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 향락의 도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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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향락의 도시 (3)
한 명 한 명 쓰러져가는 헌터들을 구경하며 로비 중앙에 자리한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덕분에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지만,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상황이 꼬였어.’
분명 10분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들려서 물건만 찾아가려 했었는데 일이 커져 버렸다.
시작은 정말 별것 아니었다.
점장과 나는 협회에 들어와 조용히 접수처로 걸어갔고, 주위에서 헌터들은 우리를 대상으로 수많은 음담패설을 던졌다.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처음 오는 남자 헌터에게는 직접적인 시비를 여자 헌터에게는 음담패설을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협회의 암묵적인 통과의례 같은 일이었다.
나는 뭐 저 정도 수위 따위는 자면서 들을 수도 있는 수준이라 별생각도 들지 않았고. 점장한테도 철저하게 무시하라 말해둔 덕분에 그녀도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직접 손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가 대응하지 않자 협회는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듯했지만, 접수처에 다가가 용건을 말할 때쯤 첫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어? 잘 보니까 창녀 새끼들 아니야?”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기감이나 마력탐지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 어떤 헌터 한 명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챈 뒤 종족 채로 싸잡아서 비하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최대한의 참을성을 발휘해서 화를 참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볼 사이도 아니었고 점장에게 따로 조용히 처리하라고 눈치를 보냈으니까.
하지만 그 헌터는 우리가 아무런 반응 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얕잡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을 넘어버렸다.
이게 두 번째 문제이자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건들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던 헌터가 앞을 막아선 점장의 몸을 손으로 희롱했다.
“왜 A급 헌터님이 만져주니 기분이 좋아서 못 움직이겠어? 솔직히 너보다는 뒤쪽에 있는 여자가 취향이긴 한데 말이지.”
그러나 당장이라도 저런 헌터쯤은 짓밟았을 그녀는 내가 내렸던 무시하라는 명령 때문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이곳에서의 행동방식을 철저히 바꿔버렸다.
무관심과 무대응이 아닌 철저한 약육강식 즉 힘의 논리로.
점장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대로다.
점장을 희롱한 헌터의 팔을 잡아 뜯어내고 접수처에 처박아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헌터들은 우리를 향해 대응을 나섰지만, 점장은 지금까지 참아왔던 모든 걸 풀겠다는 듯이 미쳐 날뛰어버렸다.
“음…. 어떻게 할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피를 흩뿌리는 상황 속에서 집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든 헌터들이 제압 당할 거고, 단 한 명의 헌터 때문에 모든 인간을 다 죽여버리고 증거를 지워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 고민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에나님!”
“알아 확인했어.”
점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위험을 알렸지만, 그녀가 경고를 하기 전 시점부터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정기를 포식하며 협회 일대를 잠식해나간 마력에 감지된 이곳을 향해 다급하게 다가오는 두 명의 기운. 그들에게선 격을 넘은 자들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총장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은 남자만큼은 되어 보였고, 지금 시대에서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들이란 얘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것으로 예상되는 세리아의 마력이 묻어있는 물건.
‘재미있어졌어.’
분명 저것이 자신을 이곳까지 찾아오게 한 이유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느샌가 주위에 있던 헌터들을 전부 제압하고 다가온 점장이 물었다. 날개와 꼬리를 꺼내고 마력을 격렬하게 순환시키고 있는 거로 봐서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다는 걸 표현하는듯했다.
실제로도 그녀라면 지금 오고 있는 두 명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오히려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줄 게 확실하겠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들을 이기고 얻는 물건이나 승리 같은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폭력과 영혼 깊숙이 새길 수 있는 공포. 이것들만 있으면 물건은 물론이고 지금의 모든 상황을 무난히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주입할 수 있는 이는 자신이었다.
“내가 나설게.”
검은 날개와 꼬리를 드러낸 서큐버스 퀸은 격을 넘은 영웅들을 맞이하기 위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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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협회 개성지부장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습득한 물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지부가 습격당했다니. 처음에는 몰래카메라라도 하나 싶었지만, 전화 속에서 들리는 파열음과 비명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곧바로 발을 박찼다.
전력을 다해 뛴 덕분에 전화를 받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시점 지부의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고, 곧바로 입구를 향해 들어가 상황을 파악하려던 순간.
“멈춰.”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왔던 제1즉각대응단 단장의 손에 어깨를 붙들려서는 움직임을 제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전투태세를 갖춰라.”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기를 꺼내 들고는 온몸에 마력을 둘렀다.
그리고 다급함에 빠져 시야가 좁아졌던 자신도 문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밀도를 파악하고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저건 평범한 인간이 내뿜을 수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최소 지성을 갖춘 5급 이상의 상위급 마수. 운이 좋지 않다면 위험도 8급 이상의 빌런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만전의 준비를 마친 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지부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젠장….”
“씨발.”
