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6. 사전준비 (1)
* * *
36. 엘프들의 왕국(1)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프왕국에 대해 크게 착각하는 게 있다.
“숲에서 세계수라는 나무 아래 모여 살아가는 애들 아니야?”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국가로 알고 있는데.”
99.9%의 사람이 피아와 서아처럼 대답을 한다.
엘프들은 거대한 숲과 세계수 아래에 모여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종족이니 그런 존재들이 모인 국가는 나무 위에 집을 짓거나 하지 않았겠냐고.
하지만 그건 사회에 나와 있는 엘프들의 행동을 토대로 막연히 추측한 것일 뿐. 실제로는 엘프들의 나라인 것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정보도 알려진 게 없는 미지의 국가이다.
그러나 0.1%의 사람들.
즉 엘프왕국에 직접 가봤거나. 엘프와 매우 친한 친분이 있거나. 모든 것을 알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엘프왕국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이런 반응들을 보인다.
첫 번째로는 인상을 찌푸리고.
두 번째로는 거부감이 잔뜩 들어있는 목소리를 내뱉고.
세 번째로는 엘프왕국이란 단어를 꺼낸 상대에게 강한 경계심을 내비친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당한 것이 많을수록 단계가 높아졌는데, 우리끼리는 이걸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엘프 거부반응 3단계라 불렀다.
그리고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엘프들은 여전한지 그 법칙 또한 유지되고 있는 거로 보였다.
“거길 꼭 가야 하나요?”
“어우. 로렌시아 얘기만 들어도 소름이 돋네요.”
연락을 받고 찾아온 미야와 세릴은 우리가 엘프왕국에 가야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내 예상대로 엘프왕국. 아니, 로렌시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 보였고, 이제 계획대로 그녀들의 협조를 얻으려는 찰나.
“괜찮은 거 맞아?”
김유리가 나의 옷을 붙잡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미리 계획을 알려줬는데 그녀들의 반응을 보고는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는듯했다.
그러나 김유리의 걱정과 달리 이 정도면 매우 양호한 편에 속하는 거였다.
“그래도 엘프 같은 경우는 조금 색다른 맛이지 않아? 정기 대백과에 따르면 갓 성인이 된 하이엘프가 정말 극상의 맛이라는데.”
“죽기 전에 하이엘프는 한번 먹어보고 싶긴 해.”
두 명의 서큐버스들은 김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주제에서 빠져나와 어떻게 하면 하이엘프를 흡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걸로 봐서는 직접 겪은 건 아니고 레드문의 간부로서 엘프왕국에 대해서 정보만 들은 듯했고, 그만큼 거부감이 크지 않다는 소리였다.
“걱정하지마 이 정도라면 한 번쯤은 넘길 수 있어.”
나는 김유리에게 작게 속삭인 뒤 걱정하지 말란 의미로 손을 잡아주었고, 신분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하이엘프를 찾아 납치하자는 결론에 이른 두 명의 서큐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보고를 3일만 미뤄줄 수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일이 끝날 때까지는 내가 로렌시아로 갔다는 소식이 세리아에게 들어가지 않아야 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세리아는 레드문을 동원해 무조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일 거고, 확률은 매우 낮지만, 최악의 경우 엘프와 서큐버스의 전면전까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고민 끝에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어…. 리에나님의 생각은 알겠는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일단 세리아님은 둘째치고, 저부터가 리에나님이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감금해버리고 싶네요.”
세릴이 아공간에서 밧줄을 꺼내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건 덤이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솔직히 곧바로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거라 추측될뿐더러, 300년간 나만을 기다리며 버텨왔을 존재들이니까.
실제로 나를 묶거나 하지는 못해도 내가 사라지는 즉시 세리아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말이다.
“저희를 데려가신다면야 상관없긴 한데.”
미야가 우리들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고는 대안을 제시했으나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로렌시아에 가기 위해서 앞으로 해야 할 행동들은 레드문 소속인 그녀들에게는 특히나 보여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내가 강제로 명령을 내리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지금까지 레드문을 지켜온 그녀들을 무시하는 행위였고, 결국 내키지는 않았지만, 계획해두었던 방법대로 진행하는 수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레드문의 고위층이기 이전에 서큐버스로서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지는 거였다.
“오전에 원했던 것처럼 가게 안에서 봤던 옷을 입어줄게.”
“저…. 정말이에요?”
“그럼 정말이지.”
첫 번째 목표는 현실적인 미야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세릴이었고, 계획은 잘 먹혀들어가는 듯했다.
밧줄을 들고 침을 꼴깍 삼키며 다가오던 세릴이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를 매수하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세릴은 고개를 젓고는 언제 넘어갈 뻔했냐는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거로 저를 매수할 수는 없어요,”
“그럼. 그럼 아무리 세릴이라도 고위 서큐버스인데 그런 거로 넘어갈 리가 없죠.”
