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7.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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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가 잠든 새벽 창문을 통해 기숙사로 들어온 세리아에게 커피를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피아는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피아네 가족과 친하다 하더라도 대악마이지 않은가. 분명 자신을 알아볼 게 분명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서큐버스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걱정과 달리 커피에 설탕을 들이붓고 있던 세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냥 편하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냥 들키라고?”
세리아가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에 혹시 머리가 돌아버린 것 아닐까 싶어 이마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투과해봤지만, 딱히 집히는 건 없었다.
‘정신공격을 당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설마….’
문득 지속해서 걸린 최면 같은 것은 마력적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과 뇌에 강한 충격을 가하면 깨어난다는 속설이 떠올랐고, 이마 위에 올라가 있는 손에 마력을 응집하기 시작했지만.
“야! 너 미쳤어?”
환자의 강한 거부에 마력이 흩어지며 치료가 실패하고 말았다. 최대한 들키지 않기 위해 몰래 마력을 모았지만, 역시 악마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인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렇다면 이제 화가 난 환자에게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기습? 반격? 방어? 회피?
전부 틀렸다. 곧바로 테이블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 정신지배를 당한 줄 알고.”
“뭐? 정신지배?”
세리아가 나를 바라보며 미쳤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게 검은 달의 주인은 그 미친 데스나이트이지 않은가.
처형자.
전장의 악몽.
검은 죽음.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고 살아 돌아온 자가 이 세 개의 이명을 듣는다? 아무리 용감했던 헌터도 그 즉시 바지에 질질 지려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나는 얼굴에 최대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위기를 만들고는 입을 열었다.
“그 미친놈 보고 괜찮다 하길래 혹시나 해서.”
그러자 계속해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던 세리아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뭔가 머쓱한지 커피잔을 비비적대며 말을 이었다.
“아…. 얘기를 해주지 않았었나?”
“무슨 얘기?”
“역시 안 했었구나. 하긴 그 소식을 못 들었으면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겠지.”
설탕물을 홀짝이면서 이어진 그녀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뭐? 30년 전에 세대교체를 했다고?”
그 검은 달이 대악마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부터도 놀랄 일이었는데, 잿빛 달을 제외한 모든 대악마들이 자신들의 자식이나 제자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영면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해 처먹을 거 같던 게네들이 왜?”
믿어지지 않는 소리에 세리아를 바라보며 설명을 재촉했다.
마계에 고립되었을 때 자신을 도와줬던 푸른 달 같은 경우에는 평생토록 대악마로 군림할 거라며 껄껄 웃던 사내였다. 검은 달이나 흰 달의 경우도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을지언정 자신의 자리에 대한 무게감과 책임감에 대해서는 잘 알기에 쉽게 물려줄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러나 세리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평화가 지속되는 이상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다고 말했다.
중간계와 차원이 연결되고 태어난 우리들과는 달리 마계의 초창기부터 자리를 지켜온 그들의 나이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오로지 전쟁과 폭력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단 걸 깨달은 거지.”
세리아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이끌었던 초월적 존재들의 끝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래도 너무 슬퍼하진마.”
“슬퍼해? 누가? 내가?”
그러다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세리아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에이 무슨 소리야. 지들이 죽어주면 다행인 거 아니야?”
솔직히 자신과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데다 리에나의 입장에서도 딱히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이 죽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악연이 사라져준걸 축하해야 했으나.
툭 툭
어느샌가 흘러내린 눈물이 테이블을 적시고 있었다.
“어…? 뭐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능도 의식도 영혼도 모두가 기뻐하고 있지만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마치 애처로우면서도 불안 불안한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을 보는듯한….
“괜찮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세리아의 물음에 손을 비벼 눈물을 닦아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은 멈췄고. 방금까지 느끼고 있던 감정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응…. 괜찮은 것 같아.”
“갑자기 울어서 깜짝 놀랐잖아.”
세리아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눈가를 닦아주고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시작했다.
“다들 마지막까지 후회하지 않았어. 오히려 나보고 새로운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던걸. 솔직히 나도 많이 늙었는데 말이지.”
그때 당시를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허탈한 미소가 담겨있었지만, 그 미소 한켠에는 추억과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생각 외로 전대의 대악마들과 리에나와 세리아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그리고 대화가 이어지며 주제가 자리를 넘겨받은 새로운 대악마들과 시대를 이끌어갈 아이들로 넘어갔는데, 전과 달리 푸념과 한탄이 80%를 이루고 있었다.
“요새 젊은 서큐버스들이 생각하는 걸 보면 못 따라가겠단 말이야.”
“나도 피아나 서아를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해.”
결국, 이걸보면 나와 세리아도 앞서 자리를 물려준 대악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는 게 느껴졌다.
세리아는 자신의 아이들과 레드 문의 이익을 위해.
리에나는 서큐버스들의 보호를 위해.
이지훈은 인간들의 승리를 위해.
겉으로는 인간계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곤 하지만 본질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과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과거의 잔재들이다.
