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
회의가 끝나고 잠시 아빠와 함께 사장실로 왔다.
“저번에 예술계 인물들 조사한 거 있잖아.”
“어! 아직 가지고 있지.”
“응. 그 사람들 작품들 좀 알아 봐줘.”
“작품들? 미술품이랑 글들?”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인다.
“미술품은 그냥 어떤 게 있는지 정도면 되고. 글들은 내가 읽어 보려고.”
“알겠어. 집으로 보내 둘게.”
“응. 그럼 난 갈게.”
“그래.”
리얼리티가 아직 기획 단계라 회의가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직원들이 일을 잘 했다.
거의 완성 된 기획 덕에 회의 시간이 살짝 길어졌다.
그 때문인지 연습실에는 연습생 여섯만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수업 다 끝났니?”
“앗! 오셨어요!”
반갑게 날 맞는 아이들.
생긴 건 제각각인데 반응은 다들 주인 만난 강아지 같아서 귀엽다.
“그래그래. 집에 안 가고 있었어?”
“나림이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헤헤.”
귀여운 것들.
의리도 있네.
한 명 한 명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나름의 친근감을 표시한 후 나림만 데리고 나온다.
“자! 들어와.”
당연하게도 도착한 곳은 내 집.
“마실 것 좀 줄까?”
“물이면 돼요.”
나림이 서서 집 안을 둘러 본다.
그리 큰 집이 아니라 별로 볼 것도 없는데.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나림을 보니까 얘 몸매가 정말 좋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이고 가슴도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살짝 공간이 남는 B컵 정도?
근데 비율이 워낙 좋고 골반이 넓어서 가만히 서 있는데도 보정한 거 같은 몸매다.
“서 있지 말고 앉아.”
“네. 헤헤.”
어색하게 웃는 나림.
나와 친근한 상태긴 하지만. 이렇게 둘이 집에 있는 건 좀 어색하겠지.
“조금 어색한가?”
“아, 아니에요. 헤헤.”
늘 웃상이 나림도 긴장 하니까 어색하게 웃네.
귀여운 모습이라 웃음이 났다.
“긴장 풀어. 하하. 그래. 나림이는 노래 할 때 뭐가 제일 힘드니?”
바로 이어지는 상담.
나림이 노래 얘기가 나오니까 바로 긴장해 답한다.
그렇게 진지할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이거 다 형식적인 거다.
그냥 따먹기 위한 빌드업이잖아.
“우음. 저는 느낌이 없는 거 같아요.”
“느낌?”
“감정을 담는 거나, 곡 분위기 라거나 하는 걸 살릴 줄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그건 꽤 어려운 부분인데.
감정이 먼저냐 실력이 먼저냐는 노래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방송에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어떤 프로듀서는 술 취한 아저씨처럼 노래하는 것만큼 듣기 좋은 게 없다며 감정을 담으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고.
어떤 프로듀서는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정은 그냥 똥 싸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악평을 한 적도 있다.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실력이 먼저라고 하고 싶다.
실력이 없는 노래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런 노래는 자신과 잘 맞는 한 곡뿐일 확률이 높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게 가수다.
그런 건 실력이 좋아야만 할 수 있다.
사실, 감정 전달도 어느 정도는 스킬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지.
내가 바꿔줄 수 있는 것도 감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실력이니까.
즉, 나림의 문제는 간단하다. 실력 부족.
“나림이는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이 노래에 분위기를 살리고 감정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해?”
“우음, 네! 예전에 실력은 진짜 별로인데 엄청 감동적인 노래를 들어 봤어요!”
“그럼 그 사람이 가수가 돼서 새로운 곡을 받으면 그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어, 으음. 힘들지 않을까요?”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럼 감정 전달이니 곡 분위기니 하는 것도 일단은 실력이 된 다음에 고민할 문제 아닐까?”
“아! 제가 실력이 부족한 거였네요!”
그게 그렇게 해맑게 말할 일이냐?
애는 밝아서 좋다만. 조금 눈치 없다는 소리 들을 거 같은 성격이다.
뭐, 이쁜 애는 뭘 해도 괜찮지.
이쁜 애가 눈치 없는 건 엉뚱하고 귀여운 매력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굳이 눈치 없는 걸 뭐라 하지 않았겠지.
“그럼 실력을 키워 봐야지.”
“어떻게요?”
“어떻게 해야 실력이 빨리 늘까?”
“으음.”
귀여운 표정으로 턱에다 브이자 모양의 손을 올리고 고민하는 나림.
“모르겠어요. 히잉.”
“그래서 내가 있는 거야.”
