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5. 입학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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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입학식 (1)
한국 헌터 아카데미.
대전쟁 시절 설립되어 35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도 한 손에 꼽힐만한 유서 깊은 명문.
원래의 목적은 10살 전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 악마와 마수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지만, 협정 이후로는 종족을 불문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성인들을 모집해 교육과 교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매년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입학을 신청하지만 합격할 수 있는 것은 단 150명으로. 한국 헌터 아카데미의 신입생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이들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신입생들이 정식으로 본교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을 안내하고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교문을 지키고 있던 근접격투학 박민수 교수의 기분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번 기수는 대전쟁 시대에 그들을 배출했던 30기랑 비등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녀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수고를 자처했고, 결국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소문이 맞을 수도 있겠군.’
이곳에 재학 중인 모두가 천재라고 불릴만한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이번 신입생들은 달랐다. 전체적인 기량도 높을뿐더러, 눈에 띄던 몇몇 아이들.
온몸에 수많은 마법을 두르고 있던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와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풍기던 검은 머리의 남자아이를 필두로 한 그들은 마치 대전쟁 시대의 용사와 영웅이라 불렸던 인물들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재능의 격이 달랐다.
하지만 이들조차 태양 앞의 반딧불이로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아직도 소름 끼치는군.’
오돌토돌하게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찰랑거리는 검은색의 긴 생머리와 오묘한 빛을 띠는 붉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고고한 분위기.
하지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보이는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피곤에 찌든 얼굴,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조금 전과는 상반되게 절벽 위의 꽃과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평상시라면 학생들의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신입생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고 비틀거리는 어깨를 잡았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진정한 포식자란 무엇이고, 포식자라 자부하며 살아왔던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오묘하지만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붉은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광기를 품고 있었고, 고고한 분위기 속에는 모든 존재를 굴복시키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광폭함이 숨어있었다.
그녀는 인간들 사이에서 싸움 좀 할 줄 아는 자신과는 격이 다른 생물이었다.
그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본능의 경고에 따라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녀는 기운을 갈무리한 채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도움을 주시려 한 것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신입생은 그 말을 끝으로 입학식이 벌어지는 대강당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자신은 자리에서 멈추어 선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정말로 듣기 좋은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던 힘은 2학년에 재학 중인 어떤 여학생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평범한 대중들과 등급이 낮은 헌터들을 혼혈이나 하급을 보고 무시하지만, 진정한 힘을 아는 사람들은 연관되기조차 싫어한다는 그 종족.
서큐버스.
그 단어를 마지막으로 회상에서 빠져나온 그는 대강당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곧 있으면 입학식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작년에 벌어졌던 사건과 검은머리 신입생의 연관성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성향이나 행동거지로 봐서는 무언가 사고를 칠 것 같진 않았지만, 그건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학생들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해도 실전 경험은 턱없이 부족할 터. 아름다운 꽃 속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독까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할 테고, 분명 작년 같은 일이 벌어질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미리 충고하자니 갓 성인이 돼서 대가리만 커진 혈기왕성한 애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선을 넘어서 죽지만 말아라.”
괴물의 아가리로 뛰어들 남자 신입생들을 향해 작은 기도를 하는 박민수였다.
* * *
대강당에서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어디가 다치거나 병에 걸리는 등의 부상이었으면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이건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육체에 새겨진 본능과 영혼에 새겨진 본능의 대립으로 벌어진 문제였다.
‘여기까지 예상한 거냐.’
고통받고 있는 자신을 구경하며 낄낄대고 있을 리에나에게 속으로 욕을 하면서 어제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아침부터 감각이 마음대로 널뛰는 메롱한 컨디션에 샤를과 데보라를 불렀다.
그녀들은 나의 상태를 진찰하고는 깜짝 놀라면서 한가지의 물건을 준비해왔는데.
속칭 정기사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남성이 야한 꿈을 꿀 때 새어 나오는 정기를 주재료로 만든 사탕으로 흡정할 능력이 부족한 혼혈이나 어린 서큐버스들,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관계를 맺기 싫은 신세대 서큐버스들, 그리고 나와 같이 갑작스러운 흡정충동을 제어해야 하는 고위 서큐버스들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이라고 했다.
“종족과 성벽에 따라 맛이 다른데. 나는 천사 쪽이….”
“리에나. 지금의 감각 상태가 흡정충동이 찾아왔을 때의 초기증상이니 잘 파악해둬야 해.”
데보라가 알려주는 쓸데없는 정보는 무시하고 다시 샤를의 설명에 집중할 때였다.
“그러니깐 잠시만 실례할게.”
갑작스레 다가온 사를은 내 어깨를 살포시 눌러 침대에 눕힌 채 입을 겹쳤다.
‘이게 무슨.’
깜짝 놀라 샤를을 밀어내려 했지만, 말라있는 입안으로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촉촉한 혀가 들어오자 온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고장이 나 있는 동안 샤를의 혀는 내 입안을 자극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자극에 반응한 침샘이 분비한 타액을 갈취하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떼어냈다.
“하아… 하아….”
나는 상체를 일으킨 뒤 가쁜 숨을 내쉬며 샤를을 노려봤지만, 그녀는 계속 눈을 감은 채 무언가 음미하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 초 정도가 흐르자.
