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34. 하프엘프 김유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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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하프엘프 김유리(1)
“리에나.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야?”
아직까지도 표정이 풀리지 않은 서아가 나를 바라보며 재촉을 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곧바로 그러겠다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으음…. 잠깐만 기다려줘.”
복잡한 심경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지막 차례로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문 앞에서 벗어나질 못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침대 위에 자리한 세 명의 존재들.
세릴의 가게에서 보았던 엘프 여왕의 새하얀 정복을 입은 채로 손발이 묶여있는 하프엘프와 그녀의 목에 달라붙어 흡혈을 하고있는 뱀파이어.그리고 그녀들을 지켜보고…. 아니, 감시하고 있는 인간까지.
분명 직접 나서서 저 하프엘프를 손봐주기로 결심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려고 하자면 할 수는 있는데 뭔가 거부감이 든다 해야 할까.
아무리 시대가 지나며 서큐버스들이 흡정행위를 자제하고 정기사탕을 먹게 되었다곤 하나. 그 고지식한 샤를조차도 흡정행위 자체를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흡혈을 하고, 엘프가 정령을 다루듯. 흡정은 서큐버스들의 본질 그 자체였으니.
‘하지만 나는 태생이 서큐버스가 아니지.’
지금껏 세리아에게 정기를 나눠 받고, 피아를 흡정하며 적응을 마쳤다지만, 그것들은 둘만 있었을 때의 일이지. 누군가가 지켜보는 장소에서 흡정 행위만큼은 여전히 매우 부담스러웠다.
인간의 시각으로는 서큐버스의 흡정행위는 성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피아같은 경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흡혈행위가 성행위로 보이던 대상이 오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동기이던 서아가 지켜보고 있던 말이다.
“리에나. 평범한 엘프답지 않게 맛있으니 빨리와.”
한차례 흡혈을 마친 피아가 나를 불러들였다. 표정을 봐서는 내가 흡정을 하는 동안 나에게 달라붙어서 맘껏 피를 빨아갈 생각인 듯했다.
직접 마시는 거랑 건네받은 피를 마시는 거랑은 맛의 차이가 크다나 뭐라나.
그렇다 해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어.”
서아와 피아가 노리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 정기가 필요하기는 했다. 놀이공원에서 마법을 사용하고부터 점점 널뛰던 감각이 지금 와서는 위험할 지경이었다.
흡혈의 여파로 눈이 반쯤 풀려있는 김유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잠시만 말 좀 들어줘.”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묶인 몸을 꿈틀거리며 몸부림쳤다.
그 모습은 쥐꼬리만큼 남아있던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나.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보이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투명한 피부와 피 냄새 속에 희미하게 섞여 있는 하이엘프 특유의 숲의 향기는 죄책감을 저기 어딘가로 날려 보냈고.
피아와의 흡혈로 인해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청량한 맛의 정기는 이성을 붙잡고 있던 부끄러움을 집어던지게 만들었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넘어가면 되는 거야. 아무나 내가 죽거나 아무나 덮칠 수도 없잖아.’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마치고는 김유리의 몸 위에 올라타 얼굴을 내려다봤다.
하얀 침구 위에 흐트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풀어 헤쳐진 검은 머리. 이제는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이 드러낸 붉게 물든 하프엘프 특유의 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눈물이 맺혀있는 초록빛의 눈동자.
마지막으로 달뜬 숨을 내뱉기 위해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하아….”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며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빨리 아래에 깔려있는 존재의 몸을 탐하고 정기를 흡수하라며 나를 다그치고 있는 서큐버스의 본능을 참아내는 것도 한계였다.
“너는 진짜 미쳤 읍….”
정신이 돌아왔는지 욕을 뱉으려는 입을 손으로 막아버린 뒤 상체를 숙여 그녀와 몸을 겹쳤다.
흐트러진 정복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나를 간지럽혔고 하이엘프 특유의 기운이 온몸을 잠식했지만, 나의 신경을 빼앗아가진 못했다.
붉게 달아오른 뾰족한 귀.
그녀의 귀가 나의 입 옆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생각 따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귀 끝을 입술로 덮었고 혀를 사용해 천천히 귓바퀴를 쓸어내려 갔다.
“하으으윽.”