그곳에 자리 잡은 절망과 마주해야 했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지닌 절망은 온전한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협회 내부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수많은 헌터들 속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형용할 수 없는 광기와 모든 존재를 굴복시키는 광폭함이었다.
“지금 당장 부대에 가서 긴급 코드를 발령해.”
단장의 앞을 가로막으며 무기를 겨눴다.
일개 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대응해야만 하는 괴물이었다.
“빨리 뛰어!”
머뭇거리는 그를 뒤쪽으로 강하게 밀어내고는 모아뒀던 오러를 전부 검에 결집시켰다. 검을 따라 푸른 오러가 유형화되며 붉게 물든 협회에 푸른 불꽃을 피어 올렸다.
이것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검강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가만히 우리를 구경하던 괴물의 입이 열렸다. 검강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으면 싶었지만 그런 건 절대 아닌 듯 보였다.
괴물은 검강을 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걸로 나를 막으려고?”
“막는 것뿐만 아니라 목을 딸수도 있겠지.”
기 싸움에서라도 지지 않기 위해 허세를 부렸다.
솔직히 단 10초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모르지 않는가? 운이 좋아서 통하거나 지원이 올 때까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그러나 그런 희망적인 생각은 5초를 채 넘기지 못했다.
우우웅
건물이 떨릴 정도의 마력 파동과 함께 붉게 물든 허공에서 수많은 마력의 검들이 생성되었고, 그것들은 전부 쓰러진 헌터들과 협회 안에 있던 민간인들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현세에 지옥을 강림시킨 괴물은 너무나 즐거워하며 입을 열었다. 마치 이런 일들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달려와서 그 검강으로 내 목을 따봐. 너의 검이 내 목을 가르는 게 빠를지 이 검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는 게 빠를지 내기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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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다. 너무나 즐거웠다.
이제야 악당들이 왜 인질을 잡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짓는 분한 표정, 부들부들 떨리는 손, 강하게 깨물어 피가 흐르는 입술 등을 보고 있자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냥 전부 눈도 못 마주치게 때리고선 강제적으로 계약을 맺으려 했는데 뒤에서 내 계획을 듣던 점장이 고개를 저으면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알려줬고.
그게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1번 계획 같은 거 말고 진작에 이런 걸 세웠으면 얼마나 좋아.’
뭐, 따지고 보면 그거나 이거나 비슷한 것 같지만 인제 와서 따져봐야 어쩌겠냐만은.
“거기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너가 문을 빠져나가도 이 사람들은 다 죽는 거야.”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협회를 빠져 나려 했던 군복을 입은 남자를 발견하고는 경고를 주었다.
아까전에 대화를 나누는 걸 들어보니 지원을 부른다는데 자신이 무슨 삼류 만화에 나오는 악당도 아니고 그걸 두고 볼 리는 없었다.
마력 검들을 움직여 인질들의 심장에 더욱 가까이 움직였다.
그제야 그들도 계획했던 모든 방법이 무산됐는지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들어 올려 항복을 표시했다. 검강을 피어 올리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으며 빌기까지 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인질들만은 살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제일로 원하던 말이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저들이 아공간에 넣어둔 물건이었다. 이 상황을 완만히 수습하는 건 덤이었고.
주위에 흩뿌려둔 마력을 전부 거두고는 검강을 일으켰던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솔직히 자신 같았으면 지금을 노려서 불의의 일격을 가했을 텐데 그 정도로 독기가 있지는 않아 보이니 다행이었다. 협박이라는 대화를 나누기는 편할 테니까.
“아공간에서 오늘 주운 물건부터 꺼내 봐.”
“오늘 주운 물건이라니. 설마?”
그는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다시 한번 인질들의 머리 위로 마력을 흩뿌려주니 얌전하게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냈다.
드디어 세리아가 보낸 그 물건의 실체를 볼 수 있었는데.
“어휴….”
보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포장이라도 평범하게 하던가 누가 봐도 나 위험한 물건입니다 라고 보이도록 만들어놓다니.
이것 때문에 참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끝으로 나는 쇠사슬이 주렁주렁 달린 금고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마지막 뒤처리를 하기 위해 뒤에서 지켜보던 점장을 불렀다.
“여기 있는 인원들 전부 기억 조작 걸 수 있지?”
서큐버스의 특기이니 못하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만, 자신은 사용할 줄 몰랐다.
금제를 푼다면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점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이 반항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금방이고 한 10분정도 걸리겠네요. 내용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대충….”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저기 접수처에 박혀있는 놈이 한 짓에 비해서는 팔 한 짝은 너무 가벼워 보였다. 저놈 한 명 때문에 자신과 점장의 멘탈이 피해를 봐야 했으니까.
“저 헌터가 악마와 계약한 뒤 협회를 습격했다고 조작하자.”
“그거 좋은 생각이시네요.”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물건도 찾고 우리의 정체도 들키지 않았으니 모든 게 만사 오케이였다.
협회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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