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병약한 서큐버스는 하렘을 꿈꾼다-37화 (37/48)

〈 37화 〉 37. 사전준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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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전준비 (2)

“이야…. 돈을 어떻게 처발랐길래 이리 조잡한 거지.”

“세계의 모든 부를 쓸어 담는 곳이라 불리는 것 치고는 조금 심각한데.”

정문을 지나 로비에 들어선 피아와 서아의 감상이었다.

원래라면 나의 뒤에 바짝 붙어 쫓아오는 하이엘프처럼 분위기에 압도당해야 했지만, 그녀들에게 이곳의 인테리어는 그저 졸부의 질 나쁜 취미로 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히드라의 마석을 중심으로 수많은 마석을 장식한 샹들리에와 검, 방패, 지팡이를 비롯해 수많은 무기에 둘러싸여 있는 여기사의 동상 때문에 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이것들에 관해서는 나와 동료들 모두가 엮여있는 아주 복잡하고도 깊은 사정이 있었다.

310년을 거슬러 올라가 D급 헌터였던 그 남자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했는데….

“한시가 급하니 빨리 이동하자.”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는 그녀들의 팔을 끌어당겼다.

지금 중요한 건 이곳의 촌티 나는 인테리어가 아니었고, 과거의 이야기들을 밝힐 수 없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빨리 스크롤을 찾아 로렌시아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여러 의미로 넋이 나가 있는 세 명의 미소녀들을 이끌고 접수창구가 모여있는 장소에 도착했고. 조금은 곤란한 상황에 마주해 버렸다.

“1635번이라….”

입구에 도착하자 은행원이 건네준 번호표에 적힌 숫자. 이것이 로렌시아로 향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 버렸다.

­1502번 고객님 8번 창구로 이동해주십시오.

­1503번 고객님 2번 창구….

대기인원 130명.

아무리 창구가 10개에 달한다고 하지만 한 명당 5분씩이라 치면 대략 2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하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해가며 2시간을 줄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나중 가서 어떠한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그냥 새치기를 하자.”

“앞사람의 번호표를 사는 건 어때?”

곧바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피아와 서아가 대안을 제시했으나, 두 방법 모두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지금 상황에서는 실행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2시간이 이상 차례를 기다려 짜증이 가득해 보이는 헌터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여자 4명이 새치기를 한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무조건 싸움이 벌어지겠지.’

이곳에 있는 모든 헌터들을 5분 안에 바닥에 눕혀줄 자신은 있었으나. 사건이 커져 버리면 서로의 가문에 소식이 날아가게 될 테고, 나는 세리아에게 손발이 묶여 끌려갈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서아의 제안대로 앞사람의 번호표를 사면 해결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솔직히 서아가 제시한 방법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건 맞았다.

돈을 주고 앞사람에게 표를 구매한다면 싸움이 벌어질 일도 없었고, 시간도 줄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실행할 수 없는 데에는 크나큰 이유가 있었다.

‘돈이 없어.’

나나 피아나 서아 모두 돈은 넘쳐나지만 가문 몰래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이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헌터에게 돈을 송금하는 순간 가문에 연락이 갈 테고, 싸운 것과 마찬가지로 세리아에게 손발이 묶여 끌려갈 게 분명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나오는 법.

이곳에 들어온 뒤로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김유리가 어느샌가 우리의 사이로 걸어와 하나의 물건을 건넸다.

“자 받아.”

그녀가 내민 손에 있는 것은 내가 가진 것과 같은 번호표였는데, 거기에 적혀있던 숫자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1513번?”

잘못 읽었나 싶어 눈을 비벼보았지만, 몇 번을 봐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종이 상단에 크게 적혀져 있는 숫자 1513. 조금 전 방송이 1510번을 불렀으니 3번째 뒤에 불릴 순번이었다.

나의 뒤를 이어 번호표를 확인한 피아와 서아가 눈을 크게 뜨고는 김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구해온 거야?”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조차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곧바로 구해왔으니 더욱 궁금했을 거다.

그러나 김유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돈을 주고 번호표를 사라며. 지금까지 모아뒀던 돈을 건네고 받아왔어.”

“지금까지 모아왔던 돈?”

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단번에 그녀가 말하는 돈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한 건데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어.’

입구에서부터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던 모습과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리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배제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암시장에서 파는 로렌시아행 스크롤의 가격은 전혀 저렴하지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사기이며 지옥으로 가는 티켓이라 해도 사기꾼과 피해자와 몽상가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분명 엘프들이 외부로 많이 돌아다니고 교류도 많던 300년 전이 개당 5000만원 정도 했으니. 엘프들이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 지금은 분명 몇억에 달하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을 거였다.

하지만 나로 인해 그게 쓸모없는 물건이란 걸 알아차린 김유리에게는 몇억에 달하는 여윳돈이 생겼을 터.

분명 그녀의 성격으로 봐서는 서아의 말을 듣자마자 그 돈 전부를 꼬라박고 번호표를 구해왔을 거였다.

“다녀오면 그 돈은 내가 대신 줄게.”

번호표를 건네받으며, 김유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런식의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이건 계획을 잘못 세운 나의 실수이기도 했을뿐더러 로렌시아에서 탈출한 레아의 딸과 손녀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헛소리야. 돈 따위….”

