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9. 예상치 못한 만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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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예상치 못한 만남 (1)
400년이란 세월을 살아왔다.
용사라는 칭호를 가진 남자조차 100년을 채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긴 시간이지만.
정령의 수호자인 엘프 그중에서도 영원을 살아가야 할 하이엘프인 나에게는 앞으로의 기억에 묻힐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평생을 로렌시아에서 자란 평범한 하이엘프 였다면 말이다.
“많은 일이 있었지.”
처음에는 단순히 100년 동안 이어진 감금 생활에 이골이 나서 했던 돌발행동이었다.
소문만으로 듣던 인간들의 문물을 경험해보고 싶었고, 노망난 노인네들이 정해준 머리가 텅텅 빈 하이엘프 남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으니깐.
그러나 그 한 번의 선택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추억들을 만들어냈다.
“재미있었어.”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액자를 들어 올려 빛바랜 사진을 바라봤다.
분명 협회에서 나왔던 안내자가 토벌 완료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찍힌 사진이었을 거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몸을 버둥거리는 회색 머리의 하프 뱀파이어.
물의 정령왕을 불러내 피를 씻어내고 있는 백금 발의 하이엘프.
뇌수가 터져 나온 히드라의 머리 위에서 방방 뛰고 있는 검은 머리의 인간.
마지막으로 신성력을 흩뿌리며 주위를 오염시킨 히드라의 독들을 정화하고 있는 남자까지.
거대한 히드라의 사체를 배경으로 한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몰골로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었어.”
그들이 있었기에 로렌시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고. 수많은 지식들을 배웠으며.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 또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추억이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에 추억이라 불리는 것.
“고자 새끼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좀만 기다리라니까 기어코 뒤져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짐인 액자를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맘대로 뒤져버린 놈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놈이 일으킨 사건 때문에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거는 물론이며, 나는 로렌시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뒤처리에만 집중해야 했다.
결국, 위정자들이 우리가 이룬 모든 영광을 자신들의 업적으로 돌릴 때도 원수들이 그의 고향에서 활개를 칠 때도 로렌시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억지로 내가 겪고 경험했던 모든 것을 잊어가며 장로라 불리는 그 늙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멈춰버린 하이엘프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20년 전 로렌시아에 찾아온 한 여자로 인해 모든 게 바뀌어버렸다.
“분명 다시 돌아올 거고 자기는 그걸 준비한다라….”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신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기다린다며 권좌를 내버린 채 인간으로 영락하다니. 인간이 바퀴벌레가 되는 것과 같은 참 미친놈 같은 행동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런 미친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나는 로렌시아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대전쟁 때 극심한 피해를 받은 세계수의 복원을 시작했고, 아무도 모르게 세계수에서 나의 뒤를 이을 하이엘프도 탄생시키며 다시 한번 미래를 함께 걸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분명 아무도 믿지 않을 허황된 말이라 하더라도.
나 또한 마음 한편으로는 그놈이 그렇게 쉽게 죽을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일주일 전 100년간 연락이 없던 이지윤에게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지금껏 로렌시아에 도움을 주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검마의 기술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학생을 발견했으니 찾아와달라고. 자신만의 힘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여자가 붙어있다며 말이다.
“뭐, 그 여자가 누군지 대충은 예상이 가지만.”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갔다. 그 미친년이 붙어있다는 소리는 이지훈과 연관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는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1주일 사이에 이곳을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 맞췄다.
딸에게 능력과 가호를 넘겨주었고, 제한구역 안에 몰래 만든 저택에 찾아와 추억이 담긴 물건들과 한국에 있는 저택으로 향하는 스크롤을 챙겼다.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 무기와 장비를 챙기고 일정을 통보한 뒤 이지윤이 말했던 한국 헌터 아카데미로 향하면 끝이었는데.
파지직 파직
매우 익숙한 정령의 힘이 느껴지며,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균열이 열리기 시작했고.
“엄마?”
분명 바깥에서 능력과 가호에 휘둘리지 않을만한 힘을 기르고 있어야 할 딸이 찾아왔으며.
“안녕하세요. 에스티리아 공작가 장녀 피아 에스티리아라고 합니다.”
“유리와 아카데미 동기인 박서아라고 합니다.”
검은 달의 산하에서 수많은 피를 흩뿌리던 진조 뱀파이어와 우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인간까지도 균열에서 튀어나왔다.