“헤헤.”
날 보며 맑게 웃는다.
귀여운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 손길을 느끼는 것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손길을 즐기는 나림.
얘는 진짜 생긴 거도 하는 짓도 강아지 같다.
“그럼 오늘은 나림이가 고민하던 느낌을 살리는 법을 알려줘 볼까?”
“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날 보는 나림.
“노래는 사람들한테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지?”
“으음, 전부요!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화나고 아련하고,”
“그래그래.”
내가 안 멈추면 온갖 감정이 다 나올 기세다.
“가장 많이 쓰는 감정은 뭘까?”
“음, 슬픔?”
“걸그룹이 가장 많이 쓰는 건?”
“설렘? 사랑?”
둘 다 맞다.
아이돌 그룹이 가장 많이 다루는 감정은 설렘과 사랑이다.
다른 것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두 감정은 모든 무조건 한다.
“같은 결의 감정이잖아. 나림이는 연애해봤니?”
“아, 아뇨.”
“그래? 그럼 설렜던 적은?”
“있어요!”
볼을 발그레 붉히며 말하는 나림.
“그래? 누구 때문에 설렜는데?”
“어, 그게. 누구 때문은 아니고.”
“그럼?”
“오디션 봤을 때요! 엄청 떨렸어요!”
그게 설렘이랑 비슷한 감정이긴 한데 설렘은 아니지 않을까?
오디션 전에 떨림은 설렘도 분명 있긴 하겠지만.
설렘으로 떨렸다고 하기엔 복합적인 다른 감정이 너무 많다.
“흐음, 누굴 좋아해 본 적 없니?”
“많아요! 전 피디님도 좋고, 언니들도 좋고, 우아도 좋아요!”
아! 이 눈치 없이 해맑은 아이야.
“아니 아니. 그런 좋아함 말고. 이성으로 끌렸던 사람은?”
“어어. 크, 크게 다른가요?”
“다르지. 모르는 걸 보니 없었나 보네.”
“연습만 해서. 헤헤.”
요즘 애들은 학생 때 썸씽 같은 게 별로 없나?
“혹시 여중 여고?”
“어! 맞아요!”
그럼 그렇지.
남녀 공학이었으면 또 달랐을 수 있을 텐데.
이런 얼굴과 모두에게 친근하게 구는 성격이면 엄청 고백받았을 거 같다.
그러다 보면 조금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그럼 떨리는 감정을 느껴봤을 테니까.
“으음, 이건 심각한데.”
일부러 진지하게 표정을 잡았다.
“심각해요?”
나림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면 이런 얼굴이구나.
그래도 여전히 웃상이라 기분 좋아 보이는 건 함정이지만.
“그럼. 연인 간의 사랑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얘기하겠어.”
“그, 그런!”
사실 할 수 있다.
연인 간의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니까.
평생 살면서 사랑을 한 번도 못 느껴보진 않았을 거 아냐.
그럼 그 감정으로 노래할 수 있다.
대충 스킬만 좋으면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고.
물론, 딱 맞는 감정의 노래를 불렀을 때의 감동이 더 좋긴 한데.
그 정도는 기술적으로 커버할 수 있다.
“저 어떡해요? 히잉.”
우울해 보이는 나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느껴보면 되지.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아! 지금 빨리 남자를 소개받아야겠어요!”
“어허!”
“흐힛?”
내가 엄한 소리를 내니 나림이 놀라서 쫄았다.
반응이 너무 좋으니까 자꾸 장난치고 싶네.
“지금 기획사 부사장 앞에서 연습생이 남자 만나겠다고 하는 거야?”
“아, 그, 그게. 죄송해요오. 그, 그럼 전 어떡하죠?”
“어떡하긴 외부로 유출될 일이 없는 사람을 만나야지.”
“으음, 누가 있을까요?”
그게 나야.
“소개받는 거부터 시작하자.”
“소개요? 언제요? 전 뭘 준비하면 될까요?”
부산스럽게 옷매무새를 만지는 나림.
나는 씩 웃으며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네?”
“오늘 소개받으러 온 이성민입니다.”
“어? 피, 피디님?”
나림이 당황해 동공을 떨며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나랑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해봐.”
“아! 여, 연습.”
“진심이어도 좋고.”
“흐입.”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끄러워하는 나림.
귀여운 모습이다.
“귀여우시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 아뇨. 아직 이요.”
그냥 밀어붙이니까 나림도 조금 몰입하는 거 같은데?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럼 초밥 괜찮아요?”
“네! 좋아요! 초밥 좋아해요!”