예상대로 김유리는 눈을 흘기며 욕을 하려 했지만.

­1513번 고객님 9번 창구로 이동해주십시오.

스피커에서 나의 차례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기에 손으로 김유리의 입을 막고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처음 착륙했던 곳 있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줘.”

눈만 보이는 김유리를 포함해 피아와 서아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따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곳에서 기다려도 상관은 없었지만, 계획을 세운 나조차도 무슨 일이 벌어질 줄을 몰라서 그저 할 수 있는 만큼의 대비를 취한 거였다.

요즘 들어 아무리 완벽하다고 생각했어도 이유 모를 변수가 자꾸만 튀어나왔으니까.

“대답은?”

“응.”

“알겠어.”

“읍으읍….”

피아와 서아는 곁에 오래 있었던 만큼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여줬고, 이내 김유리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이어받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도망쳐.”

“그때는 좀 큰일이 되겠지만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다시 로렌시아로 가면 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떠나가기 전에 당부를 남기는 건 덤이었다.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

내가 너무 분위기를 잡았나 싶기도 했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뭐, 어쨌든 나도 몸을 돌려 방송에서 알려줬던 9번 창구로 이동했고, 그곳에 앉아있는 은행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거로 봐서 피곤에 쩔어있고 그 덕분에 서비스직 마인드가 많이 결여되어 있는 여자였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런 사람이 상대하기가 더욱 편했다.

“번호표.”

은행원은 앞에 자리한 바구니를 가리켰고, 나는 그곳에 김유리의 인생이 묻어있는 번호표를 넣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번호표에 마법적 처리가 되어있었는지 바구니에서 초록색 불이 들어오며 작은 음성이 울렸고.

“왜 왔어?”

그녀는 그제야 은행원다운 일을 시작하려 했으나.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 금고 번호는 01번. 비밀번호는 0000 금고의 주인과는 부녀관계입니다.”

앞으로 진행될 얘기를 생략하고는 그녀가 필요한 모든 정보를 한 번에 불러줬다.

어차피 그녀의 지시 없이도 뭐가 필요한지는 전부 알고 있었고, 정신없이 진행해야 신경을 쓰지 않고 대충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알겠어. 기다려봐.”

예상대로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컴퓨터의 자료를 입력했다. 내 계획이 잘 들어맞았는지 나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해야 할 건 마력 패턴을 대조한 뒤에 스크롤을 수령하고 물 흐르듯 나가면 끝이었으나….

“다….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01번 금고의 주인분과 부녀관계 시라고요?”

키보드를 쳐내려 가던 그녀의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자세와 말투가 아주아주 공손하게 바뀌어있었다.

정보를 입력하니 나왔는지, 다시 생각해보다 깨달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걸린 것이다.

‘조금 아쉽네.’

조금 전까지의 반응으로 봐선 한 명의 평범한 손님으로 좋게좋게 넘어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의 상황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헌터은행의 직원이 함부로 개인정보를 발설하지는 않겠지? 죽기 싫으면 맹약을 떠올리고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야.”

협박이 담긴 충고였다.

헌터은행이 변질되지만 않았다면 여전히 모든 직원은 입사하는 그 순간부터 목숨을 건 맹약을 맺을 것이고, 그 내용 중에는 손님의 비밀유지조항도 포함되어있었다.

만약 당황한 그녀가 실수라도 해서 근처에 있는 손님이나 직원에게 말이 새어나간다?

예정에도 없던 송장을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가..감사합니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자칫 잘못하다가 벌어질 뻔한 상황들을 전부 깨달은 모양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빨리 숨부터 고르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 대충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편해지겠네.’

반응으로 봐서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맹약은 존재하는 거 같았고, 이렇게 되면 더는 빙빙 돌리거나 숨길 필요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진정이 끝났는지 자세와 표정을 바로하고는 질문을 던졌다.

“어떤 용건으로 오셨는지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시겠어요?”

첫인상과 달리 생각 외로 유능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곧바로 심신을 다스리는 건 흔치 않은 재능이었으니까.

나는 가슴 부근에 달린 명찰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천천히 용건을 전달했다.

“김지연 사원님. 01번 금고에서 A­03품목이라 적혀있는 스크롤 4장을 꺼낼 거야.”

“금고의 주인 이지훈 씨와는 어떤 관계 시라고요?”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기인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동정으로 알려진 사람한테 자식... 아니 그게 아니라 300년 전 죽은 사람의 딸이라니.

그렇지만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 없었다.

금고를 열 수 있는 사람은 그녀와 나를 제외한다면 직계가족뿐이 없었는데, 지금의 몸으로 이지훈인걸 자청하는 게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일일 터다.

‘이래서 지금껏 필요한 게 있음에도 찾으러 오질 않았던 건데.’

한숨을 내쉰 뒤 꼬리와 날개를 꺼내 인간이 아님을 밝히고는 지금껏 머릿속으로 구상해왔던 가짜 신분을 입에 담았다.

“부녀관계 맞아. 서큐버스의 혼혈이라 보이는 것보단 나이가 많지.”

리에나가 들었다면 거품을 물 말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것보다 더욱 아다리가 들어맞는 배경도 없었을뿐더러 자식은 아니더라도 그녀와 내가 반반씩 섞여 있는 건 맞았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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