해 지금 벌어진 여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보가 필요할 테니까.
그렇기에 계획을 세웠다.
대화를 나누면서 적절히 정보를 얻고 그걸 활용해 조금만 그럴듯하게 말을 꾸며낸다면 레아는 물론이고 피아와 서아의 문제까지 무난히 넘어갈 수 있을 거였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막상 응접실에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숲의 여왕, 정령의 동반자, 엘프의 수호자라 불리던 하이엘프 레아 엘름과의 대화가 아니었다.
방금의 대화에서 보았다시피 입이 거친 하프엘프와 고집 센 하이엘프의 언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벌을 서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무단침입에 대해서 혼나고 있다 생각했던 것만, 김유리가 찾는 어머니가 레아일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뭐.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인 거 아닐까?”
어느샌가 메이드로 전직을 한 서아가 다가와 비어있는 찻잔에 차를 따라줬다.
“그렇긴 한데 말이지...”
너무나도 익숙한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서아의 말대로 애초에 로렌시아의 온 이유부터가 김유리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였으니 이런 식으로 쉽게 일이 풀린 것은 좋아할 일이 맞았으나.
하나의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열 개의 문제를 만들어버렸다.
그걸 제외하곤 방법도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죽었겠지만 지금 와서 보자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그 붉은 달이었던 서큐버스 퀸과 이지훈의 딸이라는 게 조금 놀랍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고민할 정도로 문제가 되는 거야?”
“음…. 뭐라 설명해야 할까.”
나는 그녀가 따라준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를 음미하며 할 수 있는 말과 해야 할 말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 말해줘야 이해가 쉬울지 고민했다.
“아빠가 죽은 건 알아?”
“뭐, 오래 살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니었으니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구나.”
“서로 사랑해서 결혼까지 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리 매정할 수가 있어?”
“결혼이라니? 일단 다른 얘기를 하기 전에 오해를 풀어주는 게 먼저겠네. 일단 나는 지금까지 남자를 안아본 적이 없어. 그럴 생각을 가진 적조차 300년이 지났지.”
눈앞에서는 시청률 50%를 넘길법한 아침드라마급 전개가 펼쳐졌지만, 둘의 개인사이니만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닌지라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했고.
결국, 비유가 적당한 단어를 떠올릴 수 있...기는 개뿔.
‘저걸 어떻게 무시해.’
옆을 바라보니 나에게 질문을 건넨 서아조차 흥미롭다는 듯 두 엘프를 주시하고 있었고,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채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집중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던 잠깐 사이에 여러 대화가 오갔는지 김유리는 레아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럼 여태까지 날 키워준 아빠는 뭔데? 나를 왜 딸이라 부른 건데?”
“...”
“그렇게 불쌍한 표정으로만 쳐다보지 말고 말을 좀 해보라고!”
그러나 위협적인 행동과 다르게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매우 괴로워 보였다.
하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로렌시아에 찾아올 정도면 그만큼 레아를 믿고 따랐던 모양일 테고, 믿고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느낌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겠지.
나 또한 아카데미에 팔려가듯 들어가며 그런 경험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저건 아니야.’
전후 사정을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자신의 판단만을 근거로 몰아치면 안 되는 거였다.
“너와 어머니의 일에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조금만 자고 일어나자.”
맞은편에 앉아있는 레아의 괴로운 표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김유리의 뒤에 다가가 수혈을 짚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보다 수십 배의 인생을 살아왔지만 진심을 표현하는데 미숙한 하이엘프를 향해서 조언을 건넸다.
레아와 10년간 함께 지내며 로렌시아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는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이해가 갔으니까.
“때로는 빨리 진실을 말해주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아직 모든 걸 알기에는 마음이 여릴뿐더러 이곳에 서려 있는 악의를 받아내기에는 미숙해.”
과거 그녀가 겪었던 고민과 괴로움을 답습하게 두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녀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제가 당신보다 김유리를 오래 보아온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녀가 여리고 미숙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유리는 더 이상 손안에서 오냐오냐 키워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레아의 모든 안배를 통해 성장한 그녀는 입이 거칠고 조금 제멋대로일지언정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로렌시아에 찾아올 만큼 뛰어난 하이엘프로 성장했다.
