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3. 서큐버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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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큐버스? (2)
이상과 달리 현실은 냉혹하다 해야 할까.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여생을 보내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방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샤를과 데보라와 같은 이쁜 서큐버스들이 아닌. 자신을 레드문 소속 비서실장 루퍼트 힐데르트라 소개한 중년 남성이었다.
“긴 얘기가 될 것 같네요.”
그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방안에 마련되어있던 테이블로 이동시킨 뒤 자연스럽게 차를 준비해왔다.
“많이 혼란스러우실 거라 예상됩니다만. 캐모마일로 끓인 차이니 생각을 가라앉히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고마워.”
“천천히 마신 다음에 대화를 나누시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건 루퍼트라는 남자의 말대로 잠시 미뤄둬도 괜찮았다. 현재 나에게 있는 거라곤 시간뿐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의 권유에 따라 차분한 마음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눈이 크게 띄어졌다.
‘맛이 달라.’
캐모마일차가 맞긴 하지만 자신이 알던 차가 아니었다. 조금 자세하게 말해보자면 자신의 미각이 매우 예민해져서 평소 느낄 수 없었던 맛을 느끼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어렴풋이 그런 느낌은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여러 전조증상이 있음에도 새로운 몸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해프닝이라 생각했지만, 몸을 점검해보자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서큐버스의 종족 특성인지 아니면 이 몸이 특이한지는 모르나 분명 전과 비교하면 모든 감각이 배 이상으로 민감했다.
‘재미있네.’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투에 써먹을 방법이 아닌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재미있는 짓을 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그렇게 차를 음미하며 마시길 십여 분.
내가 빈 찻잔을 내려놓는 거에 맞춰서 루퍼트가 입을 열었다.
“기억이 온전치 못하시다고 샤를 님께 들었습니다. 혹시 어디까지 기억하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지막 전투. 그 이외의 기억은 전부 소실되었어.”
“동정과의 전투 때문인가 보군요.”
동정….
그럴듯한 호칭이 붙어있을 줄 알았것만 300년이 지난 후에도 그렇게 불리는 건가.
“으… 응.”
터져 나오려는 헛기침을 참아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행히도 샤를과 데보라에게 주입했던 설정이 루퍼트에게도 잘 전해졌는지 더 이상 기억에 대한걸 묻지는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앞으로 해야 할 말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툭 툭 툭 툭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생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품속에서 태블릿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붉은 달 전쟁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드리는 게 빠르겠네요.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이 뒤에 받는 거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시작된 설명은 300년간의 역사를 담은 거대한 분량이었지만, 샤를이 설명해주었던 부분과 겹치는 게 많아 금방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의 과욕으로 촉발된. 나와 리에나가 싸웠던 붉은 달 전쟁. 그 이후부터 계속된 150년간의 크고 작은 전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마계, 천계, 중간계의 모든 것을 걸고 치러진 대전쟁.
대전쟁의 여파로 천계와 마계가 붕괴하며 중간계로 편입되며 태평양에는 마계의 땅인 레기온이 대서양에는 천계의 땅인 에리엘이 나타났다.
모두가 중간계에 모여있는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중간계의 대표들은 천계와 마계에 사절을 보내 평화를 제시했고, 차원의 붕괴를 피해 대륙을 중간계로 이동시키면서 많은 힘을 소모한 천계와 마계의 대표들도 평화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현재의 평화·종전협정입니다.”
루퍼트는 그 말을 끝으로 태블릿에 한 장의 사진을 띄웠다.
인간 측 대표 25명, 마계 측 대표 대악마 5명, 천계 측 대표 대천사 6명이 거대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평화 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이후로도 여러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을 했지만, 마수들이 마계의 통제를 벗어났다거나 악의 조직이나 빌런들이 생겨났다는 걸 제외하면 별다른 일은 없었다.
요약하자면 협정 후 150년 동안 서로 기술들을 교류하고 평화롭게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가 루퍼트의 현재 시대에 대한 배경설명이었고 이제는 나의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어야 할 차례였다.
“그러면 이제 내가 질문해도 괜찮지?”
“네 어느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루퍼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의 자기소개를 듣고부터 지금까지 머리를 맴돌던 단어를 질문했다.
“붉은 달 소속 비서실장이라는 게 무슨 의미야?”
분명 붉은 달은 색욕의 대악마 리에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제외하고서 붉은 달 소속이라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자들은 휘하의 부하들뿐으로 그 이름이 갖는 무게는 일방적인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이 붉은 달 소속을 자처하는 것도 모자라 비서실장이라니.
자신이 상대했던 과거의 붉은 달에는 그런 직책 따위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조금 전 설명에서 분명히 대악마들은 건국을 함에 따라 자신의 군대를 국가에 틀에 맞춰 변경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달을 지칭할 수 있는 자들은 대악마들뿐이 없다는거다.
만약 붉은 달이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부하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 남자는 아니었다.
붉은 달을 관리하던 리에나가 오늘에서야 깨어났는데 어떻게 인간이 비서실장을 하고 있겠는가.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누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이들을 이끌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나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루퍼트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탈출 루트를 계획했다. 대답 여부에 따라 여차하면 기습을 가해 틈을 만들 생각이었다.
‘발코니로 빠져나가야겠어.’
지금은 보이지 않았지만, 등이 간질간질한 거로 봐서, 날개는 언제든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음….”
그러나 루퍼트도 그를 노려보는 나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침음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몇 초간의 대치가 이어졌을 무렵.
“리에나 거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할게.”
