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26. 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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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일상으로
처음 보는 새하얀 천장과 코를 간지럽히는 약품 냄새.
“이곳은 어디…. 앗!”
예전부터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대사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옆에 있던 누군가가 때린 딱밤에 입을 다물고 이마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누구….”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서아가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었고,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면서 변명을 내뱉었다.
“병원인 것도 알고, 벌써 5일이나 지난 것도 다 아는데. 이건 꼭 해야 하는 클리셰란 말이야.”
“됐으니까 빨리 일어나.”
나의 이마에 딱밤을 가격한 뒤 연신 한숨을 내쉬던 서아는 침대의 등 부분을 들어 올려 내가 몸을 기댈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간이 식탁을 펼쳐 아침밥을 올려줬는데.
“나 멀쩡하다고 결과 나오지 않았어?”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분명 어제 들었던 결과에서는 내상을 입은 것도 정상적으로 돌아왔고, 농축된 정기로 인한 부작용도 없었으며, 파열된 근육들도 전부 치료했기에 며칠 동안의 근육통을 제외한다면 이상은 없을 거라 했었다.
그래서 1시간 후에 퇴원하기로 일정을 잡아놨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것은 그 유명하고 악독한 악마 전용 환자식과 그것을 먹으라며 나를 압박하고 있는 서아였다.
“안 먹을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지은 죄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들어 올렸고, 밥도 죽도 아닌 이상한 맛이 나는 미음만을 떠먹어야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침밥을 꾸역꾸역 먹던 와중.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피아가 들어왔고, 서아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할 말이 없어?”
밥을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첫날에 무릎을 꿇고 빌었으니 사과를 하라는 의미는 아닐 테고, 그녀가 원하는 건 농축된 정기를 투약하고 벌어진 일들을 말하는 거겠지만.
그거에 대해서는 딱히 이렇다 해줄 말이 없었다.
그녀들이 알면 걱정을 하거나, 숨겨야 하는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나도 알려주고 싶은데, 전에 말했다시피 기억이 없어.”
그저 몽롱한 상황에서 프레이교수가 나를 데리러 왔다는 것만 기억할 뿐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고 싶은 상황이었다.
5일이라는 시간 동안 병원에 감금당하다시피 해서 아는 게 없었으니까.
분명 상황을 수습하고 자신을 데려온 사람은 프레이교수일 텐데, 그녀는 자신이 처음 깨어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고.
열심히 나에게서 마수애호가라는 놈에 대한 정보를 뽑아간 협회, 국가, 아카데미가 주축으로 만들어진 특수대응팀도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한 언급을 해주지 않았다.
‘레드 문을 통해 대응팀의 동향을 파악해야 했지.’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얻은 정보들로 현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툭
무언가 자신의 옆구리를 건드렸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초췌한 모습의 피아가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5일 만에 만나는 폭신한 머리를 쓰다듬었고, 피아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 목적을 말했다.
“피. 삼두랑. 없어졌어.”
“피를 달라는 거야?”
은은하게 흘러들어오는 정기를 느끼며 그녀가 원하는 걸 맞추자, 정답이었는지 손 아래에 있던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솔직히 상처를 내서 피를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러나 오랜만에 피아의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더 괴롭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는 아픈 친구한테 피를 달라고 하는 거야?”
최대한 아픈 표정을 지은 채 서운하다는 듯 피아를 바라봤다.
“아….”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내 연기가 너무 완벽했던 것일까 크게 떠진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망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서아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빨리 알아서 수습하라는 눈빛을 보내기만 했고.
“미안해…. 장난이었으니까 울지 마.”
나는 곧바로 손가락에 상처를 낸 뒤에 피아의 입에 넣어주고는 등을 쓰다듬으며 달래줘야 했다.
그렇게 피아가 내 상의에 눈물을 닦으며 열심히 손가락을 빨길 5분.
열심히 흡혈을 마치고 비어있는 시험관에까지 피를 모두 채워 넣은 피아가 언제 울었느냐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리에나. 너는 연기 못하니깐 남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무슨 소리야?”
순간 상황파악이 안 돼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병실 안을 분주히 움직이던 서아가 답을 말해줬다.
“무슨 소리긴 나랑 피아한테 속은 거지.”
“둘이 짜고 날 속인 거야?”
이제야 부자연스러운 아침밥부터 해서 흡혈까지 모든 상황이 계획되어있다는 걸 깨닫고는 피아랑 서아를 노려봤지만.
“빨리 갈아입고 나와.”
