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3.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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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건의 전말.
울창한 푸른 숲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한 채의 저택.
야외에 펼쳐져 있는 천계를 재현한 정원과 풀장, 대리석으로 조각된 고급스러운 외형은 이곳을 단순한 풀빌라가 아닌 특별한 존재들만이 머물 수 있는 장소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외형처럼 현재 안에 머무르고 있는 존재들도 참으로 특별했다.
“몸부림치길래 묶어서 데려오기는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피로 연성한 밧줄에 묶인 사람을 내려다보는 진조 뱀파이어이자 공작가 영애인 피아.
“일단 얘기부터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밧줄에 묶인 사람의 재갈을 풀어주는 용사와 대마법사의 후손인 서아.
“미친년들….”
우리를 째려보며 이를 갈고 있는 반줄의 묶인 사람인 김유리까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어디를 가나 대접받을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침대 대신 풀장에 마련된 선베드에 누워 요양을 취하고 있는 서큐버스퀸이자 대악마인 내가 있는 곳이었다.
“일단 물에 한번 담그고 생각하자.”
아무리 놀이공원에서 별 탈 없이 빠져나왔고, 미야와 세릴에게 적당히 뒷수습을 마쳤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였다.
“야! 리에….”
물에 담근다는 소리에 김유리가 발버둥을 치려 했으나.
“일단 물에 들어가서 머리 좀 식혀.”
피아는 잘 즐기고 있던 놀이공원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지금의 상황이 영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를 망설임 없이 발로 밀어버렸다.
꾸르르르륵
그러나 밧줄에 묶인 채 얼굴부터 입수해버린 김유리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물의 하급정령을 소환해 얼굴만 물 위로 둥둥 띄운 그녀는 열심히 입을 놀렸다.
“이런 또라이년들아! 내가 정령을 다룰 줄 몰랐으면 너네는 지금 사람 한 명 죽인 거야!”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내 뇌 속의 건강문제부터 시작해서 입학식 때의 사건까지 언급하는 걸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이야…. 정령이 없어도 입은 떠다녔겠어.”
감탄이 나왔다.
깔끔하게 땋아 내린 검은 머리와 초록빛이 도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우아한 얼굴로 저런 욕을 할 수 있다니.
과거에 태어났다면 이쪽 업계에서 정점을 차지한 나를 뛰어넘는 더러운 전투법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을 재능이었다. 아마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욕으로 적의 멘탈을 흔들고 단번에 심장을 노리는 희대의 저격수가 되었을 거다.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가르쳤겠지.’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태어나버렸다.
“리에나. 저거 그냥 수영장 바닥에 묶어둘까?”
“지금껏 특별반의 동기이기에 참고 있었는데 더는 무리야.”
이런 욕설에 이골이 난 나와 달리 피아와 서아는 듣기가 거북한 듯 보였다. 지금 시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성격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목격자도 있는데 아카데미 동기를 이런 곳에서 죽일 수는 없는 법.
밧줄에 무게추를 달아 김유리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는 피아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정신은 차렸을 테니 얘기부터 들어보자.”
굳이 우리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었다.
만약 얼토당토않은 내용이면 한 2달쯤 서큐버스들에게 던져주고 맘대로 사용하라 말하면 되는 간단 한일이다.
“쟤 말대로 빨리 날... 꾸르륵...”
“조용히 하고 있어.”
피아는 여전히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김유리가 맘에 들지 않은 듯했지만, 결국에는 밧줄을 당겨 선베드 앞으로 그녀를 끌고 왔다.
“고마워.”
나는 옆으로 다가온 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김유리를 제대로 바라봤다. 욕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우아한 외모나 옷차림 같은 외형적인 모습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숲속으로 들어오니 더욱더 강해진 기운과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천사와는 다른 거부감.
들키지 않기 위해 과장된 언어로 꽁꽁 숨기고 있던 비밀.
그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자세를 고쳐앉은 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그녀의 옆머리를 뒤로 넘겼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까칠한 김유리의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 속에 자리하고 있던 것은 평범한 인간의 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엘프의 귀도 아니었지만.
“하프엘프?”
“그것도 1세대 혼혈이야.”
입장 상 여러 종족의 혼혈을 많이 봐왔을 피아와 서아도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김유리는 하프엘프였다.
그것도 심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세계수의 가호를 봐서는 평범한 인간과 엘프의 혼혈도 아니고 엘프들의 귀족이라 불리는 하이엘프의 혼혈.
그러나 그녀들은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다른 부분에서 놀라고 있었다.
“하프엘프가 아직도 남아있다니.”
“엘프 왕국에서 모두 데려간 줄 알고 있었는데.”
