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38. 로렌시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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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로렌시아 (1)
김지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것을 제외한다면 걱정과 달리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마력패턴 대조는 예상대로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고, 가장 문제였던 1번 금고의 문을 여는 건 때마침 도착한 VIP에게 신경이 쏠려있어서 조용히 다녀올 수 있었다.
모든 절차를 마친 그녀가 스크롤을 건네주며 심장이 남아나질 않으니 다음번에는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고, 지금 해야 할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자 받아.”
건물의 바깥에서 미어캣처럼 목을 빼놓고 기다리고 있던 그녀들에게 손에 있는 물건을 넘겨줬다.
김유리의 입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제거해주는 건 덤이었고.
“금방 다녀왔네?”
“사고를 안 치다니 별일이야.”
“으으읍…. 미친년들”
그녀들은 내가 스크롤을 구해온 것보다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거에 더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그런 반응을 보이던 것도 잠시.
“이게 스크롤? 잘못 가져온 거 아니야?.”
“피아의 말이 맞아. 수많은 스크롤을 만들고 봐온 내가 장담하던데 이건 평범한 엘프의 스크롤이 아니야.”
“가호? 아니 이건 진짜 정령이잖아.”
스크롤을 확인하고는 뭐에 홀린 사람들처럼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십여 분간 입이 막혀 씩씩거리고 있던 김유리까지도 말이다.
‘뭐,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저걸 꺼내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예상하던 일이었다.
암시장에서 떠도는 도난품도 아니고, 평범한 하이엘프가 발행한 것도 아닌. 레아가 직접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매개체로 만든 나만을 위한 로렌시아행 티켓이었다.
미리 새겨놓은 마법진을 발동해 정해진 출구로 이동하는 방식인 하이엘프들의 스크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의 말이 맞아. 이건 스크롤이라기보다는 정령과의 노예 계약서야.”
고위급 정령을 스크롤에 봉인해두는 방식.
그때 당시 하이엘프들 사이에서도 비효율의 극치라 여겨지며 레아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결국 이걸 알아보거나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단 한 명. 레아의 후손인 김유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로렌시아. 텔레포트. 혼돈의 정령. 이클립스?”
멍하니 계약서를 바라보던 그녀는 드문드문 단어들을 읽어내려갔는데, 그 내용들은 전부 레아가 나에게 알려줬던 내용과 일치하고 있었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까지 얻고 싶어 하던, 꼭꼭 숨기려 하던 능력이 결국에는 왕국 바깥에 나와 있는 하프엘프인 김유리에게 흘러 들어가다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모양이었고, 이제는 노망난 하이엘프 장로들의 찌그러진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로렌시아에 가야 했다.
찌익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계약서를 찢어 활성화시켰다.
“네가 한 말이 전부 정답이야. 이 계약서들에는 아버지와 하이엘프 공주가 제압했던 정령이 봉인되어있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머지 3장의 스크롤들이 부스러지며 우리의 앞에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
보라색 번개가 내리치고, 검은 구름이 뒤덮인 그 속에 자리한 것은 마구 뒤섞인 존재. 겪을 넘지 못한 자는 인지조차 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였으나.
“으아아아아 짜증나 뒤져버리겠네!”
정작 균열 속에서 걸어 나온 정령은 예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성격과 남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고유의 기운만큼은 정령왕들을 굴복시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만….
“레아? 아니 후손인가? 어쨌든 간에 너는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300년 동안 계약서를 유지하느라 이 모양 이 꼴이잖아!”
김유리의 옷을 움켜잡고 성을 내는 이클립스의 외형은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린 꼬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보다 힘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들에게는 까마득한 존재였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로렌시아에 가기도 전에 기절할 모양새여서 조치를 취했다.
“이클립스님 고집은 그만 부리시고 해야 할 일을 하시죠.”
양손을 그녀의 겨드랑이 밑에 넣고는 들어 올려 미어캣들에게서 떼어냈다.
아무리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특수한 상황이 그걸 가능케 했다.
“뭐야? 나를 잡아? 미친 거….”
그러나 이클립스는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형형한 기세를 풍기며 고개를 돌렸고.
“잉? 너는 분명 이지훈일 텐데 그 꼴은 무엇이더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정령일뿐더러 과거의 이지훈을 알고 있다 보니 단번에 무언가를 알아챈 듯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그녀에게 휘말려 반응을 보이는 건 최악의 수.
나는 모든 걸 무시한 채 그저 해야 할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프엘프의 사정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저 철부지 정령까지 떠맡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레아 엘름과의 계약에 따라 우리 4명을 로렌시아로 옮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뭐, 계약이었으니 해주긴 해야겠지.”
“계약을... 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에 균열을 만들어가기 시작할 줄이야.
그녀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계약을 무산시키려 할 줄 알았고, 그걸 위해 여러 가지 변명들과 미끼들을 준비했었는데 전부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철이 든 건가?’