“이번만 봐도 당신의 예상을 뛰어넘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건 운 좋게 너라는 존재를….”
“전혀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레아의 말을 끊었다.
김유리가 나를 통해 이곳으로 온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아르바이트와 아카데미 입학을 비롯한 모든 노력까지 무시당해서는 안 됐다.
나와 리에나 또한 이렇게 무시당해서는 안 되었고.
“부모님을 본 적이 있으시기에 잘 알겠지만, 저는 아무에게나 도움을 주는 그런 존재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실언을 해서 미안해.”
레아는 나의 말을 듣고 곧바로 사과를 건네왔다.
그렇지만 이거에는 나와 리에나에 대한 사과만 있을 뿐이지 정작 필요한 김유리의 노력을 부정한 것에 대한 번복은 없었다.
하지만.
“유리에 대한건 좀 더 생각해볼게.”
“감사합니다.”
이거면 됐다.
자신의 의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완고한 레아가 단 한 번에 모든 조언을 받아들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했을 뿐.
* * *
“별일 없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미야와 세릴이였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봐서는 빨리 약속을 지키라고 재촉하는 모양새였는데, 지금은 그녀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나 좀 도와줄래?”
나는 눈이 반쯤 풀린 채 나에게 기대고 있는 피아와 서아를 가리켰다.
아무리 뛰어난 혈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치를 조작하는 마법을 두 번이나 견디는 것은 아직 무리였던 모양이다.
“스크롤이 아니라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방법을 그것도 두 번이나 사용하셨군요.”
“느낌으로 봐서는 처음에 묻은 기운은 정령 같고, 두 번째는 저희에게도 꽤나 익숙한 하이엘프 같네요.”
미야와 세릴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피아와 서아를 안아 들어 침실로 이동했고, 그녀들을 침대에 눕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질문들이 시작되었다만.
나는 그녀들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려 질문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보채지 않아도 전부 말해줄게. 미야부터 하자.”
나 또한 피아와 서아처럼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세리아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내 부탁을 들어준 그녀들의 작은 호기심을 채워줄 정도의 여력은 남아있었다.
“하던 일은 잘 끝나신 건가요?”
그녀다운 진지하면서도 정석적인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고는 답변을 말했다.
“뭐….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이거면 충분하다 정도이려나.”
부탁을 완벽하게 들어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김유리와 레아가 만날 수 있었고 오해를 풀 기회 또한 만들어줬으니. 나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었다.
앞으로의 일은 나의 도움 없이 그녀들이 직접 만들어나가야 했다.
“미야가 끝났으면 다음은 나지?”
세릴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져왔는데 그게 참 대답해주기가 애매한 웬만해서는 피해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정기를 나눠주기로 한 하이엘프는 어디에 갔냐니.
“음…. 로렌시아에 있지.”
어디에 있는지 위치쯤이야 쉽게 대답해줄 수 있는데, 그녀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세를은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한번 질문을 건네왔다. 이번에는 내가 대답을 피해 가지 못하도록 세세하게.
“에이 다 알면서 그러신다. 언제 이곳으로 돌아와서 저희에게 정기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킨데요?”
하지만 아무리 그런 식으로 말해도 이거에 대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은 하나뿐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진짜 조금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실이었다.
레아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축객령을 내렸다. 우리는 더는 로렌시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요구를 들어야만 했고.
머지않아 다시 만나자는 말을 건네오긴 했지만, 그녀의 시간 개념상 몇 년이 될지야 모르는 거기에 거기까지 언급해주지는 못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야 없었으니까.
“언젠간 오지 않을까?”
“리에나님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흡정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는데….”
얼마나 기대한 것인지 세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대신 미안해.”
그래도 그녀의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대안을 제시했다.
“정 그러면 내 정기를 두 번 흡수할래?”
“그건 좀….”
“싫으면 말고.”
김유리가 아카데미에 돌아오더라도 절대로 얘기해주지 않을 거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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