꼴깍
입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삼킨 샤를이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얼굴은 처음과달리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우… 레이나. 너는 평상시에 정기를 많이 흡수해서 흡정충동을 최대한 억제해야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퀸이라서 그런지 정도가 심해.”
그녀에 설명에 따르면 고위급 서큐버스들은 정기가 부족하거나 환경에 따라 갑작스럽게 흡정충동이 찾아오는데.
초기에는 별다른 이상 없이 감각이 조금 예민해지고 타액에 상대방을 매료하는 힘이 섞이는 정도지만, 말기에 도달한다면 감각들이 수배나 예민해져 육체의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도 매료의 힘이 묻어나는 등 모든 몸의 기관이 흡정을 위해 움직인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오늘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때 이 정기사탕을 먹어줘야 해.”
그렇다면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왜 지금까지 안 알려줬냐는 건데.
“이 기술을 개발한 게 너였으니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자신이 어련히 꿈속을 돌아다니면서 취향에 맞는 걸 찾아서 먹고 있는 줄 알았단다.
뭐 어찌 됐든 이 문제의 해결책도 찾았겠다. 감각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사탕의 포장지를 벗겨 입으로 집어넣었고.
우웩
모두가 알다시피 변기와 각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이후에 연락을 받고 찾아온 세리아의 몇 가지 검사에 의하면 나와의 전투에서 영혼에 손상을 입어 남성의 정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아카데미는 포기한 채 일단 이것부터 해결할 방법을 찾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이게 32살의 동정 영혼 즉 정신적인 문제라는 걸 파악했고. 이걸 치료할 근본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법을 찾자는 그녀의 말에도 최대한 참으며 아카데미에 다니겠다고 말했다.
세리아는 나의 선언에 못 말린다며 차선책으로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줬는데.
그건 같은 동성 즉 여성의 정기를 흡수하는 방법이었다.
매료의 효율이 절반 이상 떨어져 반하게 만들기가 힘들었고, 어찌저찌해서 전제조건을 채운다고 하더라도 흡수의 효율이 떨어져서 별로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 방법뿐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 생각하고 있었다.
흡정충동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을뿐더러, 원래의 목적이 하렘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아까도 큰일 날뻔했지.’
남자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몸은 정기를 뽑아먹기 위해 움직였고, 영혼은 그걸 격렬히 거부하며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협박했다.
다행히도 남자의 눈치가 빠른지 곧바로 거리를 벌려준 덕분에 참사가 일어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아까보다 더욱 심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에 흡정충동이 더욱 심해졌고, 그에 비례해 정신적 부담감도 증가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야.’
문자 한 통을 보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대강당을 빠져나왔다.
입학식이 끝난 뒤 샤를과 데보라에게 정기를 받기로 했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재학생이 있는 2층으로 이동해 그녀들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사고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법.
“잠깐 멈춰.”
신입생으로 보이는 남성이 계단을 올라가려는 나의 손을 낚아챈 뒤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무슨….”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했던 위험한 상황에 놀라있기도 잠시. 남자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흡정충동과 자살충동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꺼져.”
감정을 억제하며 최대한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만약 자신이 이단심문관 시절에 감정을 제어하는 연습을 소홀히 했다면 눈앞에 남자는 이미 모든 정기가 빨려서 뒤지거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뒤졌을 거였다.
그러나 그 신입생은 아까의 남자와 달리 눈치가 많이 부족한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계속 쓸데없는 얘기를 지껄였다.
“상위 가문 모임에서는 본 적이 없으니 능력 좀 있는 거지새끼겠지. 네가 그 몸으로 나를 만족시켜준다면 좋은 연줄을 만들어주겠다.”
“제발 닥치고 꺼져주라.”
“까칠한 게 딱 내 취향이야. 조교 하는 재미가 있겠어.”
제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도 벅찼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저 똥내를 풍기는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고.
콰직
무릎으로 고환을 아작내주는 선에서 지금 당장은 넘어가기로 했다.
“소리 좋네!”
“크윽….”
“너는 다음에 보자.”
아랫도리를 붙잡고 있는 고자 새끼의 얼굴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은 흡정충동을 잠재우는 게 중요했으니까.
‘2층까지 올라갈 시간은 부족해.’
하지만 통쾌한 것과는 별개로 조금 전의 사태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급박해졌고,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잠깐만 따라와 줘.”
대강당에 들어가려던 여학생의 손목을 낚아챈 뒤 구석에 있던 여자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갑작스레 손목을 붙잡힌 그녀는 다행이도 나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는 순순히 따라와 줬고.
탕 탕 철컥.
다급하게 비어있는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 당황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샤를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부드러운 키스가 아닌 정기만을 탐하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키스였다.
그러나 상대는 입술을 앙다문 채 열지 않았고, 정기의 오아시스 앞에서 강제적으로 붙잡힌 상황인지라 더욱 갈증이 치솟았다.
나는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바라봤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매료라도 걸어서 정기를 얻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듯했다.
“하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급한 나머지 시야가 넓지 못했던 자신의 실책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려나?”
우두득… 툭 툭
단추를 풀을 새도 없이 셔츠를 뜯어내다시피 끌어내려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
“거래를 하자. 네가 나에게 정기를 준다면 나는 너에게 피를 줄게.”
자신이 그녀를 원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원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