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5. 하프엘프 김유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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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하프엘프 김유리(2)
그녀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푸념하듯 하던 말이 있었다.
실력 없는 헌터가 겉으로는 요란하며, 소문난 길드에 먹을 것이 없다고.
‘그때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지.’
사소한 거에 반응수록 너만 피곤해진다고, 나를 비롯해 이지윤이나 레아같은 동료들이 있는데 뭐 그런 거로 아쉬워하냐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한 명이라도 인원이 더 필요했던 그녀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르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깨닫기에 참으로 적절한 상황인듯했다.
“엥….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해?”
김유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던 서아나 과거에 당한 걸 갚아주려던 나와는 달리 이미 앞선 일들은 잊고 상황을 즐기고 있던 피아도 당황할 정도였는데.
얼마나 놀랐으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날개까지 꺼내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너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게.”
90도로 숙어진 허리와 정중하지만 냉철한 목소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듯한 기세를 보이던 하이엘프는 어디 갔는지 눈앞에 있던 하프엘프는 곧바로 자신의 뜻을 굽혔다.
불과 내가 결정을 내리고 1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버티다 못해 쓰러질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되어버릴 줄을 몰랐다.
그러나 허리를 들어 올린 김유리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행동인 양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질 게 뻔한 상황에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지.”
어찌 보면 매우 현명하고 합당한 판단이기는 하나.
아무리 진조 뱀파이어와 고위 서큐버스가 피와 정기를 탐내며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고귀한 하이엘프 레아의 후손이지 않은가.
지금의 행동은 숲의 여왕, 정령의 동반자, 엘프의 수호자라 불리었던 레아가 이룬 모든 업적들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호부견자가 따로 없군.’
재능만 믿고 깝치던 이윤우를 본 이후로 오랜만에 느끼는 매우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너 따위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뭔데.”
이제는 얼굴조차 보기가 싫었기에 피아와 서아가 납득할만한 조건만 나온다면 그냥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비꼬는듯한 말투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돈, 흡정, 흡혈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들어준다 말하며 한 가지의 조건을 내걸었는데.
“너 미쳤어?”
김유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아마저 걱정을 할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조건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모든 걸 바꿔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기도 했고.
자신이 엘프왕국에서 무언가를 해야 했는데 그걸 도와달라니.
앞에 있었던 반응들로 보아 분명히 그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하는 말인 건 분명했다.
갑작스레 분위기까지 바꿔가면서 이런 조건을 꺼낸 의도가 조금은 궁금해졌고, 김유리의 머릿속에 마나를 집어넣으려는 서아를 말리고는 이유를 물었다.
“거기에 왜 가고 싶은데?”
자신의 존재를 납득시킨다거나, 잡혀있는 하프엘프들을 풀어준다는 얼토당토않은 내용이라면 못들은 체하고 내쫓을 생각이었다. 용기와 만용은 엄연히 다른 거였으니까.
그러나 김유리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내가 예상하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왕국에 감금되어있는 어머니를 데려와야 해.”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로 어머니가 그곳에 잡혀있는지, 그걸 왜 네가 데리러 가는지 물어봐야 할 건 많았지만,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란 단어는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였다.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어.”
그러나 다행히도 김유리는 굳어버린 우리를 바라보며 별것 아니라는 듯 넘기고는 세부 내용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이름부터 엘프왕국에 감금되어있는 이유까지. 타인에게 쉽게 밝히기 힘든 얘기였지만,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지언정 말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산의 능선에 걸려 노을을 흩뿌리던 태양이 사라지고 어둠을 비추는 푸른 달이 떠올랐을 때쯤에야 대화가 끝났다.
중간에 차를 타와 건조해진 목을 축일 정도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짧게 요약해보자면 이랬다.
엘프들 중 가장 고귀하다는 엘름가문 출신 하이엘프는 왕국에 경멸을 느끼고 신세아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긴 채 대한민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에서 한 명의 남자를 만나 연을 맺었고, 왕국의 법을 어긴 채 김유리를 출산해 가정을 꾸려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왕국의 엘프들에게는 새로운 하이엘프의 피가 섞인 존재가 태어났다는 걸 알아차릴 방법이 있었고, 10년 전 김유리와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추적자들에게 순순히 잡혀갔다.
“어머니는 나보고 왕국은 위험하니 찾아오지 말라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과 유품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도 꼭 가야만 해. 아카데미 입학도 아르바이트도 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야.”
“그랬던 건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둔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납득을 해서는 아니었다.
피아와 서아는 아직도 비극적 결말로 끝난 가족 이야기에 빠져있었지만, 김유리와 가장 성격과 사고방식이 비슷하다고 자부하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어머니의 내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거지?”
