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22. 다가오는 악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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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가오는 악의 (1)
“이번에는 포기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명령에 불응해도 문제가 생기는 만큼 웬만해서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지만, 상황이 너무 복잡해져 버렸다.
“조장님. 왜 그러십니까?”
“모든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이제 그년만 죽이면 되는데.”
아무리 조직에서 자신이 혼자 행동하는걸 못 미덥다고 붙인 놈들이지만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맘에 안 드는 것과는 별개로 조직과의 연락책을 맡은 놈들이라 상황을 설명해주긴 해야 했다.
그전에 기어오르려던 버러지의 목에 단검을 선물해주는 게 먼저겠지만.
“커억….”
머리와 몸을 잘 분리해준 뒤 벌써부터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눈치 좋은 새끼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말고도 다른 조직이 하나 더 붙었다.”
목표들이 죽인 고블린 시체에 남아있던 특이한 패턴으로 보아 7등급 빌런인 마수박이… 아니 마수성애자 녀석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움직였다는 건 노예상이 움직였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노예상과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목표물이 같다면 적을 눈앞에 두고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할지도 몰랐다. 그 녀석들은 무조건 생포가 목적일 테고 자신들은 사살이 목적일 테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후퇴를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목표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붙어있다.”
이곳이 마수애호가 녀석이 함정을 파둔 땅이라 해도 조금 귀찮음이 더해질 뿐이지 녀석 따위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격을 넘고 한때는 A급 영웅이라 불렸던 자신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그 시선. 옆에 붙어있던 S급 헌터조차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여자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볼 때 느낀 존재감.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해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할 거다.”
머릿속으로 수만 번의 가상전투를 벌여봤지만, 그것은 단 한 번의 실수와 행운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왜 여기에 그러한 모습으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이 천사들이 있는 대륙으로 갔을 때 마주했던 그들과 하염없이 비슷한 존재였다.
중간계로 영락하면서 수많은 능력이 제한당했지만, 여전히 강대한 능력을 지닌.
“그건 신이다.”
그녀가 주시하던 존재가 사살해야 할 목표는 아니었지만, 어떠한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덤비는 것은 자살행위다.
나는 내 얘기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던 연락책의 휴대폰를 뺏은 뒤 통화 상대를 향해 특정한 단어를 말했다. 이런 공개적인 회선으로는 언급할 내용은 아니었지만, 한시가 급했다.
통화상대는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누군가에게 통화를 넘겼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후퇴하겠다. 충성이 의심스럽겠지만 여신이 이곳에 있는 이상 방법이 없다.”
신?
쉽게 믿을 수 없는 소리였기에 상대가 의문을 표했다. 하긴 한 번도 에리엘에서 나오지 않는 신이 버젓이 한국에 돌아다닌다는 소리를 곧바로 수긍하는 게 이상한 거다.
그래서 자신은 이곳에서 겪은 모든 일을 알려줬다. 노예상들부터 해서 선을 넘을뻔하다 죽을뻔한 일까지.
그런가…. 뭐 우리의 임무야 시간이 넉넉하니 상관은 없겠다만.
그녀는 모든 걸 듣고 나서는 나의 선택을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당장 철수를 시작하겠습니다.”
단 한시라도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관여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신들의 변덕이야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만약 그녀가 맘을 다르게 먹는다면 얼굴을 마주한 자신은 무조건 죽는다 봐야 했다.
알겠어. 곧바로 본부로 돌아와.
“감사합니다.”
노예상 녀석들만 불쌍하게 되었군.
전화에서 울려 퍼진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철수를 시작했다. 연락책들도 상황을 깨달았는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민첩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동굴 속에 설치해뒀던 모든 장비들은 연락책들이 들고 이동했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자신은 동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마력을 피어올린 순간.
“너희들은 돌아가나 봐?”
아무도 없어야 할 동굴의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본능적으로 짐작이 갔다.
“여신께서 여긴 어찌한 일이십니까.”
“그거야 너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러왔었지. 그런데 생각보다 판단이 빠르더라고.”
검은 머리와 황금색 눈을 가진 여신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버렸다. 만약 철수를 결정하지 않고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자신은 동굴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그녀는 잔뜩 쫄아있는 나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해줬다.
“네가 노리고 있는 그 애가 어떻게 되든 솔직히 알바가 아냐. 근데 그 도중에 다른 인물을 건들 것 같아서 찾아온 거야.”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그 소리는 그녀와 자신이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고, 이번에는 불가능하더라도 목표가 혼자 있을 때 작업을 들어가면 된다는 얘기였으니까.
마법을 사용해 동굴의 내부와 입구를 메꾼 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마수애호가의 수법이나 약점 같은 빌런이 아니면 모를 만한 정보들을 전하려 했었다. 적대할 이유가 없다면 호감을 쌓아두면 좋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놈이 어디 있는지는 다 알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대충 예상이 가지. 하지만 너처럼 상대를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개입할 생각은 없어.”