하프서큐버스, 하프뱀파이어등 지금 와서는 인간과 이종족의 혼혈이 꽤 존재했으나 하프엘프의 경우에는 상황이 매우 독특했다.
혼혈이 발견되는 즉시 왕국으로 회수해 죽을 때까지 왕국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혼혈을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하는 다른 종족과는 달리 엘프만큼은 끔찍이도 자신들의 피가 섞이는 걸 싫어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하프엘프인 게 이제와서 무슨 상관인데! 뭐 엘프왕국에 신고라도 하게?”
김유리가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걸 느꼈는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우리를 노려봤지만, 눈동자 속에 비친 두려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들키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랬다.
반응으로 봐서는 분명 좋은 협박재료였고, 이걸 사용해서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야 있었으나.
“이제 대화를 해보자.”
김유리를 적대하는 상황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까지 압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분명 깊은 트라우마일 테니까.
손을 휘둘러 그녀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무슨 속셈이야?”
김유리가 묶여있던 몸을 주무르며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내게 중요한 거는 그녀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하프엘프라는 그런 정보가 아니었다.
“뭔 짓을 했길래 거기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 거야?”
“내 정체에 대해 추궁하지 않는 거야?”
김유리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역으로 질문을 건넸지만, 오히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냥 지금의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낸 뒤 피아와 서아랑 같이 남은 휴일을 편한 맘으로 보내고 싶을 뿐이지만.
“아니다 잠깐 기다려봐. 너희들은 궁금해?”
혹시 모르는 일이니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피아와 서아에게 차례를 넘겼다. 그녀들이 궁금하다면야 아주 자세하게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남들에게 잔정이 많은 그녀들조차 김유리를 바라보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뭐 말하기 싫다는데 남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는 건 조금 그렇지.”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
애초에 첫인상부터 지금까지의 사건들이 있다 보니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알았으나, 조금 전의 욕설이 크게 작용한 거 같았다.
김유리의 입장에서는 성격이 그런 건 둘째치고 하이엘프에 관한 내용을 숨기기 위해 더 과장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나서서 정정해줄 상황도 아니고, 자업자득일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모두 엘프에 관한 이야기를 딱히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김유리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래?”
“그러니까 빨리 지금의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부터 설명해봐.”
“알겠어. 그러면 내가 여기에 온 얘기부터 시작할게.”
두통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김유리를 내려다봤고, 그녀는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지금의 상황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생활할 돈이 부족해서 단기 알바를 뛰기 위해 놀이공원을 찾아온 일부터 실습으로 친해진 친구들을 만나고, 다른 아카데미 학생이 정복을 보고 시비를 걸어오는 일까지.
꼭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마냥 아주 세세한 디테일까지 전부 설명해줬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솔직히 듣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것들. 다음에 나온 이야기야말로 나의 궁금증을 관통하는 내용이었다.
“근접에서 1대1로는 못 이길 거 같은 애가 있었고, 그렇다고 패싸움을 하자니 질 것 같았는데 정령이 저기에 익숙한 기운이 있다고 말해주는 거야. 그래서 찾아간 거지.”
상대 학생 중에 조금 강한 애가 있기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너무 딱 들어맞아서 소름이 끼쳤다.
나 같았어도 그랬을 테니까. 자신이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 강한 사람을 데려와서 붙이는 게 정론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했을 거와 내가 당한 것이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 모든 사건을 짧게 요약을 해보자면.
“그러니까. 싸움이 붙었는데 일부러 나를 찾아오면서까지 대신 싸움을 걸게 만들었다 그거지?”
일말의 미안함도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는 인식저해마법의 효력이 다했는데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잘못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완전히 착각이었다.
이건 내가 죽어갈 때 떡을 치고 있던 성녀와 같은 레벨의 잘못.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잘못이었다.
그때는 남의 행복을 보고 배가 아팠던거지만, 지금은 남으로 인해 내 행복이 깨져버린 거니까.
최대한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참아왔지만, 꼬여버린 나의 심기를 풀려면 직접 나서야만 했다.
“네가 먼저 빨래? 내가 먼저 흡수할까?”
놀이기구를 탈 때보다 더욱 극적인 표정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피아에게 의견을 물었다.
“미쳤어? 지금 내 피랑 정기를 흡수한다고?”
김유리가 본능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캐치하고 도망가려 했으나, 그 시도는 불발에 그치고야 말았다.
“유리야 알바비는 내가 다 충당해줄 테니까 같이 길고 긴 휴일을 만끽하자. 피아랑 리에나도 동의하지?”
어느샌가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서아가 마법으로 그녀를 다시 속박시키고는 입을 열었고.
“어…. 응.”
“서아 맘대로 해.”
실습 때 서아를 기절시킨 이후 오랜만에 보는 무서운 표정에 나와 피아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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