덕분에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세릴을 바라보고 있던 미야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꼭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한듯한 목소리와 행동과는 달리 그녀들에게 보이지 않는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지금의 반응들도 전부 예상하던바.
한 번에 넘어가리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고, 방금의 제안은 낚시 전에 물고기를 모으기 위해 뿌리는 떡밥 같은 거였다.
‘아직 인간세계에 때 묻지 않은 그녀들쯤이야 내 손바닥 안이지.’
본격적인 제안과 포섭은 이제부터였다.
* * *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상황이 꼬였을 거잖아.”
“그건 맞긴 하지만….”
김유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 달리 나를 흡정해도 좋다는 회심의 제안을 던졌지만 미야와 세릴은 군침을 흘릴지언정 끝까지 넘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대악마라도 같은 서큐버스끼리는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런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나선 사람이 김유리였다.
정령과 귀를 드러내고 자신에게 하이엘프의 피가 흐른다는 걸 밝힌 그녀는 눈이 돌아간 두 명의 서큐버스들에게 보고를 미뤄줄 시 일정이 무사히 끝나면 흡정을 해도 좋다고 했고, 포섭은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상황이 잘 풀린 것과는 별개로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야와 세릴이 우리의 앞에서 장난스러운 모습만 보여줘서 그렇지 그녀들은 알다시피 300년 넘게 살아온 고위 서큐버스였다.
“분명 내가 했던 건 장난 수준일 거야.”
“그런 사소한 건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 뒤에나 생각할 일 아닐까? 분위기를 깨서 미안한데 이대로라면 로렌시아에 가기도 전에 죽게 생겼어.”
그러나 김유리는 나의 충고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고, 그 말은 나의 고개를 자연스레 끄덕이게 할 만한 너무나 옳은 소리였다.
“리에나 헥... 얼마나 헥... 더 가야 해? 나 곧 떨어질 거 같은데.”
“좀 더 힘을 내! 여기서 떨어지면 마법으로도 어떻게 안 된단 말이야.”
열심히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피아는 물론이고 안겨있는 서아까지도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생각해서 선택한 게 나와 피아가 일행을 안고 날아가는 방법이었다만…. 평상시에 체력단련 따위랑은 연이 없던 피아가 벌써 지면을 향해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다행스러운 점이 한가지 있다면.
수많은 빌딩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 속에서 가장 화려한 빛을 흩뿌리는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제 도착했어. 내려가기만 하면 돼.”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갔고.
“피아야 내가 우리 가문의 선조님을 잠깐 만나고 왔는데 아직 올 때가 아니라고 하시더라.”
“미안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협정국 안에서도 한 손안에 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헌터은행 본점에.
“그래서 여기에 왜 온 건데?”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건물을 둘러보던 김유리의 질문이었다.
이곳에 가야 한다는 것만 말하고 목적은 말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알려줘야 했고, 답변도 딱히 어렵지는 않았으나.
“로렌시아는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을까?”
나는 대답을 해주는 대신에 역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피아와 서아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김유리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답변을 내놓았다. 하프엘프인 그녀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스크롤. 하이엘프들이 만든 전송 스크롤만이 로렌시아의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버지에게 들었어.”
“정답이야.”
로렌시아는 육로, 항로, 해로 같은 일방적인 방법으로는 갈 수가 없는 곳이었다.
영토 전체가 세계수의 가호 안에 들어가 있기에 대악마정도의 급이 되어서 결계를 깨부수고 들어갈 게 아니라면, 오로지 하이엘프들만이 발행하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구하는 거야.”
“그런데 스크롤이랑 이곳이랑 뭔 상관인데? 차라리 암시장을 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김유리의 말대로 암시장에서 돈만 들인다면 스크롤쯤이야 금방 구할 수 있을 거다. 그곳에는 없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하이엘프들이 발행하는 스크롤에는 발행자와 수령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을뿐더러, 이동되는 위치가 고정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다리고 있던 엘프들에게 이 예쁜 목이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소리지.”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김유리의 가느다란 목을 가로로 가로 지으며 속삭였다.
과거의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윽….”
김유리는 자신이 하려던 일이 뭔지를 깨닫고는 소름이 끼쳤는지 목을 더듬었다.
예상대로 나를 끌어들이려는 걸 실패했다면 모아뒀던 돈으로 암시장에서 스크롤을 구하려 한듯했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켜줬다.
“이제는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거든.”
이곳 헌터은행 본점에는 하이엘프가 만든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었다.
그것도 로렌시아에 지정된 텔레포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향하게 만들어진 오로지 이지훈을 위해 레아가 만들었던 물건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금고에 들어있는걸 훔칠 거야?”
어느샌가 피아와 서아가 곁으로 다가왔고,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헌터은행이라 적힌 거대한 글씨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물건인데 정당한 방법으로 찾아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