손 틈새로 김유리의 격렬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와 적막이 흐르던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음?”
아무리 엘프들의 성감대라 하지만 예상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에 순간 놀라서 고개를 살짝 돌렸고.
‘귀엽네.’
지금껏 본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납치한 다음 물에 빠트렸을 때의 화난 표정도 아니고, 피아에게 흡혈을 당했을 때의 애처로운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이런 소리가 나올지 몰랐다는 듯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여전히 귀 끝을 입안에 넣은 상태로 작게 속삭였다.
“씨….”
내가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대답은 해주지 않았지만, 말을 하면서 닿은 입술 때문인지 몸을 부르르 떠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기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대답해줄 때까지 계속할 거야.”
이번에는 자존심을 꺾을 줄 알았다.
엘프들의 귀는 인간과 다르게 신경과 마나회로가 몰려있는 곳이었고, 흡정충동에 휩싸인 내게 보여지는 그녀의 성감대 또한 그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새어 나오는 신음과 움찔움찔하는 몸과는 별개로 그녀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는 것을 참아냈고, 자연스럽게 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김유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부분에서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 인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들은 포기할법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던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엘프.
머리색과 인상이 다르다 보니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김유리는 분명 엘프왕국의 공주였던 그녀와 닮아있었다.
입안에서 귀를 빼내고 입을 막고 있던 손도 치워버린 뒤 숨을 고른 김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나 아버지 중에 혹시 엘름이란 성을 가지신 분이 있어?”
“왜 물어보는데?”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경계했지만, 답변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머니랑 엘름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 미세한 반응을 보인 거로 봐서는 그녀의 어머니쪽이 엘프 왕가의 핏줄을 타고난 듯했다.
“미안해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보네.”
미안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와는 별개로 입꼬리가 주체를 모르고 올라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와 김유리를 겹쳐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가학심이 솟구쳤다. 당한 게 셀 수 없이 많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반응이었다.
희귀한 정령을 잡는다며 자고 있던 나를 결박하고는 천계로 끌고 갔고.
열심히 이단심문관의 규칙을 지키던 내게 고자라는 별명을 붙였으며.
위험하니 나오지 말란 곳에 기어코 따라 나와서 전쟁 전에 힘을 빼놓게 만든 녀석이었다.
그런데 김유리가 그녀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니.
그녀와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당한 건 당한 거다.
이건 그...뭐지? 누구였더라. 어쨌든 그 여신께서 나에게 주신 천금과 같은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지금껏 피아의 흡혈행위와 나의 흡정행위를 지켜보고 있던 서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태까지는 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런 상황은 지나갔고. 이후로 할 일들은 보여주기가 조금 곤란했다.
“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서아가 역으로 질문을 건넸고, 나는 제일 무난한 방법을 말했다.
“김유리한테 용건이 있다면 먼저 일을 끝내고 넘겨줄게. 아까 말했던 대로 휴일은 기니까.”
이런 것에 무감각하고 이미 한번 경험했던 피아라면 모를까. 가문에서 귀하게 자라왔을 서아는 충격을 받거나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듯했다.
내가 김유리와 몸을 겹쳤을 때부터 목에 달라붙어서 흡혈을 하고 있던 피아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딱히 지금의 모습으로 봐서 싫어하지는 않을 듯 보이는데?”
피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즐기자며 침대 끄트머리에 있던 서아를 끌어당겼다.
눈을 빛내고 입맛을 다시는 거로 봐서는 이번 기회에 대마법사와 용사의 피도 마셔보고 싶겠지.
그러나 피아의 목적과는 별개로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김유리에게 온 신경을 빼앗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서아에게서 흘러 나오고 있는 정기의 양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랬던 건가.’
내 걱정과는 달리 서아는 지금의 상황에 충격을 받거나 거부감이 들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직접 참여하는 것보다 지켜보는걸 좋아한 거다.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는지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피아와 들켜서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서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참으로 특이해.”
흡정행위를 하게 해주는 대신 흡혈행위를 원하는 뱀파이어랑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인간이라.
어떻게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이렇게 잘 어울리는 친구들을 만났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왜 그걸 나를 빼고….”
다시 한번 기운을 차린 김유리의 입을 막고는 피아와 서아를 바라보며 결정을 내렸다.
“서아가 괜찮다면야 문제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