어플을 켜서 초밥을 시켰다.
그래도 애 저녁은 먹여야지.
잠시 정적이 지나고 나림을 본다.
“자! 밥 오기 전까지 얘기나 좀 해요.”
“헤헤. 좋아요.”
얘는 그냥 마냥 좋은 거 같은 느낌이라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쉴 때 집에서 뭐 해요?”
“저. 으음, 그냥 멍하니 있거나 우아나 채유랑 놀아요.”
“뭐 하고 노는 데요?”
“왓플릭챠 보거나 수다 떨거나 하죠.”
나만 말하니까 대화가 진행이 안 되는데.
“나림 씨는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어, 피디님은 쉴 때 뭐 해요?”
“책 읽거나 곡 작업 하죠.”
“와! 무슨 책 읽으세요?”
그냥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읽는데.
“딱히 정해두고 읽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유명한 거?”
“와! 저도 책 좀 읽어야 하는데.”
“굳이 읽으려고 안 해도 돼요.”
읽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굳이 바쁜데 읽을 필요 없다.
음, 뭔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거 같긴 한데.
후우, 안 되겠다.
“그만하자.”
“네? 왜요?”
생각만큼 재밌지가 않았다.
“우린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진도를 좀 빨리 나갈 필요가 있어.”
“아! 그렇네요!”
귀찮은 건 건너뛰자.
진짜 만나서 사귀는 거도 아닌데.
저런 어색한 대화 하면서 보낼 시간은 없다.
“그러니까 이제 연인이 된 거야. 어때? 감정이 좀 느껴져?”
“헤헤. 잘 모르겠어요.”
“그럼 더 해볼까?”
“네!”
얘는 진짜 답도 없이 해맑네.
나중에 조금 쎈언니 느낌의 컨셉이나. 카리스마 있는 무대 하면 너무 안 어울릴 거 같다.
그런 무대에서도 헤실헤실 웃는 거 아냐?
마주 보고 있던 자리를 옮겨 나림의 옆으로 갔다.
“앗.”
“이제 연인이니까.”
나림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애꿎은 물잔만 쪼물딱거리는 나림.
나는 손을 뻗어 나림의 손 하나를 잡았다.
“하앗.”
“남자 손 처음 잡아 봐? 뭐 이렇게 놀라?”
“처, 처음 맞는데.”
“와.”
그럼 자극을 더 크게 줘 볼까?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잡았다.
“흡.”
이번엔 깍지를 꼈다.
부끄러워서 그런지 깍지를 잡은 손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는 나림.
“기분이 어때?”
“으으, 떨려요.”
“좋은 징조네.”
“헤헤.”
나림의 웃는 얼굴을 마주 보며 살짝 분위기를 잡는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니까 부끄러운지 바로 고개를 숙이는 나림.
깍지를 한 손 말고 다른 손으로 나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헤헤.”
“귀엽긴.”
볼을 살짝 꼬집기도 하고 꽁냥한 스킨쉽을 한다.
이렇게 하니까 거리가 완전히 가까운데?
조금 더 하면 키스까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거리.
“기분이 어때?”
“아으, 자, 잘 모르겠어요오.”
살짝 볼을 붉히며 내 눈을 피하는 나림.
“나 봐봐.”
“네?”
내 말에 용기를 냈는지 고개를 돌려 마주 본다.
그대로 눈을 마주치고 조금씩 얼굴을 가까이했다.
“흡.”
숨을 참는 듯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있는 나림.
눈이라도 감지.
나림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궁금해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파하아. 하아.”
“하하. 숨은 왜 참았어?”
“그, 그게.”
민망한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하. 귀엽다.”
“헤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또 좋다고 웃는 나림.
머리를 쓰다듬으며 분위기를 풀고 다시 얼굴을 점점 가까이한다.
아까와 다르게 긴장하지 않는 모습.
이제는 실실 웃으며 내 눈을 똑바로 본다.
뭐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니까 용기가 생기기라도 하는 건가?
그대로 살짝 머리를 가까이 당겼다.
“헤으.”
이제 내 입술과 나림의 입술 사이에 거리는 5Cm 정도?
진짜 살짝만 더 가면 키스할 수 있을 거 같은 느낌.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눈으로 나림을 봤다.
이번에는 눈치 없는 나림도 무언가를 느꼈나 보다.
스르륵 눈을 감는 나림.
감는 눈꺼풀이 엄청 떨려서 잠깐 웃음이 날 뻔했다.
그럼 입술을 훔쳐볼까?
서서히 입술이 가까워졌다.
3Cm를 지나 1Cm 곧 닿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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