“얘기는 나중에 들을 테니 일단 뒤로 가서 무릎을 꿇고 벌부터 서 있자.”
그러나 지금 중요한건 그녀들의 종족도 이곳에 찾아온 이유도 아니었다.
균열을 통과할 때 확실히 느껴진 혼돈의 기운.
그건 분명 자신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스크롤에 나눠 봉인해둔 골치 아픈 정령 이클립스였다.
‘절대 그 스크롤이 사용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지훈이 살아있을 때는 내가 직접 이동시켜주면 되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고, 죽고서는 스크롤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무단으로 침입해서 죄송합니다.”
글썽거리는 딸은 물론이고 왠지 모르게 친구들까지 뒤쪽으로 이동해 벌을 서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했기에 별다른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아공간에서 세계수에서 꺾어온 가지를 꺼내 들고는 경계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으나.
‘그럴 리가 없겠지. 저 애들끼리는 스크롤을 구할수 없었을테니.’
치 치직.
예상대로 균열이 거의 닫혀갈 때쯤 한 명의 존재가 튀어나왔고….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를 바라보며 친한 척 말을 건네왔지만, 그런 사소한 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붉은 달?”
검은 머리와 요사스러운 붉은 눈 그때와는 달라졌지만 저건 분명 이지훈과 같이 죽었다고 알려진 서큐버스 퀸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세계수 가지에 기운을 밀어 넣었다.
아무리 대악마라하나 300년전 싸움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전성기에 비하면 약한 모습을 보이고있었고, 저 상태라면 무기가 없더라도 단 한 번에 모든 힘을 다해 도박수를 던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항상 지훈과 지윤의 떠들썩한 대화가 오갔던 이곳에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동안 눈앞에 서큐버스가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이마를 꿰뚫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그녀가 아공간을 열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고.
‘어?’
이미 적의 눈앞에 다가가야 했을 발과 뻗어져야 했을 팔이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저 서큐버스가 아공간에서 꺼낸 하얀 바스타드 소드는 분명 이지훈이 드워프, 엘프, 인간. 천사 등등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용해 한 달여 간 만든 것일뿐더러.
분명 저건 신성력을 지니고 있지 않는다면 절대로 만지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저게 어떻게 저 녀석 손에.’
대악마가 개심해서 천사가 되는. 신이 영락해서 인간이 되는 것보다 더욱 말 같지도 않은 현상일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검은 나를 놀리는 것 마냥 대악마인 서큐버스 퀸의 손에서 진정한 주인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건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안녕하세요.”
공격의사가 없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여왔는데, 그 모습은 과거에 보아온 거만하고 날카롭던 모습과는 사람이 다르다 착각할 정도였다.
‘설마...’
나와 김유리처럼 모습만 비슷하지 나와 새로 나타난 서큐버스 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내 추측을 뒷받침하듯 그녀가 그때의 붉은 달이 아니라는 걸 뒷받침하는 얘기인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응…?
아버지…?
분명 내가 늙어서 귀가 먹은 게 아니라면 앞에 서 있는 서큐버스 퀸은 분명 아버지라는 단어를 꺼냈고.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절대 일어나서 안 될, 하지만 너무나도 지금의 상황에 잘 들어맞는 한 가지의 가정에 이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지훈과 서큐버스 퀸이...
‘큰일 났네.’
자신은 원래 성욕이 옅을 엘프이기도 했고 이미 그를 포기했기에 상관이 없었다만, 이 소식이 이지윤이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그녀에게 들어가는 순간...
“...아버지라 말씀하신 건가요?”
일단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 * *
‘후…. 일단 급한 불은 끈 건가?’
겉으로 내색은 못 했지만, 속으로는 연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었다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새도 없이 저 나뭇가지에 머리가 꿰뚫릴 뻔했다.
“...아버지라 말씀하신 건가요?”
당황한듯한 목소리와 함께 회초리에서 형형하게 타오르던 푸른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을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이클립스의 장난 때문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다곤 하나 고민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만날 줄이야.
하나로 땋아 내린 백금 발의 머리와 김유리와 똑같은 초록빛 눈동자. 그리고 세계수를 저런 식으로 막 다루는 존재는 엘프 중에 한 명뿐이었다.
숲의 여왕, 정령의 동반자, 엘프의 수호자라 불리던 로렌시아의 공주이자 하이엘프인 레아 엘름.
그녀는 300년이란 시간이 무색하게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변한 나와 다르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