그녀는 베이스캠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정말로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너무 기대된다.”
자신은 미친 여신에게 한낱 유희 거리로 전락한 마수 애호가한테 명복을 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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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명복을 빌어줬던 마수애호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의 상황을 너무나 즐기고 있었다.
“크하하하. 박쥐 한 마리를 잡으러 왔는데 이런 행운이 따라주다니.”
노예상에 특급의뢰가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나선 일정이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게 많았다. 목표인 박쥐년은 둘째치고, 흑염의 용사와 대마법사의 후손부터, 순혈 서큐버스까지.
인간에게 등급을 붙인다면 무조건 1등급. 아니 그것도 솔직히 모자랐다. 1+++등급을 줘야 할 만큼 귀한 년들이었다. 만약 저년들을 잡아다가 경매에 내놓는다면 떼돈을 벌 수도 있고, 마수와 교배를 시켜 뛰어난 반인반마를 만들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외모와 몸매부터 해서 따로 장식해두고 싶은 반짝이는 붉은 눈까지.
“마왕을 건드리면서까지 진조를 씨받이로 쓰려는 그 늙은 졸부새끼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군.”
저딴 년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이상 음습한 욕망을 안 가지는 게 더 어려웠다.
목표인 박쥐년만 봐도 욕정이 울컥 올라오는데, 그거와 비슷한 년과 더 뛰어난 서큐버스년은 어찌할까.
“계획을 바꿔야겠어.”
원래는 3달 동안 만들고 곳곳에 뿌려둔 마수들을 이용해 난전을 만든 뒤 혼란을 틈타 박쥐년만을 빼 오려 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가져야 할 전리품들에 상처가 생길 수도 있었다.
“운이 따라줘서 다행이지.”
그러나 정말 신께서 도와줬는지 목표물들이 삼두견을 잡으러 간다는 첩보가 들어오면서 방법이 생겨났다.
“싸움이 격해졌을 때 난입해서 케르베로스를 죽인 뒤 여자들을 납치해라.”
“우워어어.”
“캬악”
자신의 눈앞에 있는 반인반마 두 마리라면 자신이 S급헌터놈과 신성력을 쓰는 사제년을 붙들고 있는 사이에 충분히 케르베로스와 그 3명쯤은 제압할 수 있을 거였다.
불량품이라 해도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모체와 마수를 구해다가 만든 애들이니까.
문제는 이 두 놈이 과연 여자를 무사히 데려오냐는 거였는데. 외형은 인간의 모습을 띄고 있지만 결국에는 마수일 뿐이었다. 노예의 인장을 새겨놓았다 하더라도 복잡한 명령을 이해할 지능이 없었고, 본능이 너무나 강했다.
“뭐 팔다리 한 짝쯤이야 상관은 없겠다만, 절대 먼저 손을 댈 생각은 하지 말아라.”
포기하고 어떻게 하면 저놈들이 망가트리기 전에 사제와 헌터를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냥 근본적인 문제. 즉 손을 댈 방법을 없애면 되는 거였다.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눈앞에 있던 소의 뿔이 달린 놈부터 사타구니를 천천히 도려냈다.
“크아아아아악.”
고통이 엄청난 듯 비명을 질렀지만.
“뭐 어쩔건데. 죽이기라도 하려고?.”
아까 언급했든 노예의 인장을 새겨진 이상 나의 명령이 없이는 그 어떠한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언젠가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정소를 제외한 모든 곳을 도려내었고,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고통을 참아내려고 어딘가를 깨물었는지 피가 흘러내리는 입안에 쑤셔 넣어줬다.
“그러다 이빨 다 나간다 이거라도 물고 있어.”
방금까지 몸에 달려있던 동반자를 물고 빨고 있는 소 새끼를 지나친 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도마뱀의 꼬리를 가진 놈도 똑같이 만들어줬다.
중간에 둘 다 과다출혈로 죽을 거 같아서 불로 지져주긴 했지만, 뭐 회복력은 괴물 같은 놈들이니 내일쯤이면 멀쩡히 일어날 예정이었고.
결국에는 간단한 시술로 모든 변수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
내일이 되고 목표물들이 케르베로스가 있는 곳에 도착만 한다면 계획은 시작될 것이다.
저들을 납치함으로 인해서 벌어질 일 따위는 쉽게 예상이 갔지만, 그건 자신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다.
검은 달의 주도로 다시 한번 대전쟁이 일어나던, 뿔뿔이 흩어진 흑염의 용사가문이 다시 한번 결합하던, 잠잠히 인간계에 어울려 살던 붉은 달의 서큐버스들이 활동을 개시하던.
그때쯤이면 자신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세 명의 여자와 함께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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