하지만 평화가 찾아온 지금 앞으로 필요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일 테고, 세리아도 그걸 알고 있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전쟁 중이던 그때보다. 지금이 죽는 숫자가 훨씬 더 많아.”
모순적이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대악마들이 자리하고 있던 악의 위치는 노예상과 같은 수많은 범죄조직이 차지했고, 그들은 더욱더 깊고 교묘하게 숨어들어 평화를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인간들은 물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천사와 악마들까지 언제까지나 지금의 평화가 지속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세리아의 말처럼 내가 리에나의 몸으로 겪어본 평화는 그다지 희망찬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태위태한 얼음 호수 위를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걸 깨닫는 순간은 그리 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전쟁은 시작될 거야.”
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나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껏 진지한 얘기를 해오면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고 있던 그녀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 보였다.
“나와 같이 이미 물길에서 벗어난 과거의 존재들은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파문을 일으킬지언정 방향을 틀 수 없어.”
힘이나 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신조차도 간섭할 수 없는 중간계에 새겨진 법칙이자 저주였다.
그래서 대악마들이 시대의 흐름에 속해있는 새로운 후임들을 임명한 것이고, 이지윤과 같은 존재들이 저번과 같은 상황에서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특별해. 과거의 존재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이끌고 있어.”
세리아는 아공간에서 두 개의 검을 꺼냈다.
미스릴을 신성력으로 단조해 만든 순백색의 바스타드 소드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붉은빛을 띠고 있는 레이피어였는데, 둘 다 매우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 이유는 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과 관련되어있겠지.”
정곡을 찌르는 얘기에 깜짝 놀라 세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나와 리에나의 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하도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비밀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걸로 네가 부탁했던 마지막 의뢰까지 들어줬어.”
“의뢰?”
“그래, 너와 그 녀석의 검을 찾아다가 전달해주라 했었잖아.”
세리아는 검을 가져오다 죽을뻔했다든지,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다든지, 고생담을 말하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검을 받아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 눈앞에는 마수와 악마들의 시체가 가득한 핏빛으로 물든 대지에서 두 개의 검이 격돌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바스타드 소드가 만들어낸 하나의 검흔은 하얀 잔상을 남기며 일직선상의 모든 공간을 베어갔고, 레이피어가 만들어낸 수많은 검흔은 공간을 압축하며 붉은 구를 만들어냈다.
공간과 공간이 격돌하고, 시간과 마나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중간계의 이치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곳에서 두 초월자는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서큐버스들을 위해서 싸우는 거지만, 너는 왜 싸우는 건데?”
“인간들의 승리를 위해. 앞으로 용사가 걸어갈 길을 만들어주기 위해 싸운다.”
“거짓말하지 말고. 내가 볼 때 너는 그냥 시키니까 싸우는 거야.”
“그렇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 거지?”
“그냥 너라면 대악마인 내가 부탁해도 들어주려나 생각 좀 해봤어.”
그들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검을 들어 올렸으며. 눈앞에 펼쳐져 있던 장면도 이것을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리에나. 뭘 본 거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금까지 보았던 것은 꿈이었다는 듯 심각한 표정의 세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인물들은 자신과 리에나가 맞았다. 하지만 리에나와 싸운 것에 대한 기억은 금제를 걸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내가 모르는 기억의 결손이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억제력.”
아까도 말했듯이 시대의 흐름을 지키는 중간계의 법칙이자 저주가 나의 기억이 위험하다 판단하여 삭제시킨 것이 분명했고, 대화의 내용을 보아 시대의 흐름은 다시 한번 전쟁을 바라고 있다는 소리였다.
“세리아. 아까 나한테 서큐버스들과 레드문을 부탁한다 했었지?”
지금까지의 자신은 시대의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리에나의 의지를 이어 서큐버스들과 레드문, 그리고 이지훈 시절의 친우들과 지금 사귄 친구들만을 보호하려 했었다.
하지만 리에나의 안배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지금. 모든 흐름은 뜻대로 흘러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 꿈을 크게 가져보자고. 서큐버스가 절대악으로 군림하는 세상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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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광오한 선언에 기뻐할 줄만 알았던 세리아는 뭔가 미적지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리에나.”
“응 왜?”
“꿈을 크게 갖는 것도 좋고, 서큐버스가 절대 악으로 군림하는 것도 좋은데. 일단 아카데미부터 제대로 다녀서 신분부터 정착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여줬는데, 그곳에는 교수부터 해서 학부모들까지 나의 태도를 지적하는 수많은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곧 있으면 참관수업이라 했지?”
나는 의자 위에 올라가 있던 한쪽 다리와 힘차게 내뻗은 양팔을 고이 접은 뒤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의 태도 변화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의 절대악님께서 세계정복비용을 뺏기고 싶지 않고 싶다면 열심히 해야 할 거야.”
절대악을 뛰어넘는 후원자님의 명령을 들은 나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선 뒤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교우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충실히 학업에 임하겠습니다!”
일단 서큐버스가 절대악으로 군림해 하렘 만들기 Part.1은 잠시 미뤄둬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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