피아에게 끌려올 때 변변찮은 저항을 하지 않은 거나 정령으로 속박을 풀지 않은 것과 같이 김유리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몇몇 있었으나.
흡정충동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을뿐더러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어찌어찌 넘어갔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용과 우리를 끌어들였던 이유, 보여줬던 반응, 내건 조건까지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가 휴일에 놀이공원에 오는 것부터 내가 능력을 사용하면 흡정충동에 빠지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너와 나는 비슷하니까.”
김유리는 내 추론이 맞는다는 것을 순순히 밝히고는 숨겨진 진실을 말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어.”
그녀는 입학식 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우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할 거 없는 서큐버스의 흡정행위라 생각했는데 실습이 있고 나서 생각이 달라진 거다.
우리를 잘만 이용하면 엘프왕국에 갈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카데미를 비롯해 다른 기관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는 뒷배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아챘지.”
그래서 나를 싸움에 끌어들여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정기가 부족해서 제정신이 아닐 때 불쌍한 척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다 와서 실패해버렸어. 네가 그대로 나를 흡정했으면 그걸 빌미로 삼아 협박하는 계획이었는데.”
김유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거칠게 벗어버렸다.
엘프 특유의 새하얗고 슬랜더한 나신이 드러났는데, 우리가 뚫어지라 바라보는 것은 흡정의 흔적이 남아있는 귀도, 흡혈의 흔적이 남아있는 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은 가슴에 부풀어 오른 유두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액체를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그곳도 아니었고.
그녀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명치 부근에서 빛나는 문양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건 엘름가의 가주에게만 생기는 문양이야.”
아주 낯익은 모양이었다.
레아에게서도 보았던 엘름가를 지키는 수호 정령이 자신이 인정한 가주에게만 부여한다는 정령의 가호였다.
“솔직히 지금껏 너희들을 속여놓고 이제 와서 동정표를 던지는 게 역겹다는걸 알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없어.”
절박한 표정을 지은 김유리의 말대로 가호는 벌써 50% 이상이 이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가호의 원주인이 왕국으로 끌려간 김유리의 어머니라는 것과 그녀의 생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리에나.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언제나 그랬듯 너의 선택에 따를게.”
피아랑 서아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에게 결정을 넘겼다. 나를 믿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던 김유리는 나의 손을 잡아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리고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어머니만 무사히 데려올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너에게 줄게 몸까지도. 개처럼 짖으라면 짖을 거고 노예계약을 맺어도 상관없어.”
지금 김유리의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일뿐. 솔직한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웬만해서는 관여되기 싫었는데.’
엘프 특히 하이엘프란 그런 존재였다. 얼굴도 아름답고 능력도 좋고 성격 또한 크게 모나지 않았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보기에 참 좋은 친구들.
레아와 있을 때도 엘프왕국과 관련된 트러블이 참으로 많았었다.
‘그렇지만 레아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시기로 봐서는 분명 신세아가 레아의 딸일 것 같았는데, 부탁을 거부하고 싶어도 전쟁 전에 그녀를 떼어놓으며 했던 약속이 나를 속박하고 있었다.
“에휴….”
한숨을 내쉬고는 김유리의 가슴에서 손을 빼내 흐트러진 머리와 눈물이 맺힌 눈가를 정리해주고, 침대에 있던 옷을 들어 올려 입혀줬다.
그리고 복장을 깔끔히 정리해주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너를 비난해서 미안해.”
사과해야만 했다.
그 적이 자신의 뿌리이며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집단이라 하더라도 김유리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꺾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레아의 후손…. 아니, 엘름의 다음 대 가주이자 하이엘프 김유리로 불리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뭘 그런 거 같고 그래. 신경 쓰지 마.”
김유리는 나의 볼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껴안고는 레아에게 하던 것처럼 뒷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줬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그 볼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너무나 레아랑 겹쳐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 피아와 서아에게 따로 행동하기 위해 허락을 구하려 했다.
아무리 그녀들이 나의 결정의 존중한다고 했으나 이건 위험이 따를뿐더러 나의 개인적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혈 하이엘프를 구해주면 피 좀 얻을 수 있겠지?”
“하이엘프의 정령 마법이 궁금하긴 하네요.”
피아와 서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짓고 있었고,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휴일을 즐기는 거는 다 같이 엘프 왕국에 다녀와서 해도 괜찮을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녀들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일은 한가지.
몸을 돌려 내가 레아와의 약속을 잊은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준 김유리에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원하는 걸 이뤄줄게.”
300년간 미뤄왔던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