도주 경로로 잡아둔 발코니가 있는 곳에서 한 명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은빛 머리와 붉은 눈을 보니 영락없이 날개와 꼬리를 꺼낸 샤를 같아 보였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위가 한 곳 있었는데.
그건 바로 가슴이었다.
‘데보라 보다 더 큰 건가?’
잠시 가슴을 응시하다 보니 문득 머릿속에 한 명의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은빛 머리, 붉은 눈, 서큐버스. 그리고 규격 외의 터질듯한 가슴.
내가 리에나와 전투를 벌일 당시 부단장을 담당했던. 붉은 달의 이인자 서큐버스.
“세리아?”
“기억하고 있구나!”
번뜩 떠오른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기쁘다는 듯이 다가와 자신의 가슴에 나의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너가 깨어났다고 해서 일도 다 때려치우고 왔는걸.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읍… 으읍.”
“뭐? 너도 기쁘다고?”
“으으….”
숨을 쉬지 못해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도 잠깐잠깐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와 얼굴을 감싸고 있는 푹신한 감촉 덕분인지 다리와 아랫배에 힘이 풀려가기 시작했고.
이대로 조금만 더 지속되면 정말 천국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던 찰나.
“사장님 자제 부탁드립니다.”
나의 상황을 파악한 루퍼트의 제지로 바닥에 지도를 그리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아하하… 미안해 작아진 걸 보니 어릴 때가 생각나서 귀엽지 뭐야.”
멋쩍은 미소를 지은 세리아는 자연스럽게 루퍼트가 일어나 비어있던 의자에 앉은 뒤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레드문은 네가 남긴 유산으로 만든 회사야.”
“회사?”
“음…. 너한테는 상단이라는 표현이 쉬울까?”
회사라는 단어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준 단어를 보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 같았다.
세리아는 어느샌가 루퍼트가 타온 차를 마시며 자신을 포함한 서큐버스들의 관점으로 300년간의 이야기를 해줬고 십여 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미쳤군.’
쉽게 정리하자면.
리에나는 죽기 전에 무언가를 예상했는지 세리아에게 군을 해산시키고 몸을 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리아를 포함한 서큐버스들은 전쟁에서 피해가 크다는 핑계로 다른 대악마들이 돈과 인력을 소모할 때 존버를 탔고.
평화가 오자 레기온에 국경선을 그리는 대악마들에게 눈칫밥을 얻어먹을 바에 남아도는 재력으로 인간 대륙으로 건너가 사업을 벌인 결과 대박이 났다는 거다.
“처음에는 중간계에 대해 잘 모르니 무작정 네가 싸웠던 곳으로 갔는데 생각보다 거기 사람들이 서큐버스에 대한 인식이 좋더라고.”
세리아는 그때 시절을 떠올리는 게 재미있는지 즐겁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알아보니깐 너랑 싸웠던 동정이 평상시에 서큐버스들을 노예로 만들면 안 된다거나 마계와 쓸데없는 분쟁은 피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었나 봐.”
“다행이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그녀의 생각처럼 서큐버스를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라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좀 줄이고 싶은 마음에 투덜거린 거였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깨어나자마자 다른 대악마의 부하가 되거나 알거지로 도시를 나돌아다녔을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내 반응을 보고 기뻤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가며 얘기의 박차를 가했다.
“처음에는 술집과 카지노로 시작했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야. 그래서 엔터, 방송 쪽으로 확장하고 그게 또 대박 나고….”
서큐버스가 벌인 사업의 역사는 끝이 없었다. 유흥업으로 시작된 회사는 수많은 확장을 거쳤고 지금에서는 마도 기술을 이용한 모든 분야에 한발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기준으로 전 세계 시총 5위의 기업이 레드문이야.”
“뭐?”
어이가 없었다.
대박이 났다 대박이 났다 했지만, 기껏해야 중견기업쯤을 생각했으니깐 그런데 5위라니.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전부였다.
그러나 세리아는 여기서 놀라면 어쩌냐면서 벌리고 있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더니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했다.
“그리고 레드문의 회장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너야. 리에나.”
* * *
세리아는 영혼이 가출한 것만 같은 표정의 리에나를 뒤로한 채 밤하늘을 날아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덜렁대긴 했지만 좀 더 심해진 거 같다는.
그러다 서큐버스 퀸 답지 않게 항상 진짜 사랑을 찾겠다며 단 한 번도 성행위를 하지 않았던 소꿉친구를 떠올리고는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오랜만에 고질병이 도진 건가?”
세리아는 피식 헛웃음을 흘린 채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리에나가 지금의 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몇 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이었다.
서큐버스 퀸이라는 종족명을 인증하고 발급을 받는다면 곧바로 허가가 떨어지겠지만 그건 다른 대악마들을 포함한 모든 종족의 불필요한 관심을 끌 수 있으니 지양해야 했다.
그렇다면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고 그걸 제대로 정착시켜야 하는데, 번거롭지만 그게 가능한 곳은 한 곳뿐이었다.
‘아카데미인가.’
귀찮은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리에나에게는 미안한데 방법이 그것뿐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돈으로 찍어누르다 보면 없는 방법도 만들 수야 있지만, 아카데미의 정복을 입고 인상을 찌푸린 모습이 너무나 기대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리에나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소원을 이뤄서 자신한테 고맙다고 말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혹시 알아? 운명의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눌지.”
현재의 리에나가 들었다면 길길이 날뛸 말이겠지만.
어쩌겠나 그녀는 32살의 동정이 자신의 소꿉친구가 됐는지 알지 못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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