“슬슬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
그녀들은 이미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짐을 정리한 채 내가 갈아입을 옷만을 남겨두고는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피아가 시선을 끄는 사이 서아가 모든 탈출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두가 별 탈 없이 사건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제 자신도 저 문을 나간다면 아카데미에 돌아가서 그녀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 일의 뒤처리를 대응팀에만 맡겨두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일을 잘 처리했으면 모를까. 5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인반마와 마수애호가의 시체는 어디 있는지, 노예상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합법적인 기관의 한계였다.
‘이대로라면 다음번에도 또 이런 상황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어.’
자신과 친구들의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은 한 번이면 충분할뿐더러. 제거할 수 있는 화근을 남겨두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아공간에서 휴대폰을 꺼내 처음으로 비서실장 루퍼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신호음이 3번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전화를 받았고, 그의 물음에 단 한 가지만을 지시했다.
“본보기를 보여줄 거야. 노예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버려.”
“모든 것은 리에나님의 뜻대로.”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화 안 낼 테니까. 옷 좀 바꿔주면 안 될까?”
웬만해서는 전부 맞춰주려 했지만 그래도 배꼽이 보이는 옷은 조금 그랬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는 그리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여느 때와 같았다.
피아, 서아와 함께 등교했고, 건물 뒤편에 있는 호수에서 프레이교수와 시간을 보냈으며, 오랜만에 점심을 먹기 위해 본관 식당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분위기와 열정적인 학생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들까지.
“분명 이번 일은 우리랑 교수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었어?”
시선에 가장 약한 서아가 총괄교수가 말해준 얘기를 꺼냈지만, 그건 순진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말이었다.
2일 차에 실습이 갑작스레 중단됐는데 학생들이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리가 없었고, 교수들은 비밀을 지키더라도 대호길드의 헌터가 단 한 명이라도 비밀을 누설했다면 아카데미에는 이미 전부 퍼져있다고 봐야 했다.
시선을 피해 내 뒤로 숨어버린 서아를 앞으로 끌어오며 조언을 해줬다.
“그냥 즐겨 피아는 이제 신경도 안 쓰잖아.”
사탕을 먹던 피아도 까치발을 든 채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건 리에나의 얼굴을 쳐다보는 거지 우리를 보는 게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참으로 현실적인 조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피아의 말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나와 서아는 그녀가 말한 것을 되짚어보다 깜짝 놀랐다.
최근 들어 피를 마시지 않아도 조금씩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말투만큼은 버릇이 돼버렸는지 여전했었는데. 5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을 끊어서 했던 피아가 지금만큼은 웬만한 달변가 뺨을 칠 정도로 유창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 언제 피를 마셨어?”
“못 본 것 같은데.”
분명 피를 마시는 것은 본 적이 없었고 혹시 내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나 찾아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빨리 답을 알려달라는 듯이 피아를 바라봤다.
“근데 내가 몰래 피를 빨았나 살펴보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피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주머니에서 붉은기가 감도는 사탕을 꺼냈다.
분명 처음 보는 사탕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형태였는데, 그녀가 설명을 시작하자 내가 생각한 게 맞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서큐버스의 정기사탕을 참고해서 만든 거야.”
정기를 갖고 다닐 수 없는 서큐버스와 달리 혈액을 휴대하며 다니는 뱀파이어들에게 이런 사탕은 필요가 없었지만, 혈액이 없으면 의사소통의 문제점을 겪는 그녀는 나의 피를 소량으로 섞어 사탕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 사탕만으로 능력을 사용하진 못하지만, 대화는 충분히 할 수 있어.”
피아는 칭찬을 해달라는 듯이 머리를 쑥 내밀었다.
그러나 나와 서아는 뭔가 아쉽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대화가 편해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다시 말하면 이제는 끊어 말할 때마다 답답해하는 피아의 귀여운 버릇을 볼 수 없다는 소리 아닌가.
“피를 주는걸 멈춰야 하나….”
“이번만큼은 나도 찬성할게.”
나와 서아가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피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 맞다! 이번 참관수업에 아버지랑 국왕님이 오신데.”
그러나 그녀가 지나가며 가볍게 말한 것과 달리 담고 있는 내용은 걸어가던 나와 서아의 다리의 힘을 풀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게. 피아의 아버지는 공작이자 진조 뱀파이어인 데다. 그 국왕이란 사람은 검은 달의 주인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여기에서 끝났으면 그들만 피해 다니면 되는 거니 상관이 없었을 텐데.
“너희들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데?”
수많은 악마들을 쳐죽인 용사와 대마법사의 후손과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붉은 달의 주인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망했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