레아와 계약을 맺겠다며 로렌시아를 반쯤 부숴 먹던 이클립스가 많이 달라진 것에 대해 신기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로렌시아 어디로 보내줄까?”
한창 균열에 집중하던 이클립스가 말을 걸어왔다. 이 선택으로 인해서 앞으로의 일이 진행될지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을 건넸다.
“이클립스님이 봉인되었던 그 집으로 부탁드립니다.”
처음 로렌시아에 몰래 들어가기로 했을 때부터 결정해놓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곳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거였고, 그곳만이 김유리의 어머니를 구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역시 거기일 줄 알았다.”
아무런 상황을 모르는 이클립스도 그 선택만큼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우우우웅
균열은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푸른 빛을 내뿜었으며 나를 제외한 인원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클립스!”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 때문에 반응이 늦었지만, 그녀들이 전부 삼켜지기 전에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만약 지금의 현상이 시대의 흐름이 개입했거나 이클립스가 적대적으로 돌아선 거라면 전력을 다해서라도 제지할 생각이었다.
금제를 풀어서라도.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과 상황에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너랑 할 얘기가 있어서 먼저 보내는 거니까 흥분하지 마. 그녀들이 다치지 않는다는 건 내 진명을 걸고 장담하지.”
이클립스는 자신을 상처 입힐 수 있는 붉은 마나가 타오르는 검을 눈앞에 두고서도 너무나 태연했고.
“리에나 늦지 않게 와.”
“사고만 치지마.”
“미친... 미친... 미친...”
그 말을 뒷받침하듯 반쯤 균열에 빨려 들어간 그녀들도 별문제가 없다는 듯 얘기했다.
“재미있는 애야.”
이클립스는 반쯤 패닉에 빠진 김유리를 보고 피식 웃은 뒤 그녀들을 균열 건너편으로 이동시켰고, 나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길게 안 끌 테니 잠깐 대화 괜찮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맘 같아서는 대화고 뭐고 그녀들을 따라 균열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고 계약의 뒤처리를 위해서라도 대화를 해야만 했다.
대신 이제 둘만 남았으니 아까와 같은 연극은 집어치웠다.
“뭐 때문인데? 계약의 완료처리는 이미 끝냈으니 본론부터 말해.”
“이래야 이지훈이지.”
이클립스는 휘하의 정령들을 소환하며 몸 상태를 점검하더니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걸 깨닫고는 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서큐버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긴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가장 중요한 거 한 가지만 물어볼게. 레아는 어디에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닐 애도 아니고 친구 하나 없는 정령인지라 웬만한 질문은 대답해주려 했다.
그런데 언제 죽었냐가 아닌 어디에 있냐라니.
그녀의 물음은 대답은 둘째치고, 내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 말은 레아가 살아있다는 소리지 않은가.
“레아가 죽지 않았다는 소리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김유리에게 가호와 재능이 넘어간걸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헛소리하지 말라 했겠지만, 이클립스와 레아는 반쯤 연결된 사이이기에 지금의 말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뭐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그러나 이클립스는 나의 대답을 듣고 우습다는 듯 피식 웃어버리고는 균열을 천천히 닫으며 말했다.
“너라면 레아가 나를 여기에 봉인하면서 맺었던 조건이 뭔지 알지?”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그 장소에는 나도 있었으니까.
“봉인에 풀려났을 때 너와 레아가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 것.”
“봉인에서 깨어난 직후에 저 하프엘프를 보고는 레아는 죽었다고 생각했지.”
이클립스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균열을 닫는 작업을 멈추지는 않았고, 이건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레아의 소식을 끝까지 듣거나 아니면 로렌시아에 넘어간 그녀들을 따라가거나.
“하지만 말이야 내가 생각….”
“거기까지만 해.”
이클립스의 말을 끊고는 희미해져 가는 균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 나름대로 나를 가장 효과적으로 골탕 먹일 방법이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레아가 나에게 한 약속은 자신을 찾아와달라는 게 아니었어.”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이클립스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한 채 균열을 향해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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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시아에서 단 한 명만이 출입할 수 있는 저택 속 우아하게 꾸며진 침실에서 두 명의 존재가 서로를 마주 봤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푸른 균열 속을 튀어나온 존재는 눈앞에 있는 하이엘프와 무릎을 꿇고 벌을 서고 있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고.
“붉은 달?”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회초리로 사용하고 있던 존재는 겁도 없는 자신의 딸과 딸의 친구들에 이어 균열에서 튀어나온 불구대천의 원수와 매우 매우 닮은 서큐버스를 바라봤다.
두 명의 표정은 참 대조되어있었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정적 속에서 먼저 움직인 쪽은 검은 머리의 서큐버스였다.
꼬리와 날개를 드러내고 아공간에서 하얀색 바스타드 소드를 꺼낸 그녀는.
“아..안녕하세요. 아버지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푸른색으로 빛나는 회초리를 들고 다가온 하이엘프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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